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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반양장)
E.H.곰브리치 지음, 백승길 외 옮김 / 예경 / 2003년 7월
평점 :
‘곰브리치에서 에코까지, 세상을 바꾼 미술 명저62’라는 부제를 단 이진숙의 <위대한 미술책; http://blog.joins.com/yang412/13494632>이 소개하고 있는 미술 명저들을 찾아 읽어왔습니다. 전체의 10퍼센트를 조금 넘었으니 아직도 읽어야 할 책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부제에서 보는 것처럼 이진숙의 위대한 미술책의 여정은 곰브리치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00쪽에 가까운 두께에 질려 자꾸 순서가 밀리다가 드디어 읽어냈습니다. 읽기를 마치고서 우선 ‘제일 먼저 읽었어야 할 책을 미루었구나’하고 후회했습니다. 이진숙은 서양미술사에 관하여 10종의 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마 국내에 소개된 책들 가운데 고른 것 같습니다. 어떻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베스트 가운데 베스트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부피에 눌려, 그리고 작은 활자에 겁을 먹고 책장열기를 멈칫거리는 분이 계시다면 우선 읽어보시라고 말씀드립니다.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라는 유명한 첫 문장이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책장이 날개돋힌 듯이 넘어가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원시 미술부터 시작되는 긴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굽이굽이 넘어간다. (…) 서술은 잠시간 쉴 틈도 주지 않고 독자를 몰입시킨다. 한 편의 소설을 읽고 있는 듯,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이진숙, 위대한 미술책 159쪽, 민음사, 2014년)”라고 적은 이진숙은 그 이유는 바로 ‘이야기의 힘’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진숙은 곰브리치가 서양문화를 기준으로 타 문화를 비교하는 서양문화 우월론자들과는 달리 각 나라와 각 시대의 다양한 미술현상을 차별하거나 서열화하려들지 않고, 서로 다른 미적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사고 있습니다.
곰브리치는 서양미술의 흐름을 선사 및 원시미술부터 20세기 전반까지, 그리고 앞으로의 전망을 끝으로 모두 28개의 장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2세기에서부터 11세기까지의 이슬람과 중국의 미술을 ‘동방의 미술’이라는 별도의 장으로 구분하고 있기도 합니다. 1993년에 쓴 한국어판 서문에서 ‘위대한 한국의 미술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은 한국미술의 아름다움이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신비로운 불후의 업적들을 직접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하여 다루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자는 이 책이 막 미술세계를 발견한 10대의 젊은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썼다고 했습니다. 책이 쉽게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아직 낯설지만 매혹적으로 보이는 미술이라는 분야에 처음 입문하여 약간의 오리엔테이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썼다고 겸손하게 표현하였지만, “신참자에게 세부적인 것에 휘말려 혼돈됨이 없이 이 넓은 분야의 지세를 보여주고, 까다롭고 복잡한 인명과 각 시대의 양식들을 알기 쉽게 정리함으로써, 보다 더 전문적인 책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것”이라는 집필의도를 잘 구현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저나 제 아이들은 이른 나이에 이 책을 읽을 기회가 없었습니다만, 손자만큼은 일찍 읽을 수 있도록 권해볼 생각입니다.
이진숙은 곰브리치가 연대기나 사조 분류를 가급적 기피했다고 보았습니다.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인상주의 등의 명칭은 사후에 붙여진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조를 중심으로 미술가들을 분류하게 되면 편리할 수는 있겠지만, 개별 예술가의 문제의식이 특정 사조의 공식에 환원되지 않는 불합리한 점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곰브리치 역시 연대와 사조를 전혀 무시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나는 미술의 역사, 즉 건축, 회화, 조각의 역사를 논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를 안다는 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왜 미술가들이 그처럼 독특한 방법으로 일을 했는지, 그리고 그들은 왜 특정한 효과를 노리는가 하는 점들을 이해하게 도와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미술가 역시 자신의 작업을 통하여 얻으려는 효과가 무엇인지를 미리 예견할 수 없었을 것이며, 후대의 미술사가들이 비슷한 경향의 예술가들을 사조라는 틀에 묶어 쉽게 분류하고 이해하려는 의도가 작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쉽게 쓰려했다는 것은 전문적인 용어를 제한했다는 것입니다. 저자가 독자들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독자들을 일깨워주기보다는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학술적인 용어’를 남용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구름 위에서 ‘우리들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아닐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이처럼 전문적 용어를 제한하는 것 이외에도 몇 가지 원칙을 적용했다고 합니다. 첫째, 도판으로 보일 수 없는 작품은 가능한 언급을 회피한다. 둘째, 진정 훌륭한 작품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단순히 어떤 취향이나 유행의 표본으로서만 흥미가 있는 작품은 배제한다. 셋째, 널리 알려진 걸작이나 개인적 기호 때문에 제외하지 않겠다. 이러한 부정적 원칙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통하여 저자가 구현하고자 한 목적은 “미술의 역사를 평범한 말로 다시 한 번 설명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미술사의 전후 이야기가 어떻게 들어맞는지를 이해시켜주고, 장황한 설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화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의도에 관하여 몇 마디 암시를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의 미술 감상을 돕고자 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곰브리치가 이 책에서 인용한 첫 번째 도판은 플랑드르의 화가 루벤스가 그린 <아들 니콜라스의 초상>입니다. 루벤스는 아들의 귀여운 얼굴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것이고,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아들을 귀엽게 보아주기를 원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이 현실 생활에서 보고자 하는 것을 그림 속에서도 보기를 원하기 때문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작품 속에 간직해주는 미술가들에게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실물과 꼭 같이 그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고, 대상의 특징을 분명하게 잡아서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면 충분히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즉 “사물을 보이는 대로 묘사하지 않고 다르게 변형시켜서 묘사하거나 때로는 왜곡시키는 것이 옳을 때도 있는 것(25쪽)”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의 정확성을 따질 때에는 다음 두 가지를 자문해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미술가가 그가 본 사물의 외형을 변형시킨 이유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 둘째는 우리가 옳고 화가가 그르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 한 작품이 부정확하게 그려졌다고 섣불리 그것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 제일 큰 장애물은 개인적인 습관과 편견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 태도이다.(29쪽)”라는 곰브리치의 지적을 새겨두어야 하겠습니다.
