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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악의 발명품 - 삐딱하게 바로 보는
문윤수 지음, 박종진 옮김 / 한국학술정보 / 2015년 12월
평점 :
최근에 직장이 원주로 이전하는 바람에 매일 서울에서 출퇴근을 하고 있습니다. 평소보다 두 시간 정도 일찍 집을 나서야 하고, 퇴근 역시 두어 시간은 늦게 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출퇴근 버스 안에서 오롯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진 것은 분명 좋은 일입니다만, 잠을 줄여야 하기 때문에 조금 피로하다는 느낌이 들고 있습니다. 옛날 같으면 어림도 없는 원거리 출퇴근이 가능해진 것은 버스와 고속도로 그리고 지하철이라는 교통체계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인류가 발명한 것들 가운데 완벽한 것은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무언가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이익이 손해를 끼치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에 사용되고 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인류 최악의 발명품>은 시각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그 문제의 정도가 심각한 것들을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사회학을 전공하시고서 광고와 관련된 분야를 연구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 책의 기획의도를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광고학도로 출발한 한 사회학자가 대학을 벗어나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인류 발명품과 제도들에 대하여 약간의 역사적 출처를 첨가해가며 기획한 사회 불만서이다.” 불만서라고는 했지만, 책 내용을 보면 종횡무진, 좌충우돌이라는 표현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거침없는 필치가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은 인류의 퇴보를 가져올 것이라는 암울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이는 스무 가지나 되는 것들을 자본주의, 건강 그리고 의식 등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누었습니다. 자본주의의 퇴보를 가져올 것으로는 아울렛, 스마트폰, 명품, 24시 서비스 등 4가지를 들었고, 건강의 퇴보를 가져올 것으로는 소시지, 자동차, 음식물 쓰레기, 아파트, 냉장고, 플라스틱, 전자제품, 라면 등 8가지 그리고 의식의 퇴보를 가져올 수 있는 것으로는 정치인, 바비인형, 산아제한, 동물원, 결혼식, 신용카드, 정의, 퍼스트레이디 등 8 가지입니다. 물론 저자가 꼽은 스무 가지는 전적으로 저자의 주관적 판단에 따른 것으로 우선순위가 있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들은 현재 인류가 유용하고 활용하고 있는 발명품이기도 합니다. 다만 그 유용했던 초기 의도와는 달리 그것들이 한심한 물건이 되어 있거나 타당하지 못한 활용이거나, 아니면 인간성이 상실된 파르마콘(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이 된 경우가 많다라고 하였습니다.
저자의 설명을 읽다보면 삐딱한 사회학자는 이런 시각으로 사물을 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부분에서는 쉽게 공감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문어체로 쓰는 것이 맞다는 구닥다리 같은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저자가 참 자유로운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대표적 사례는 모택동과 김일성에 관한 평가와 제돌이와 관련된 생각이었습니다. 저자가 보는 모택동과 김일성은 이렇습니다. “산업노동자가 1%밖에 되지 않던 중국을 문화대혁명이라는 똥의 사회로 이끌었던 모택동은 그야말로 똥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따라 한답시고 축지법까지 쓴다던 신이 된 한국의 김일성는 돌연 민족 간의 이간질 전쟁을 일르켰다. 이들의 행동실천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들이 이끈 사회엔 결코 시민이 없었고 그들만이 있었다. 고로 시민사회는 현시될 수 없었다.(165쪽)” 제돌이를 바다로 돌려보낸 사건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저 역시 크게 공감이 가는 점이 있었습니다. 동물원에 갇혀 있는 다른 동물은 그냥 둔 채로 돌고래만 구출시켜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대목 말입니다. 돌고래를 사랑한다는 시민단체는 돌고래만 해방시킬 것이 아니라 동물원을 폐쇄하고 그들을 모두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하지 않았는지 의아하다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떠오르는 생각을 쏟아내듯 글을 쓰신 것 아닌가 싶었던 것은 일반적인 글쓰기의 맥락이라는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글쓰기의 전형에 따랐더라면 씹는 감이 떨어진다고 보았기 때문일까요? 어떻든 읽는 재미는 쏠쏠했고, 저자의 생각을 다시 곱씹어보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