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 잊혀진 질문 - 절망의 한복판에서 부르는 차동엽 신부의 생의 찬가
차동엽 지음 / 명진출판사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2012년 주간조선은 고 이병철 회장이 타계하기 전인 1987년 절두산 성당의 박희봉신부에게 보냈다는 ‘존재의 진리에 대한 24가지 질문’에 대한 철학자 김용규의 답변을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24]라는 제목으로 연재하였습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과학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신학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차동엽신부가 그해 초에 출간한 <잊혀진 질문>에서 이병철회장의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내놓은 바 있었습니다. 같은 질문에 대한 답변을 비교해 가면서 읽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 같이 소개합니다. 하지만 종교에 관하여 제가 아는 바가 많지 않기 때문에 피상적일 수도 있겠습니다.

 

김용규는 어떤 과정을 통하여 이병철 회장의 질문에 답을 하게 되었는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죽음을 앞둔 사람의 절실한 심정이 담겨있음을 깨닫고, “인간적이고 숙명적인 질문에 대해 한번쯤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게 옳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차동엽신부는 “예사롭지 않은 질문도 있었지만, 롤러코스터 같은 우리네 삶의 여정에서 무심결에 후렴구로 내뱉는 물음도 꽤 있었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질문지를 전해준 분께서 “이런 질문을 곧잘 받곤 하는데, 답을 시원스레 주지 못해 찝찝해한 적이 많습니다. 누군가는 한 번쯤은 통쾌하게 답변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신부님이 해보시는 것은 어떨지요?(5쪽)”라고 권하는 바람에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통쾌한 답변이 기대되는 대목입니다.

 

김용규는 신문연재라서 거두절미하고 신의 존재에 관한 첫 번째 질문으로 들어가는데 반하여, 차동엽신부는 이병철회장이 굳이 절두산성당으로 질문지를 보낸 이유가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140년 전 이곳에서 죽임을 당한 1만명이 넘는 천주교신자들에게 바친다는 소설 <흑산>이 ‘억압과 부자유의 소산’이라고 한 김훈의 절두산에 대한 소회를 인용하였습니다. 나아가 ‘소위 2040세대의 신음은 거칠고, 절망은 깊고, 분노는 격하고, 혼돈은 칠흑이다’라고 전제하면서 ‘오늘날 대한민국을 급습한 문화적․사회적․정치적 지각변동에 대한 묘책을 여론의 표층이 아니라 심층, 즉 인간 존재의 밑바닥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답변을 하는데 있어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김용규는 열한 번째 질문, ‘종교의 종류와 특징은 무엇인가? 1) 기독교(천주교, 개신교), 2) 유태교, 3) 불교, 4) 회교(마호메트교), 5) 유교, 6) 도교’과 열세 번째 질문, ‘종교의 목적은 모두 착하게 사는 것인데, 왜 천주교만 제1이고 다른 종교는 이단시하나?’에 대한 답변을 유보한 것을 제외하고는 질문 그대로에 대하여 답하고 있습니다. 반면 차동엽신부는 ‘난문쾌답을 위한 구조조정’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질문을 수정 보완했다고 했습니다. 종교 일반이 아니라 천주교 관련 물음들에 대해서는 필자의 다른 저술들에서 산발적이나마 다루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독자들더러 찾아서 읽어보라는 느낌이 들어 살짝 기분이 나빠지려고 합니다. 물음의 순서를 바꾸는 것은 시대에 따라서 물음의 우선순위가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병철회장의 물음의 행간에 감춰져 있을 ‘처절한’ 물음을 끌어냈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오랜 시간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질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물음을 ‘Big Q’로 하고, 동시대인의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물음을 ‘Real Q'로 표현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15개의 Big Q와 11개의 Real Q로 구조조정을 한 것입니다.

