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노 - 라틴아메리카의 독립투쟁 역사도서관 교양 17
존 찰스 채스틴 지음, 박구병.이성형.최해성 외 옮김 / 길(도서출판)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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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그런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역시 커피 브랜드에 관한 책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메리카노>는 콜럼버스의 항해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라틴아메리카의 독립투쟁의 과정과 의미를 정리한 책입니다. 옥스퍼드대학 출판부가 기획한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의 하나로 라틴아메리카 독립투쟁 발발 200주년을 기념하여 발간된 것입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채플 힐 캠퍼스)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19세기 라틴아메리카, 특히 브라질과 리오데라플라타 지역의 정치문화와 대중문화를 연구하고 있는 존 찰스 채스틴교수가 썼습니다.

 

북아메리카에서 열리는 학회에는 선뜻 나서게 되지만 남아메리카의 학회는 너무 멀어 그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멀다보니 관심도 적고 그러다보니 남미 여러 나라에 관한 정보들도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정열의 나라, 본고장 영국보다 축구를 잘하는 나라라는 막연한 이미지만 가지고 있어서인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알레프>, <픽션들>,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 등을 읽으면서도 작품 속으로 깊이 빠져들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남아메리카가 얼마나 멀리 있는가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여행작가 정은선님의 독특한 형식의 에세이 소설에 나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게스트하우스OJ에서 만난 나작가는 서울에서 복닥거리는 삶에서 벗어나려고 온 사람이었습니다. 나작가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온 사연은 이렇습니다. “이런 지옥 같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먼 곳이 어디일까? 여기가 생지옥이니까 가장 먼 곳은 당연히 천국일 것이다. 책상 앞에 놓인 지구본을 발견했다. 왼손 집게손가락으로 대한민국을 찍고 그 반대편을 찾아 오른손으로 찍었다.”(정은선 지음, 찾거나 혹은 버리거나 in 부에노스아이레스 150쪽, 예담, 2009년; http://blog.joins.com/yang412/13685980) 직선거리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 곳이 바로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것입니다.

 

칠레와의 FTA가 계기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남미가 우리나라와 많이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새로운 여행지로 뜨고 있다는 남미를 가보고 싶어졌습니다. 무언가를 버리려 가는 여행이 아니라 무언가를 찾으러 가는 여행으로 말입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하겠지요? 그래서 그들의 역사를 공부하려고 합니다. 라틴 아메리카의 근대사를 독립투쟁이라는 관점에서 정리한 <아메리카노>를 읽게 된 이유입니다.

 

흥미롭게도 저자는 독일의 박물학자 알렉산더 폰 훔볼트가 라틴아메리카 여행을 시작한 1799년부터 그가 죽은 1840년까지를 서술대상으로 하였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처럼 저 역시 ‘왜 훔볼트일까? 그리고 훔볼트가 누구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 훔볼트인가?’하는 의문의 답은 이렇습니다. 19세기 초반 라틴 아메리카에서 독립투쟁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데 적절한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훔볼트가 누구지?’하는 의문을 가진 분은 2013년 4월에 [북소리]에서 소개했던 <여행의 기술; http://blog.joins.com/yang412/13104741>을 다시 살펴보시기를 권합니다. <여행의 기술>에서 알랭 드 보통은 ‘호기심’이라는 여행의 주제를 설명하기 위하여 훔볼트를 인용하였던 것입니다. “훔볼트는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들을 놓치지 않았다. ‘해발 5,076미터인데도 눈 위로 바위 이끼가 보였다. 이끼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800미터 정도 아래서였다. 봉플랑 씨[훔볼트의 동행자]는 해발 4,500미터에서 나비를 한 마리 잡았으며, 거기에서 500미터를 더 올라가서도 파리를 볼 수 있었다.’(153쪽)”라고 적어 훔볼트가 왜 뛰어난 박물학자인지를 알려주는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호기심이 여행을 얼마나 풍성하게 만드는가를 잘 설명하는 인용이었습니다.

