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끝에서 만난 이야기 - 루이스 세풀베다 산문집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엄지영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칠레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루이스 세풀베다의 산문집 <길 끝에서 만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칠레는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FTA를 체결한 나라입니다만, 지리적으로 먼 탓인지 관심이 낮은 것은 여전한 것 같습니다. 술을 끊은 탓에 칠레산 와인을 마실 기회가 없어서일까요?

 

칠레는 남아메리카대륙의 서쪽으로 태평양을 끼고 남북으로 약 4,300km에 달하지만 폭은 175km인 띠모양으로 늘어진 나라입니다.3세기에 걸친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 1810년 독립을 선언하였고, 1818년에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민주주의를 따라 안정적인 사회를 유지하여 왔지만, 20세기 초반 군부 쿠데타로 독재정권이 들어서기도 했지만, 1964년 기독교민주당 정권으로 거쳐 1970년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사회주의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197년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공군 장성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였다. 16년간의 군부독재기간 동안 정치적 반대자들을 고문하고 학살하였는데, 피살자가 3000여명, 고문피해자가 만여명, 가혹행위를 당한 사람이 10만명이나 된다고 한다. 피노체트의 독재정권에 대하여 민주화운동이 이어져 1989년에는 선거를 통하여 정권교체에 성공하였습니다.

 

<길 끝에서 만난 이야기>는 피노체트 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펼치다가 라틴 아메리카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떠돌면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겪은 일들을 담담하게 적고 있습니다. 특히 가난과 독재정권 때문에 꿈을 잃어버린 아이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칠레의 아름다운 자연을 파괴하는 자본의 손길에 대한 격렬한 분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의 대표작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의 실제 주인공인 노인과 인디언부족을 만나게 된 과정도 읽을 수 있습니다. <길 끝에서 만난 이야기>를 읽어가다 보면 민족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이 절로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산문에서부터 칠레 사람들의 지극한 자존심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피노체트 독재가 무너지고, 일 주일 뒤 머물고 있던 독일을 떠나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를 찾아간 세풀베다가 라 빅토리아 거리를 찾아가던 장면을 이렇게 그렸습니다. “산티아고 시민들은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를 구경하러 몰려든 관광객들이나 이것저것 캐묻고 다니는 사람들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다.(24쪽)” 사실 남이 살고 있는 곳을 방문했을 때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한번쯤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 첫 번째 산문은 20여년 전에 기고한 기사이기도 합니다. <길 끝에서 만난 이야기>가 그의 발길이 닿은 다양한 곳에서의 경험을 모은 것이기 때문에 첫 번째 글이 그에게는 매주 중요했을 것 같습니다. 20여넌 전에 쓴 육필원고를 다시 만났을 때의 느낌은 어떨까요? “누구든 오래전에 쓴 글을 우연히 발견하면 오랜만에 자기 자신을 만난 듯 가슴이 뭉클해지기 마련이다. 글을 읽자 과거의 기억이 서서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9-10쪽)”

 

이 글은 사진작가 안나 페터젠이 찍은 아이들의 사진에서 발견한 순수한 모습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산티아고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이자 억압과 고통의 상징인 라 빅토리아에 사는 아이들이었지만, 그들은 해맑은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독재정권이 무너진 시점에 이 아이들이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해서 그들의 사진을 다시 찍기 위하여 찾아갔던 것입니다. 8년 전에 해맑은 모습이던 그 아이들 가운데 하나는 어쩔 수 없어 물건을 훔치다가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졌고, 수소문해서 찾은 아이들은 담배를 달래서 피우면서 ‘꿈도, 희망도 모두 사라지고 없다’고 말합니다. 한창 꿈에 부풀어 있을 나이의 십대가 꿈이 없다는 것은 그들의 삶이 얼마나 신산한 것인지를 엿볼 수 있게 합니다. 그 아이들을 모아 다시 사진을 찍는 작가 안나는 손수건을 꺼내 눈을 훔쳤다고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세풀베다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고 적었습니다. 산티아고에 사는 아이들의 모습이 부끄러울 수도 있지만, 이를 알리기로 한 것은 “어린아이들의 순수함과 따뜻한 사랑이 넘쳐 흐르는 세계를 힘껏 지키고자 하는 전 세계 남자들과 여자들이 읽게 되기를(62쪽)”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글을 쓴다고 해서 세풀베다가 문약할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면 실수하는 것입니다. 망명길에 머문 리카라콰에서는 <시몬 볼리바르 국제 여단>의 의용군으로 지원하여 총을 들고 싸운 경험도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핏줄에는 프랑스혁명을 이끈 민중의 뜨거운 피가 흐르고, 혁명정신은 여전히 마음 속에 살아있다고 적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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