과이라 공화국, 또 하나의 파라과이 - 유럽계 이민자와 과이레뇨의 종족성 중남미지역원 학술총서 12
구경모 지음 / 이담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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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남미를 여행하면서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라 할 동안 파라과이를 구경했습니다. 브라질과 파라과이의 국경을 이루는 파라나강에 세워진 ‘이타이푸(ITAIPU)’댐을 구경하고 내쳐서 국경에서 멀지 않은 시우다드 델 에스테(Cuidad del Este)를 찾았던 것입니다. 높이 196m, 길이 7.76km에 달하며 저수량은 190억㎥에 달하는 이타이푸댐은 싼쌰댐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수력발전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머문 시간은 비록 짧고, 여권에 입국도장도 찍히지 않은 파라과이이지만 그래도 그 땅에 머물렀던 인연으로 읽게 된 구경모교수의 <과이라 공화국, 또 하나의 파라과이>입니다.

 

‘또 하나의 파라과이’라는 표현이 독특한 것처럼 파라과이의 중남부에 위치한 과이라주, 특히 주도인 비야리카(Villarrica)를 중심으로 한 사회현상을 조사한 문화인류학적 연구서입니다. 과이라 주의 면적은 3,846㎢, 인구는 190,035명(2002년 기준)이며, 주도인 비야리카의  면적은 247㎢, 인구는 56,385명입니다. 비야리카는 파라과이 내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존재로 취급받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역사적 사실들을 조사하고, 현지인들을 면접조사하는 방식으로 비야리카가 이질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하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하여 정리하였습니다. 많은 나라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갈등을 빚는 지역이 있기 마련입니다만, 파라과이의 비야리카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습니다.

 

문화인류학은 이제는 어느 정도 친숙해진 학문의 영역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북소리]에서도 소개한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 http://blog.joins.com/yang412/13245374>에서 읽은 것처럼, 문화인류학이란 오지사람의 삶을 우리네 삶과 비교하는 학문이라는 편견을 가졌던 시기도 있었지만, 이제는 시기적으로 혹은 지역적으로 다른 사회의 독특한 면을 조사하여 그 원인을 규명하는 학문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한국문화인류학회가 편찬한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http://blog.joins.com/yang412/10226622>를 통하여 문화인류학이라는 학문의 정체를 알리려 노력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래도 연구자가 생소한 사회에 직접 들어가서 연구를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문화인류학의 연구는 어려운 고비를 많이 넘겨야 하는 모양입니다. 문화인류학을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준비하던 저자는 파라과이의 아순시온의 빈민지역인 주끄뜨에서 현지조사를 진행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조사를 중단하는 사태를 맞았다고 합니다. 그때 대안으로 정한 주제가 비야리카였다고 합니다.

 

파라과이 사람들은 비야리카를 중심으로 한 과이라주 사람을 과이레뇨(Guaireño)라고 부르며 ‘과이레뇨가 반대로 한다’라며 자신들과 구별하거나, ‘과이레뇨가 독립을 하길 원한다’는 식으로 비판한다고 합니다. 파라과이의 현대사를 통하여 일어났던 두 차례의 내전을 자유당으로 대표되는 과이레뇨가 주도한데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1947년 홍색당이 정권을 잡았던 시기에 자유당 세력들이 과이라주를 중심으로 하여 내전을 일으켰다 실패하면서 과이레뇨가 반국가세력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된 것입니다.

 

