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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짐에 대하여
장 보드리야르 지음, 하태환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최근에 장인어른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지난 해 여름에는 어머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는데 망극할 일이 잇달아 생기고 보니 요즘 젊은이들 말대로라면 정신줄을 놓게 생겼습니다. 사람이 영생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세상을 뜨기 마련입니다. 세상을 떠나는 것은 태어나는 것과는 달리 순서가 따로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더 오래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막상 죽을 때가 되면 ‘조금 더 살 수 있다면 좋겠다’라는 말씀을 하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오래 전부터 죽음에 대한 공부를 해오고 있습니다. 저 역시 아직까지도 자신은 없습니다만 죽음을 담담하게 맞을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장 보드리야르의 <사라짐에 대하여>도 죽음에 대한 저의 앎을 더하기 위한 책읽기입니다. 보드리야르는 모든 사물의 죽음, 즉 사라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물이라 하면 생명을 가진 생물은 물론 유무형의 무생물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장 보드리야르는 프랑스의 대표적 사상가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큰 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아 그의 지적 전통에 충실하였다고 하며, 시뮬라시옹(가장, 위장) 이론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이 이론은 실재가 실재가 아닌 것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데, 흔히 영화 <매트릭스>에서 보는 가상현실을 예로 들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우리의 역사를 역사책보다는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 더 실감하는 경향이 있다는평가를 들어 설명해보려 합니다. 드라마나 영화는 흥행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극적인 상황을 설정하기도 하는데, 이런 작업들이 때로는 역사를 왜곡한다는 지탄을 받기도 합니다. 결국 드라마나 영화를 본 젊은이들은 역사책보다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본 장면이 각인되면서 학습효과를 높이게 되고, 결국은 왜곡된 역사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면 실재(實在)했던 과거가 실재(實在)하지 않은 가상의 과거로 대치되어 굳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시뮬라시옹이론은 이렇게 현실과 가상의 관계가 전복된 현상에 주목하여 탄생한 것입니다. 보드리야르는 원본에 대한 복제를 의미하는 시뮬라크르와 그것을 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시뮬라시옹의 두 가지 개념으로 이러한 현상을 설명합니다. 우리가 매일 부딪히는 현실은 바로 시뮬라시옹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시뮬라크르의 세계라는 것이 보드리야르의 세계관입니다.
<사라짐에 대하여>는 시뮬라크르의 세계가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에 대한 보드리야르의 사유를 담고 있습니다. 100쪽이 채 안 되는 얇은 두께에다가 한쪽은 디지털 이미지를 나타내는 기호로 가득 차 있어서 금세 읽을 것 같지만, 막상 읽다보면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프랑수와 리보네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라는 마태복음 25장 29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공허의 의미를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보드리야르가 말하려는 ‘사라짐이란 결국 사라져 비어버림’이란 공허라는 개념을 새롭게 하려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보드리야르는 ‘왜 모든 것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가?’라는 물음을 두고, “내가 시간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아직 없으며 / 한 장소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사라져 버렸고 / 한 인간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이미 사망했으며 / 시절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이미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13쪽)라는 알쏭달쏭한 말로 ‘사라짐’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렇기에 보드리야르가 공허의 한계를 더 멀리 밀어내고 공허의 실체를 밝히면서 공허가 인생에서 본질이라고 한 것을 리보네는 지적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공허’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반야심경에 나오는 色卽是空 空卽是色(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구절이 떠오릅니다. 이 구절은 ‘사리불이여! 물질적 형상으로 나타나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텅 빈 본질세계와 다르지 않고, 텅 빈 그 본질 세계 또한 눈에 보이는 물질적 형상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물질적 형상의 세계는 곧 텅 빈 본질세계이며, 텅 빈 본질세계는 곧 물질적 형상의 세계인 것이다.’라고 새기는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라는 말씀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주의 본질이 비어있는 듯 채워져 있다는 불교의 인식이 최근 들어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고 있는 것이 놀랍다는 생각을 하면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사상 역시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데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중생은 끊임없이 삼계 육도(三界六道)를 돌고 돌며 생사를 거듭한다’라고 보는 윤회사상(輪廻思想)은 우리는 어느 한 시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은 업(業)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삶을 돌아가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과학의 발전에 의하여 밝혀진 바에 따르면, 생명체는 종에 따른 특별한 유전자 구성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죽은 다음에는 그 생명체의 특징이 발현되도록 했던 유전자 역시 단위 원소로 분해되어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고, 그렇게 자연으로 돌아간 원소들은 다른 생명체를 규정하는 유전자를 구성하는 요소로 재조합되는 것이니 바로 결국 윤회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만 과학에서는 불교의 윤회사상의 중요한 요소가 되는 업(業)의 본질을 아직 규명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보드리야르는 인간이 사라져 버린 세상을 예언합니다. 자연의 고갈, 종의 멸종은 물리적 과정이거나 자연적 현상일 따름이기에 인간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는 지구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보드리야르의 생각에는 인류의 폭발적 증가로 인하여 지구의 부존자원의 고갈이나, 혹은 지구환경의 오염 때문일 것이라는 환경보호론자들의 주장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마치 이런 운명(인류의 잠재적 사라짐)이 어딘가에 프로그램화 되어 있고, 우리는 이 프로그램의 장기적 집행자에 불과한 것(23쪽)”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세포가 자체 파괴를 하도록 미리 프로그램된 과정, 즉 아포토시스를 떠올리게 한다’라고 는 주석을 달아놓은 것을 보면 인류의 사라짐 역시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이상 짊어져야 할 숙명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합니다. 다만 그 설명으로 가져온 아포토시스는 개체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개체의 특성을 인류라고 하는 거대한 생물종의 집단의 특성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라져야 할 인간의 숙명은 인간이 세상을 분석하고 변형하려고 하면서 세상과 작별하고 동시에 세상에 현실성의 힘을 주기 시작한 것이라고 저자는 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인류는 자연법칙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특별한 사라짐의 방식을 새롭게 승화시킨 유일한 종이라고 규정합니다. 역설적으로 세상이 존재함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세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언젠가 미래에는 인간 역시 지구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점에 주목하였습니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 인간이 사라지게 된다면 그것은 인간이 저지른 무엇 때문일 수밖에 없기 입니다.