 

설명을 듣다보니 수련을 받던 시절에 본 시험이 생각났습니다.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데 범위가 너무 넓어 준비할 엄두가 나지 않아 교수님께 슬쩍 여쭈어보았습니다. 어디쯤을 공부하면 좋을까요? 눈치를 채셨는지 교수님께서는 시쳇말로 센 힌트를 주셨는데, 막상 시험지를 받아놓고 보니 엉뚱한 문제였습니다. 시험지 여백은 넓은데 한 줄을 채우기도 어려웠습니다. 고민 끝에 교수님께서 내셨던 문제를 지우고 힌트를 주셨던 문제를 써놓고 일필휘지로 시험지를 가득 채웠습니다. 다음날 교수님께서 부르시더니 껄껄 웃으시고는 합격을 주셨습니다. 그 옛날이니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차동엽신부의 답변은 이병철회장의 절실하였을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물론 이미 고인이 되신 분께서 답변을 들을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고인에 대한 답이라기보다는 같은 의문을 가진 분들에게 공개적으로 주는 답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 아닐까 싶습니다.

 

어떻든 이병철회장의 질문에 대한 두 분의 답변을 비교해가면서 읽어보기로 합니다. 김용규는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라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시작합니다. 성서에서 하나님이 자신이 무엇인지 밝히는 대목을 인용하였습니다, ‘누구인지’가 아니고 ‘무엇인지’입니다. 호렙산에서 현신한 하나님께 모세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느님이 나를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까.”(출애굽기 3:13)라고 영악하게 물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에흐예 아세르 에흐예”라고 답했다는데, 고대 신학자들은 이 히브리말을 ‘나는 있는 자다’ 또는 ‘나는 존재다’라고 번역해왔고, 우리말 성경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애굽기 3:14)라고 재번역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신은 존재하는 자이나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자, 즉 필멸하는 자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의 모습에 대하여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라고 김용규는 잘라 말합니다. 일찍이 히브리인들이 ‘바람’ 또는 ‘숨결’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을 뜻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모든 형체가 있는 것들의 근원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창세기에는 분명,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27)라고 적고 있는 것은 왜 일까요?

 

차동엽신부는 여덟 번째 Big Q에 ‘이 세상이 신이 있다면 대체 어디에 숨어 있나?’라는 질문에 답을 하였습니다. 함석헌선생의 <도덕경>강의에서 화두를 풀었습니다. 조금 쌩뚱맞아 보이죠?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즉, “도를 도라고 부를 수 있으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으로 부를 수 있으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199-200쪽)” 이 구절에서 차동엽신부는 우리의 지식, 지혜, 언어, 개념이 지닌 한계를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신은 개념의 한계를 벗어나는 존재이기 때문에 증명할 수 없다는 답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신은 인간이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분’이라고 설명하는 김용규의 해석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차동엽신부는 노자는 물론 이슬람 성인 라비아 알 아다위야, 20세기 사상가 카를 힐티, 성 아우구스티누스, 베이컨, 중세 신학자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칸트 등 신학자와 철학자들을 동원하는데 머물지 않고, 생텍쥐베리, 고은, 이어령과 같은 동서양의 문학가까지 동원하여 신의 존재를 논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신의 존재에 대한 다양한 사상을 논하는 강의에서 한 학생이 ‘God is no where!(신은 아무 데도 없다)’라고 적은 것을 다른 학생이 나가 ‘God is now here!(신은 지금 여기에 있다)’라고 바꾸어 강의실 분위기를 반전시켰다는 우스개까지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뒤 학생은 신이 여기 있음을 증명해야 했던 것 아닐까요? 말놀음까지 인용하는 것은 조금 그런 것 같습니다.

 

니체는 <반그리스도교>에서 그리스도교의 문제점으로 “‘신’ ‘영혼’ ‘자아’ ‘정신’ ‘자유의지’ 등과 같은 존재하지도 않은 것을 정말 존재하는 것처럼 말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예수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예수의 가르침 중에는 ‘죄와 벌’ ‘보상’의 개념, 즉 신과 인간의 관계를 멀어지게 할 만한 것들은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가 죽은 것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몸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실천의 철학을 가르친 셈인데, 정작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시켰다는 것입니다.