파라과이 과이라주의 사례는 앞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씀드렸던 것은 우리의 현대사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조선시대에서도 정치적 사건과 연계한 지역차별이 있었습니다. 선조 때 정여립의 난으로 호남사람이 차별을 받았다거나, 영조 때는, 이인좌의 난으로 영남사람이 차별을 받았다거나, 순조 때는 홍경래의 난으로 서북사람이 차별을 받았다거나 하는 등입니다. 권력을 쥔 자와 권력을 가지려는 자들 사이의 갈등이 빚어낸 사회현상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지역갈등은 일제 식민지배 기간 동안에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것인데, 아마도 특정 지역이 힘을 차지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호남으로 대표되는 지역 간의 갈등은 제3공화국 이후로 조금씩 심화되어왔고, 이제는 기타 지역으로 확산되는 것 아닌가 싶어 우려된다 하겠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저자는 과이레뇨가 특별한 존재라는 인식이 굳어지게 된 문화사회적 요인과 사건들을 정리하여 이 책에 담았습니다. 먼저 인종적으로도 차이가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지역에는 메스티소라고 하는 유럽 남성과 원주민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종의 비중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안데스 산간지방에는 원주민의 비중이 높고, 반면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브라질 서남부지역 그리고 파라과이의 일부 지역에는 백인들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고 합니다. 이는 아르헨티나의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1843~1914) 장군이 파타고니아지역을 정복하면서 원주민들을 학살하거나 칠레 쪽으로 추방하는 극단적 조처를 취한 결과이기도 하고, 유럽계 이민자들이 경제적으로 활기찬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몰려들었던 것도 이유가 될 것입니다. 지리적으로 코노 수르(Cono Sur)라고 부르는 남미의 남부지역은 내륙의 파라과이를 꼭지로 아르헨티나와 우르과이, 칠레, 브라질 남부를 포함하는 원뿔모양의 지역을 말하는데, 이 지역의 주민의 90%이상이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계 이주민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비야리카가 중심이 되는 과이라주가 처음 세워진 것은 지금의 위치가 아니라 브라질의 상파울루 아래 해안으로부터 파라과이 쪽으로 향하는 지역이었습니다. 포르투갈사람들이 침입해오자 이곳에 살던 원주민들이 스페인계 파라과이정부에 지원을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1554년 파라과이 정부는 요청에 따라 원주민을 보호하고 덤으로 무역로를 개척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군대를 파견하여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탕수수밭을 경영하면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던 브라질의 포르투갈계 정복자들이 수시로 비야리카를 침입하여 원주민들을 잡아가는 바람에 도시는 이주를 거듭하여 오늘날의 파라과이 동부지역에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한편 과이라지역에 유럽계 이민이 급증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의 동맹 3국과 치른 삼국동맹전쟁(1864-1870) 뒤 입니다. 삼국동맹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파라과이는 남미에서 가장 발전한 국가였습니다. 당시에도 파라과이는 내륙국 신세로 파라과이강과 파라나강을 거쳐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국경을 흐르는 라플라타강 하류를 통하여 대서양으로 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해안선 확보가 절실하게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스 파라과이 대통령은 브라질 남부의 땅을 확보하여 항구를 얻을 속셈으로 전쟁을 준비하였습니다. 1864년 브라질은 우루과이 국경에서 일어난 갈등을 계기로 전쟁을 벌여 승리한 뒤 우루과이에 친 브라질계 정부를 세웠습니다. 파라과이는 브라질이 우루과이를 침범했을 때는 개입하지 않다가 두 달후 브라질에 선전포고를 하고, 이어서 석달 후에는 아르헨티나에도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개시하였습니다. 우루과이는 당연히 브라질 편에 섰습니다.

 

초기에는 파라과이가 전쟁을 주도했지만 1865년 6월 11일, 리아추엘로강 전투에서 막강 파라과이 함대가 브라질 함대에 패하면서 전황이 바뀌고 결국 파라과이는 멸망 일보 직전까지 몰리고 말았습니다. 전쟁 전에 53만에 달하던 인구는 약 22만명으로 줄었는데, 특히 남성인구는 90%가 사망해서 2만 8천 명만 살아남았습니다. 전쟁에 패한 파라과이는 부과된 전쟁배상금은 결국 지불하지 않았지만, 140,000k㎡정도의 영토를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넘겨주어야 했습니다. 그 결과 파라과이에 속했던 이과수폭포는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 세 나라가 나누어 가지게 되었습니다. (위키백과, ‘삼국동맹전쟁’ 참조. https://ko.wikipedia.org/wiki/%EC%82%BC%EA%B5%AD_%EB%8F%99%EB%A7%B9_%EC%A0%84%EC%9F%81)

 