저 자신도 초보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미술품 감상에 입문하는 초심자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에 대한 곰브리치의 다음 지적도 새겨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끔 카탈로그를 손에 들고 화랑을 걸어가는 것을 본다. 그들은 한 그림 앞에 걸음을 멈출 때마다 그 그림의 번호를 열심히 찾는다. 그들은 카탈로그의 페이지를 넘기다가 그 그림의 제목이나 화가의 이름을 찾으면 다시 걸어간다. (…) 그것은 그림의 감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종의 지적인 유희에 불과하다.(37쪽)” 역시 미술가들이 그처럼 독특한 방법으로 일을 했는지, 그리고 그들은 왜 특정한 효과를 노리는가 하는 점을 이해함으로써 미술작품을 보는 눈을 날카롭게 하고, 그림의 미묘한 차이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조금 안다는 초짜들이 흔히 저지르는 다른 형태의 실수도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미술에 약간의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때로 그림 앞에 서서 그림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적합한 설명서에 관한 그들의 기억을 찾는 데 몰두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처럼 설익은 지식과 속물근성이 안고 있는 생태적인 위험성애 대하여도 조심할 것을 당부합니다.
본격적으로 원시미술로부터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의 흐름은 마치 강물의 흐름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낙동강은 태백시에 있는 황지연못에서 시원해서 천삼백여 리를 흘러내려 남해로 흘러든다고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은 낙동강에 흘러드는 물줄기 가운데 남해에서 제일 멀리 있는 곳이 황지연못이라는 것이고, 황지연못 이외에서도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낙동강에 합쳐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류에 들어서면 삼각주를 이루면서 강이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지기를 거듭하게 되는데, 삼각주가 발달한 나일강 같으면 지중해로 나가는 강의 출구가 여럿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미술 역시 따로 발전해오던 경향이 만나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내고, 이렇게 만들어진 형식이 갈라져서 나중에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발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신과 영웅들을 아름다운 형상으로 시각화하는 것을 인간에게 가르쳐준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은 또한 인도 사람들에게도 불타의 형상을 창조하도록 도와주었다.(124쪽)”라고 적은 것처럼 곰브리치는 미술의 이런 움직임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러나 신자들을 교화시키기 위해서 종교적인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운 또 하나의 오리엔트 종교는 유태교였다.(127쪽)”라고도 했습니다. 당연히 로마에서도 이런 흐름이 강화되어 갔는데, 6세기말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 책이 해주는 역할을, 그림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다.”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중세 막강한 힘을 가진 가톨릭이 회화의 발전에 기여하게 된 배경입니다.
앞서 미술사조를 어떻게 구분하는가를 말씀드렸습니다만, 재미있는 것은 사조를 나타내는 단어들이 처음 쓰일 때는 낮추어 평가하거나 조롱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딕’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르네상스시대의 이탈리아 미술비평가들이 야만인이라 생각한 고트족이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뒤에 이탈리아에 도입한 양식이라고 생각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합니다. ‘매너리즘’ 역시 17세기 비평가들이 16세기말의 미술가들을 비난하는데 사용했던 가식과 천박한 모방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터무니없다거나 기괴하다는 의미를 담은 ‘바로크’라는 말도 17세기의 예술 경향에 대하여 반감을 가졌던 후대의 비평가들이 조롱하기 위하여 사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413점이나 되는 도판 가운데 제가 알고 있는 작품이 불과 23점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도 놀라웠습니다. 알고 있는 미술가인데도 다른 작품을 인용하고 있는 것은 저자가 풀어놓는 이야기의 흐름에 맞는 작품을 고르다보니 유명한 작품을 인용해서 이야기를 비틀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아직 미술에 대한 저의 관심이 일천한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12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수태고지를 담은 작품을 무려 7점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미술의 기법이나 분야를 설명하면서 인용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만 별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끝이 없는 이야기’라는 제목의 마지막장은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미술작품이 당대의 유행을 십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면 미술사가 유행의 변천사로 오해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저자는 ‘가장 최근의’ 미술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옳은 일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가장 최근의 유행을 표현하고는 있다고 하지만, 이런 경향이 역사로 남게 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조의 변화를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각 세대는 어떤 시점에서는 그 전세대의 규범에 반대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각 예술작품은 그 작품이 한 것뿐만 아니라 그 작품이 하지 않고 내버려둔 것으로부터도 동시대인들이 보여줄 수 있는 매력이 파행하는 것이다.(9쪽)”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과거 역시 변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새로 발견되어 과거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 놓을 새로운 사실들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저자가 잘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