 

19세기 신학자 윌리엄 페일리는 <자연신학>에 시계를 정밀한 기계의 대표적인 예로 들어 시계가 제작자가 있어 만들어진 것처럼 자연 역시 신이라고 하는 제작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해서 지적설계론을 내세웠습니다만, 리처드 도킨스는 <눈먼 시계공; http://blog.joins.com/yang412/12604835>에서 “시계 속에 존재하는 설계의 증거, 그것이 설계되었다는 모든 증거는 자연의 작품에도 존재한다. 그런데 차이점은 자연의 작품 쪽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또는 그 이상으로 훨씬 복잡하다는 것이다.(리처드 도킨스 지음, 눈먼 시계공 27쪽, 사이언스북스펴냄, 2004년)”라고 반박하면서 지구상의 생물을 진화를 통하여 지금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우주물리학 역시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설명이 가능한 경지에 이르고 있습니다(크리스 임피 지음,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시공사 펴냄, 2013년;  http://blog.joins.com/yang412/13043832). 과학의 영역을 떠나 자연철학을 전공한 이브 파칼레는 는 <신은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http://blog.joins.com/yang412/12894271>에서 천문학을 비롯하여 물리학, 분자 생물학, 진화 생물학, 진화 심리학, 인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오랜 세월 쌓아올린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우주와 인간은 신의 창조물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창조과학과 지적설계론의 논리를 반박하는 데이비드 밀스의 <우주에는 신이 없다; http://blog.joins.com/yang412/12132803>에서는 종교, 특히 기독교에서 믿고 있는 신에 의한 천지창조설이 과학적 견지에서 보면 신화적 혹은 설화적일 뿐이라는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과학은 근거를 바탕으로 설명하는 학문입니다. 따라서 근거를 마련할 수 없는 영역은 과학적 설명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과학이 발전하면서 설명이 가능한 영역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진화론을 비롯하여 우주의 시원에 관한 것들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하여 “신은 불가사의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사람들은 이해되지 않은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신을 만들었다. 하지만 마침내 세상이 움직이는 원리를 알게 된다면, 신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며, 더 이상 신은 필요 없다.”라고 한 리처드 파인만의 말을 새겨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병철회장이 신의 존재에 관한 질문에서 천지창조에 관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을 인간의 지혜가 미칠 수 있는 한계 밖에 존재하는 자로 정의한 것이 과연 옳은지 의문이 남습니다.

 

천국의 존재에 대하여 두 분은 공히 믿음의 문제라고 합니다. 그런데 천국의 존재에 대한 근거가 없으니 그저 받아들이라고 한다면, 즉 비트겐스타인의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믿음’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차동엽신부의 경우는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과 사후 천국에 갈 것이라는 믿고 순교하였다는 것을 근거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순교는 순교자의 개인적인 믿음이 바탕이 된 것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근거가 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영원한 진리를 위해서만 목숨을 내놓는 법이라고 해도 진리라고 믿었던 것이 진리이기를 희망한 믿음은 아니었을까요? 삶의 고통에 관한 많은 질문들은 그야말로 종교에서 답을 줄 수 있는 문제들이라고 생각해서 논의 자체를 생략합니다. 종교가 필요한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종말에 관하여는 간단하게 답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인간이 지구를 오남용함으로써 맞을 수 있는 생태학적 종말이 있을 수도 있고, 일정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우주 현상에 따른 우주적 종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 임피교수의 <세상은 어떻게 끝나는가; http://blog.joins.com/yang412/13159055>을 읽어보시면 그 다양한 가능성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평생 종교를 가지지 않았던 이병철 회장이 죽음을 앞두고 가지게 된 인생에 대한 절실한 질문들은 여전히 질문으로 남아있는 것 아닌가 싶었다는 것으로 조심스럽게 정리를 해봅니다. 물론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른 느낌이 남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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