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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서 바라본 아르헨티나 - 루이사 발렌수엘라 중단편선
루이사 발렌수엘라 지음, 조혜진 외 옮김 / 소명출판 / 2010년 9월
평점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난 여성작가 루이사 발렌수엘라의 중·단편소설 모음집입니다. 1938년에 태어났으니까, ‘추악한 전쟁(Dirty War:1976~1983)’이라고 일컬어지는 군부 독재정권과 그 전후의 아르헨티나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작품에 녹아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추악한 전쟁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고 불법적이고 잔인하게 반대파와 좌파를 탄압하던 시기를 말합니다. 집권초기 위기상황의 재정상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였지만, 임금동결과 금융규제철폐로 외채가 늘어나는 듯 사회가 불안정하게 되면서 국민들의 반대에 부딪혔던 것입니다. 추악한 전쟁기간 중에 수천명의 행방불명자가 생겼고, 지금도 5월의 광장에는 희생자들을 찾는 어머니들의 시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하여 공포에 찌든 아르헨티나의 사회상, 특히 독재정권 치하에서 여성에게 가해졌던 폭력의 실상을 충격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침대에서 바라본 아르헨티나>에는 ‘여기에서는 희한한 일이 일어난다’, ‘무기의 변화’, ‘대칭’, ‘침대에서 본 국가현실’ 등 네 편의 중단편 소설과 두편의 에세이 ‘인류학과 페미니즘 문학’, ‘반역하는 말’을 싣고 있습니다. 군부독재시절 아르헨티나의 사회상이 얼마나 끔찍했는가하는 것을 작품마다 독특하게 그리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희한한 일이 일어난다’에서는 누군가가 잃어버린 분실물을 습득한 시민들이 이것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횡액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냥 경찰서에 신고하면 될 것 같은데, 공연한 오해를 사지 않을까 겁낼 정도로 무서운 세상이었던 모양입니다.
‘무기의 변화’에서 로케대령은 라우라라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성을 성적노리개로 삼는데, 알고 보니 자신을 살해하려다 실패한 여성을 감옥에서 빼내 성적으로 학대함으로써 복수를 하였던 것으로, 군부에 의하여 저질러졌던 고문과 실종자에 관한 문제에 더하여 여성에 대한 성적폭력의 실상을 그렸습니다. 사실을 읽으면서도 불편한 느낌이 들 정도로 상황묘사가 적나라하였습니다. ‘대칭’은 1947년과 1977년이라는 두 시점을 배경으로 하여 두 씽의 남녀관계를 비교하면서, 세월이 흘러도 비슷한 일들이 반복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비극적인 일이 반복되는 것은 적당이 덮어주는 관행 탓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침대에서 본 국가현실’은 마치 한편의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오랜만에 귀국한 여주인공은 컨트리클럽에 있는 친구의 방갈로를 빌어 쉬게 되는데, 그녀가 쉬는 방갈로에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몇 가지 상황이 묘하게 겹치면서 혼란스럽게 됩니다. 군부의 탄압으로 몰락한 기층민들은 침대 밑에 숨어서 여주인공의 물건을 훔쳐가고, 창문 밖으로부터는 훈련 중인 군인들이 들어오고, 시중을 드는 마리아를 통하여 시간 단위로 환율이 치솟는 불안정한 경제상황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안정적이어야 할 의사는 택시를 운전해서 수입을 보전하는 이중생활을 하고, 동시에 성적으로 여주인공과 엮이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현실에는 여러 층위가 겹쳐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하지않고, 군부대나 빈민촌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한 여자가 은신처를 떠나 머나먼 컨트리클럽으로 갔다.(92쪽)’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저자는 추악한 전쟁이 끝나고서 귀국을 했기 때문에 저자의 자전적인 기록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외국에 체류하면서 전해들었던 조국의 끔찍한 상황을 우회적으로 기록하였다고 보이는데, 옮긴이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오랜 망명생활을 청산한 후 본국으로 돌아와서 느끼는 갈등과 부적응을 그린 자전적 성격의 이 소설에서 발렌수엘라는 권력이 폭력을 직접적인 형태로 행사할 때보다 미디어를 통해 거대 담론을 유포하는 간접적이고도 은근한 방식을 취할 때 정점을 이룬다는 사실을 지적한다.(2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