 

훔볼트는 스페인왕 카를로스4세를 설득하여 남아메리카 여행을 허락받았을 뿐 아니라 탐험비용까지도 해결하여 1799년부터 5년간 남아메리카를 여행하였습니다. 여행을 마친 뒤에는 파리에 정착하고 30권에 달하는 <신대륙의 적도지역 여행>이라는 제목의 여행기를 20년에 걸쳐 출간했습니다. 훔볼트가 여행을 떠날 무렵 만해도 라틴아메리카 대부분의 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정보는 전혀 없었던 상태였습니다. 훔볼트는 5년 동안 1만5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남아메리카의 북쪽 해안선과 내륙을 여행했고, 1,600가지 식물을 채집했으며, 크로노미터와 육분의로 측정한 결과를 바탕으로 지도를 새롭게 그렸습니다. 아마존 유역 주민들의 혈족의식을 지리와 문화적 특성을 연관하여 추론해냈습니다. 해류의 개념을 생각해냈는데, 오늘날 태평양의 동쪽 칠레와 페루연안을 따라 북상하면서 남극의 차가운 바닷물을 적도방향으로 밀어가는 페루해류를 처음 발견한 공로로 훔볼트해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훔볼트가 카를로스4세의 허락을 얻어 라틴아메리카를 여행할 무렵에는 지금의 멕시코지역으로부터, 브라질을 제외한 남아메리카의 전체 지역이 스페인의 식민지였습니다. 영토가 너무 광대하여 4개 지역으로 나누어 임명한 부왕이 다스리도록 하였는데, 지금의 멕시코와 괘테말라에 이르는 누에바에스파냐, 콜롬비아에서 베네수엘라에 이르는 적도부근의 누에바그라나다, 지금의 페루와 칠레가 포함되는 페루, 그리고 볼리비아와 아르헨티나를 포함하는 리오데라플라타 등입니다. 하지만 고산지대와 아마존의 밀림을 지나는 경계가 분명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아메리카노>에서는 이야기에 앞서 알파벳순으로 소개하고 있는 등장인물만 해도 57명에 달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는 생소하면서도 긴 스페인 이름이 혀끝에서 겉도는 느낌이 들어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편년체 방식을 취하여 정해진 기간 동안에 일어났던 이야기들을 나열하고 있어서, 사건이 흩어져있고, 독립투쟁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지역을 넘나들며 활동하였던 탓에 서로 연관을 가졌던 부분이 머릿속에 쉽게 정리되지 않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기전체로 풀었더라면 이해가 더 쉬웠을까요?

 

콜럼버스가 발견한 북대서양항로를 통하여 스페인이 라틴아메리카를 쉽게 손에 넣은 과정도 이해되지 않는 바가 많습니다. 오랜 세월을 통하여 이 지역에서 마야문명과 잉카문명을 꽃피워왔던 사람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 이유가 그저 정복자들이 가진 신식무기 때문이었을까요? 물론 우리 사회에서 크게 이슈가 되고 있는 메르스처럼 그때까지 원주민들이 겪어보지 못한 천연두와 같은 신종전염병도 크게 기여한 바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밖에 더 생각할 무엇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식민당국의 탄압으로 줄어든 원주민의 노동력을 대체하기 위하여 아프리카에서 붙잡아온 노예까지 더해져서 스페인에서 이주한 사람과 원주민 등이 복잡하게 섞이면서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정체성이 복잡해졌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스페인왕실에 대한 라틴아메리카의 충성심은 크게 변하지 않았던 것도 미스테리입니다.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독립의 기운에 싹트게 된 것은 아무래도 1789년 프랑스에서 부르봉 왕조를 무너뜨리고 국민 의회를 열어 공화 제도를 이룩한 시민 혁명 영향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오랜 세월을 통하여 라틴아메리카를 지배해온 신분차별을 지각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신분의 차이는 아프리카사람이나 원주민은 물론, 심지어 이베리아반도에서 건너온 스페인 사람과 라틴아메리카에서 출생한 스페인 사람 사이에도 차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운동에 불을 당긴 결정적인 계기는 프랑스혁명에 이어 등장한 나폴레옹이 유럽의 지배할 야심을 가지고 이베리아반도를 침략한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침략에 대한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대응은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1807년 포르투갈의 주앙6세는 리스본을 떠나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로 천도하는 결단을 내립니다. 반면 프랑스가 포르투갈을 공격하는 길을 내준 스페인은 이듬해 나폴레옹의 공격을 받고 카를로스4세 왕과 페르난도 왕자가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스페인은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 나폴레옹이 왕위에 올라 스페인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 사람들의 반발도 거세었던 탓에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 주민들의 봉기를 대량학살로 진압한 프랑스에 대하여 스페인은 군대와 민간이 힘을 합쳐 나폴레옹에 대항하게 됩니다. 프랑스가 점령하지 못한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저항협의체를 구성하고 군주가 없을 때는 주권이 각 지역에 귀속된다고 선언하였는데, 세비야가 핵심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비야의 지역협의체는 누에바에스파냐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라틴아메리카의 스페인 부왕령에서는 스페인왕실에 대한 충성도가 여전히 높았던 것 같습니다.

