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어떻게 말할까 - 아버지와 함께한 마지막 한 해
윌리 오스발트 지음, 김희상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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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위크는 최근 전 세계적으로 안락사가 확대되고 있다고 전하면서 안락사에 대한 다각적 시각을 소개하였습니다.(2015년 3월 1일자 중앙일보 기사; “극단으로 치닫는 안락사” ; http://blog.joins.com/yang412/13619515) 세계 최초로 안락사를 합법화한 네덜란드에서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의사의 도움을 받아 죽음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2013년에는 4829명의 네덜란드사람이 의사의 도움으로 죽음을 선택했는데, 네덜란드인의 사망 28건 당 1건 꼴이었고, 2002년보다 세 배로 증가한 것이라고 합니다. 네덜란드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한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두 명의 의사가 인정하면 안락사가 가능한데, 매년 그 적용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락사제도의 도입에 찬성했던 네덜란드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 해 초에 KBS 1TV의 [TV 책을 보다]에 패널로 초대되어 영국 작가 조조 모예스의 소설 <미 비포 유>에 대한 생각을 말씀드릴 기회가 있었습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3369126). 이 책은 라포르시안의 [북소리]에서도 소개를 드렸기 때문에 기억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16274). 교통사고로 목을 다쳐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삶이 불가능한 현실에 절망한 윌이 안락사를 결심하였는데, 마침 윌을 간병하게 된 루이자와의 사이에 사랑이 싹트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이 결심을 번복하지 않는다는 줄거리입니다. 방송에서는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만, 안락사 시술을 받기로 한 날이 되기 전에 윌이 폐렴에 걸려 입원을 하고 치료를 받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삶이 고달파 죽음을 결심하고 있는 환자가 굳이 정해진 날짜에 안락사를 시행하기 위하여 치료를 받는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미 비포 유>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만, 안락사를 선택하는 환자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선택으로 인하여 사랑하는 사람들이 받게 될 심리적 충격은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의사조력자살을 다루었던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 http://blog.joins.com/yang412/4074659>가 있습니다. 가족들에게 자신의 병을 알리지 않고 외로운 죽음을 선택한 주인공과 그의 의사친구의 선택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당시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던 ‘고개숙인 아버지’에 대한 연민에 묻히고 말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미 비포 유>에서도 아들의 안락사 결정을 번복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던 부모가 결국은 아들의 결심에 따르게 되는데, 만약 부모님이 안락사를 결심하는 경우에 자녀들은 어떤 입장일까 궁금해집니다. 스위스의 언론인 윌리 오스발트의 <죽음을 어떻게 말할까>가 참고가 될 것 같아 이번 주에 소개합니다. <미 비포 유>에서도 소개되었지만, 스위스는 자국민이 아니더라도 합법적으로 안락사를 시행할 수 있기 때문에 안락사가 불법인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안락사를 시술받기 위하여 스위스로 간다고 합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아버지가 선택한 죽음을 ‘자유죽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유죽음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http://blog.joins.com/yang412/13302734> 가운데 ‘자유로운 죽음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너무 늦게 죽고 몇몇 사람들은 너무 일찍 죽고 있어’ 그래서 “알맞은 때에 죽어라”하고 차라투스트라는 가르친다고 합니다. “삶을 완성시키는 자는 희망을 가진 자와 맹세하는 자들에 둘러싸여 승리에 찬 죽음을 맞는 것처럼 인간은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원하기 때문에 나를 찾아오는 자유로운 죽음을 권한다.(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25쪽, 민음사 2004년)”라고 하였습니다.

 

오스트리아작가 장 아메리의 <자유죽음>에서는 자살을 대체하는 용어로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자살이라는 단어가 금기시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였을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이란 무수한 선택으로 구성되는 것인데, 탄생의 순간부터 죽어가는 과정이 삶이라고 한다면, 어느 시점에서 죽기를 선택하는 것 역시 각자의 삶의 주인의 자유의지에 따른 것으로 인정해주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장 아메리는 “자유죽음은 부조리하지만, 어리석은 것은 아니다. 자유죽음이 갖는 부조리함은 인생의 부조리를 늘리는 게 아니라 줄여준다. 적어도 우리는 자유죽음이 인생과 관련한 모든 거짓말을 회수하게 만든다는 점만큼은 인정해야 한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든, 오로지 그 거짓이라는 성격 때문에 괴롭게 만든 것을 자유죽음은 원점으로 되돌려놓는다.(장 아메리 지음, 자유죽음 249쪽, 산책자 펴냄, 2010년)”라고 말합니다. 장 아메리의 자유죽음의 범주를 <죽음을 어떻게 말할까>에서는 저자의 아버지가 선택한 조력자살로까지 확대한 것입니다.

 

<죽음을 어떻게 말할까>의 저자 윌리 오스발트는 아흔 살인 아버지가 자유죽음을 결정하자,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함께 하면서 자유죽음에 대한 자신의 시각이 이중적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독자를 위한 서문에서 “아버지의 죽음 이후 끊임없이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내 문화권에서 흔히 그러하듯 죽어감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금기시할 필요가 무엇이냐 하는 물음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두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야만 한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여기는 사람일지라도 인간의 품위 있는 죽음이라는 주제의 논의에는 동참해야 마땅하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썼다(8-9쪽)”라고 전했습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노인이 늘어가는 추세인데, 많은 노인은 이제 인생에 넌더리를 낼 정도로 늙어, 생의 마지막 시절을 곤궁하고 비참하게 보낼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제 아침 뉴스는 독거노인들의 시신기증이 늘고 있다고 전합니다(2015년 3월 8일자 머니투데이 기사. “버림받는 노인들…‘죽으면 내 시신 좀 가져가 주오’”). 자신의 시신을 의학발전과 질병치료에 기여할 연구목적으로 이용해달라는 숭고한 의미가 시신기증에는 담겨 있습니다. 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밟아야 할 학습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해부나 새로운 수술기법을 연구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독거노인들의 시신기증의 배경에는 “자신이 죽고 나서 자식들이 장례도 치르지 않을 것 같으니 스스로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이라는 이유가 더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장례비용 때문에 부모의 시신을 기증하겠다는 자녀도 있는 모양입니다. 사실 이런 문제는 사회복지의 구조적 결함으로 생기는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순리적으로 맞아야 할 죽음을 강제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드는 것입니다.