전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망명해 있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파라과이 정부는 전후재건사업을 펼치면서 줄어든 인구를 회복하기 위하여 외국인에 관대한 이민정책을 폈습니다. 그리고 전쟁으로 중단되었던 아순시온과 비야리카 사이의 철도부설 사업이 속개되면서 여기에 참여한 이탈리아계 철도노동자들이 비야리카에 정착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철도 개통 이후 교통의 요지가 된 비야리카에는 유럽계 이주민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결과 대부분 메스티소로 구성된 파라과이에서 비야리카를 중심으로 한 과이레뇨들은 인종적으로 이질적인 집단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삼국동맹전쟁이 끝나고 1887년 제헌국회의 출범을 앞두고 두 개의 정치집단이 등장하게 됩니다. 식민 시기부터 아순시온을 중심으로 권력을 잡고 있던 카우디요(Caudillo)들이 클럽 코무날(Club Comunal)을 먼저 만들었습니다. 메스티소나 크리오요로 이루어진 카우디요들은 민족주의를 표방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유럽의 자유주의적 분위기에 익숙한 이주민들이 많이 살던 비야리카의 과이레뇨들은 카우디요들의 오랜 독재에 반발하여 클럽 포풀랄(Club Popular)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각각 홍색당(Partido Colorado)와 자유당(Partido Liberal)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로서 과이레뇨들은 정치적으로도 특수한 집단으로 인식되었습니다.

 

1904년 혁명으로 자유당이 정권을 차지하면서 홍색당을 탄압하였고, 이후에는 2월 혁명당, 공산당 등이 혼전을 벌이게 됩니다. 홍색당이 다시 정권을 차지하게 된 것은 1947년인데, 배경에는 1932년부터 4년 동안 이어진 차코전쟁(Guerra del Chaco)과 냉전이라는 세계사적 흐름이 있 때문이었습니다. 차코전쟁은 1878년에서 1884년까지 칠레와 벌인 태평양전쟁에서 패한 볼리비아가 해안선을 모두 칠레에 빼앗긴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내륙국 신세로 전락한 볼리비아가 라플라타강을 통하여 대서양으로 나가는 항로를 개척하고, 막대한 석유자원이 있다고 여긴 그란차코를 차지하려다가 파라과이와 충돌을 빚었는데, 전쟁은 파라과이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라틴아메리카지역에 친미정권을 세우려는 미국은 파라과이에서 광범위한 민중적 지지기반을 가진 홍색당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반발한 2월 혁명당이 자유당 및 공산당과 연합하게 되었습니다. 1947년 2월 혁명당이 아순시온의 경찰청을 습격하는 것으로 시작된 내전은 홍색당과 반홍색당이 대결하는 양상으로 치달았습니다. 비야리카에서도 자유당이 혁명군을 구성하여 공동전선을 구축하였지만, 아순시온에서 거사했다가 실패하고 아르헨티나를 거쳐 콘셉시온에서 세력을 모으던 혁명군이 8월 15일 다시 아순시온으로 진격하다가 패함으로서 내전은 수습단계에 들어섰습니다.

 

1959년에 벌어진 5월 14일 운동은 1947년의 내전에 비하면 상당히 조직적이었습니다. 라틴아메리카 좌파세력의 지원을 받았던 5월 14일 운동에서 혁명군은 아르헨티나에서 거사를 준비하였습니다. 결전의 날 파라나강을 건너 파라과이로 진입하였지만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고 대기하던 파라과이군의 기습으로 궤멸되고 말았습니다. 47년 내전 이후에 비야리카의 경제를 주도하던 자유당원들이 도피의 길에 오르면서 비야리카의 경제가 하강국면에 접어들었던 것입니다. 5월 14일 운동 이후 스트로에스네르 정권은 혁명군을 지원한 아르헨티나와의 관계를 줄이면서 브라질과의 교역을 늘리기 위하여 이과수폭로 건너편의 밀림지역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를 건설하고, 수도 아순시온과 스트로에스네르항을 잇는 국도를 건설하였습니다. 스토로에스네르항은 뒤에 시우다드 델 에스테로 이름을 바꾸었고 성장을 거듭하여 결국 비아리카를 추월하였고, 지금은 22만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파라과이 제2의 도시로 발돋움하였습니다. 시우다드 델 에스테로에는 한국인들이 적지 않게 거주하며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합니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던가요? 2008년에는 56년 만에 자유당이 정권을 다시 잡았습니다. 과이레뇨들은 파라과이 내부에서 떠돌던 비판적 담론을 부정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역사만들기를 통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는 노력을 기울인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파라과이 비야리카의 사례에서 분명 우리가 배울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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