 

프랑스혁명과 미국의 독립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원주민과 메스티조(유럽인과 원주민의 혼혈)와 파르도(유럽인과 아프리카계의 혼혈)의 권리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앞세워 광범위한 참여를 유도하였지만, 훈련을 받지 않은 반란군은 부왕령의 정규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나폴레옹의 침략으로 야기된 군주의 부재를 틈타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보려던 반란세력은 군주지지파에 밀려 반란이 실패한 것입니다. 문제는 영국의 지원을 받아 나폴레옹을 이베리아반도에서 축출하는데 성공한 뒤에 왕위에 오른 페르난도7세가 라틴아메리카의 독립투쟁을 극단적으로 탄압하는 바람에 라틴아메리카의 독립투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는데, 원주민과 혼혈인들을 권력투쟁에서 배제한 채 크리요오(아메리카 태생의 백인)와 페닌슐라르(이베리아반도 출신의 백인) 간의 대립으로 발전하였으며 결국은 크리요오의 승리로 마무리되었습니다.

 

하지만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이후에도 영국과 프랑스는 물론 미국까지도 신생독립국가의 내정에 깊숙하게 간섭하였고, 상업적 침투가 광범위하게 일어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친 스페인의 식민통치의 특징은, “식민지 아메리카가 ‘공포, 무지, 가톨릭’이라는 세 개의 족쇄에 묶여 있었다”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혁명가 마리키타 산체스의 말에 잘 함축되어 있습니다. 처형과 폭력을 통해 주민을 지배하여 공포를 조장했고, 일반인의 시민교육을 박탈함으로써 자유로운 사상이 뿌리내릴 수 없도록 하였으며, 가톨릭교회는 이단심문소를 통하여 지배세력의 이런 행위들을 종교적으로 정당화시켰다는 것입니다.

 

90퍼센트에 이르는 문맹률에도 불구하고 독립투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확보된 인쇄기를 통하여 만들어낸 정치팸플릿을 통하여 자유주의 사상이 다양한 형태로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라틴아메리카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공화주의자였지만 이들은 지역 내의 대중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시의 세계적 분위기가 공화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던 덕을 본 것입니다. 독립을 쟁취한 이후에도 라틴아메리카의 주민들은 여전히 기존의 사회적 위계질서에 따르는 보수적인 경향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주권재민을 기본으로 하는 국가형태가 자리를 잡기까지 한 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소요되었다고 합니다.

 

19세기의 초반 대서양 양안을 뜨겁게 달구었던 라틴아메리카의 독립투쟁은 인도양을 건너 아프리카와 아시아 국가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라틴아메리카 독립투쟁의 의미를 “탈식민 세계의 주권을 확립한 것”이라고 저자는 요약하였는데, 식민지배를 탈피하여 주권이 인민들에게 있다는 점을 세계가 인식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독립 직후에도 보통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아직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유예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계기로 기승을 부리던 서양의 식민통치가 막을 내리게 되는데 ‘탈식민화의 최우선 원칙’이 크게 기여하였던 것입니다.

 

저자는 유럽계, 아프리카계 그리고 원주민의 혈통이 혼합된 독특한 라틴아메리카만의 다인종국가를 사회적으로 통합된 공화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19세기 초반을 달구었던 독립투쟁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이 씨를 뿌린 자유주의적 이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독립투쟁은 서양의 정치적 가치들을 전 세계로 확대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평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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