 

저자의 아버지는 자유죽음을 희망하는 고모가 조력 자살단체의 도움으로 죽음을 맞았다고 하면서 자기도 그런 죽음을 맞을 것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정작 어머니는 절대 반대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뇌종양으로 남편보다 먼저 죽음을 맞게 되었고, 그녀의 희망대로 수술이나 화학치료를 받지 않고 묵묵히 죽음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미국계 회사의 대표이사를 지낸 저자의 아버지는 상당한 재산을 모았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두 아들에게는 각각 2만 프랑을 남겨줄 것이며, 나머지 재산은 어머니에게 가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정작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시면서 공개된 유언장에는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두 아들이 스스로의 인생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있다고 보았던 아버지는 재산규모를 자녀들에게 공개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저자는 이따금씩 돈다발을 안겨줘야 하는 미성년자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아서 유산을 얼마 받을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아버지가 가끔씩 주는 돈을 감사하게 받아썼던 모양입니다.

 

“아버지의 평생에 걸친 조급함, 어렸을 때부터 나를 따라다닌 그 찍어 누르는 강제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통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게 훨씬 더 많았음에도. 이런 나 자신이 이기적이고 냉정하게 여겨졌다.(84쪽)”라고 적은 것처럼 저자는 아버지 생애의 마지막 시기를 함께 하면서 아버지에게서 일어나는 변화를 기록하고, 살아오면서 이해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마을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자유죽음을 원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데, 저자의 아내는 생각이 달랐다고 합니다. 저자의 아버지가 고통스러워하는 우울증이 노인이면 흔히 앓는 병으로 치유가 가능한 것으로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아픔도 당연히 인생의 일부이며 죽어 가는 과정에서 아마도 작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며 중요한 의미를 일깨워 주는 것(85쪽)”이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저자 역시 아내의 생각에 동의하면서도 아버지 편에 서기로 했다면서도 이유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죽음에 가까워지면서 저자의 아버지는 자신의 마지막 가는 길에 동행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스위스 법에서는 유산상속권을 가진 자가 자유죽음에 동행하는 경우, 개인적 이해관계라는 동기를 의심받게 된답니다. 한편 저자의 아버지가 준비한 ‘사망의 경우’라는 제목의 서류는 참고할만합니다. 형제 각자가 받는 유산이 균형을 이루도록 세심하게 배려한 것은 물론, <가장 먼저 할 일>, <부고>, <장례 절차와 규모>, <마지막 유지>, 심지어는 장례식에서 낭독할 고인 이력과 서신으로 부음을 전해야 할 사람들 명단에 이르기까지 당장 장례를 치를 수 있을 정도로 철저하게 정리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자의 아내를 제외하고는 가족 모두 저자의 아버지가 선택한 자유죽음을 수용하는 분위기였지만,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가 만나온 베티나여사가 동의하지 않아 아버지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인생의 기쁨을 충분히 누릴 수 없었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자책하였고, 아버지가 선택한 자유죽음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자녀들이 사무적인 변호사처럼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고 비난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죽더라도 가까웠던 사람들만큼은 계속 평안하고 즐거운 삶을 이어 가지 바랐던 것인데, 베티나 여사가 괴로워하는 모습 때문에 마음 아파했다고 합니다. 이 점에 대하여 저자는 “다른 사람의 평안을 자기 의견대로 주무르려는 사람이야말로 월권과 오만이라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99쪽)”이라며 아버지를 설득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아버지의 자유죽음을 적극 권장하는 모습입니다.

 

충격이었던 장면은 아버지 생의 마지막 날, 저자는 형과 함께 아버지의 죽음에 동행하고 그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하였다는 것입니다. “흐린 잿빛을 머금어 창백해 보이는 푸른 하늘은 천천히 아침 햇빛의 서늘한 노란빛에 잠겨 든다. 오늘은 화창한 봄날이다. 죽기에 이 얼마나 좋은 날인가! 나는 이미 어제부터 오늘 어떤 옷을 입을지 궁리해 두었다.(136쪽)” 과연 얼마나 많은 자식들이 부모가 스스로 정한 죽음을 맞는 순간에 입을 옷을 고를 수 있을까요? 뿐만 아니라 모두 둘러 앉아 건배까지....? 자살하는 사람의 일반적인 심리는 복잡하기 때문에 주저하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 조력자가 준비한 나트륨펜토바르비탈을 건네면서 “한스 그거 굉장히 써요”라고 말하자 “아, 괜찮아요. 인생에서 쓴맛은 충분히 보았소”라면서 죽음의 약을 단숨에 들이킬 수 있을까 싶습니다.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이는 “품위로 이어지는 영원한 인생, 곧 존엄으로 빛나는 인생을 원한다면, 정신을 갈고 닦을 노릇이다. 이 책이 우리의 정신을 키워갈 계기를 마련해 주기 기대한다.(174쪽)”라고 마무리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신의 생명을 갉아먹는 췌장암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스타일로 암을 이겨낸 카네기멜론 대학의 포시교수의 방식이 더 좋습니다.(제프리 재슬로 지음, 마지막 강의, 살림펴냄, 2008년; http://blog.joins.com/yang412/10248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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