보드리야르는 사라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사라짐으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는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예술을 비롯하여 제도, 가치, 금기, 이데올로기, 신념 등은 사라졌으면서도 암암리에 남아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 이르게 되면 앞서 말씀드린 시뮬라시옹을 행할 주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더 이상의 시뮬라크르는 만들어지지 않게 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런데 실재가 실재하지 않은 상황에서 영원성을 얻은 시뮬라크르에게 과연 특정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이어서 사라질 운명을 가진 인간이 창조해낸 예술 역시 사라진다는 숙명을 피할 길이 없다는 점을 설명합니다. “예술 자체도 현대에는 그 사라짐의 기초 위에서만 존재한다.(29쪽)”라고 정의합니다. 그런데 예술은 사라진 다음에도 살아있는 모든 것의 패러다임이 되는데, 예술의 사라짐을 연기하는 사람이 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뮬라시옹이론에 따르면 온갖 형태의 가상현실 뒤로 현실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형태로서의 사라짐에 특정한 목적이나 목표를 부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새로운 형태의 시뮬라크르로 재탄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실제적인 것과 그 사라짐과 우리의 관계가 매우 모호하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자는 디지털 이미지의 운명으로 주제를 옮깁니다. 아날로그적 이미지가 디지털 기술로 대치되면서 놀랍도록 간편하게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지만, 결국 아날로그적인 이미지는 영원하게 파멸을 맞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디지털화가 진행될수록 필름, 즉 사물이 음화로 기입되던 그 민감한 표면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될 것이고, 이미지를 촬영하고 재생하고 합성할 수 있는 이미지 소프트웨어 패키지만 남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사진을 잘 모릅니다만, 사진에 조예를 가지고 있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날로그 사진은 분명 디지털 사진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특장을 가지고 있어 전문가의 입장에서는 아날로그 방식을 결코 버릴 수는 없다고 합니다. 간편성이나 시간적 요소에서는 강점이 있지만 사진을 찍는 행위를 비롯하여 정밀성에서는 여전히 아날로그방식이 우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디지털 이미지 기술이 가져온 폭력성의 하나로 저자는 컴퓨터 합성 이미지의 폐해를 들었습니다. 디지털 이미지는 원본적 매체로서의 사진을 사라지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아나로그 이미지가 음화를 바탕으로 하여 다양하게 표현되는 것과는 달리 디지털 이미지의 원본이란 쉽게 사라질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전자매체를 통하여 광속도로 확산될 수 도 있어 원본을 확인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디지털 이미지가 엄청난 자가증식을 통해 확산되면 그것은 더 이상 이미지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미지 죽이기의 일부가 되어 정보적 가치가 전혀 없는 상황에 이를 것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이는 주인이어야 하고, 고유의 상징적 공간을 가져야 하는 이미지의 주권에 가해지는 폭력이라고 했습니다. 사진적 행위의 디지털 자유화 속에 기술적 중재 이외에 아무런 다른 중재행위가 없는 탈인간화가 가속되다보면, 적어도 이미지의 영역에서는 인공 지능과 등가물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저자는 인간이 이룩한 기술적 발전은 궁극적으로 기술적 헤게모니의 전이를 예견했습니다. “인간 본연의 의미가 자신의 가능성의 극단에까지 가지 않는 것이라면, 기술의 본질은 자신의 가능성을 소진하고 훨씬 멀리까지 간다. 따라서 기술은 자신과 인간 사이에 결정적인 구분선을 긋고, 결국에는 인간에게 반대하는 끝없는 가능성을 전개하고, 조만간 인간의 사라짐을 초래할 것이다.(21쪽)” 인간의 지능과 비교될 수 있는 인공지능의 탄생을 예견한 듯합니다. 이로부터 저자는 그 기계가 완전히 자율적으로 움직이게 되면 인간은 오로지 자신의 죽음의 대가로만 존재하게 될 수도 있음을 이끌어내고 우려합니다. 즉, “기계 속에 인간의 모든 지능이 탑재되고, 그 기계가 완전히 자율적으로 움직이게 되면, 인간은 오직 자신의 죽음의 대가로만 존재하게 된다. 인간은 오직 기술적 사라짐의 대가로만, 디지털 질서 속에 새겨지는 대가로만 불사(不死)가 된다(81쪽)”라고 하였습니다. 존재하지 않으면서 영생을 얻는 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지 역시 고민이 필요한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자는 ‘모든 것은 사라지게 되어 있는가?’라는 해결할 수 없는 질문을 피하려면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인류적 혁명을 통하여 현재의 ‘디지털 혁명’과는 정확히 반대의 것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이와 같은 혁명이 고려된 적은 없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