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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잣거리에서 만난 단원 - 김홍도의 제자가 되어 그림 여행을 떠나다
한해영 지음 / 시공아트 / 2014년 11월
평점 :
‘김홍도의 제자가 되어 그림 여행을 떠나다’라는 독특한 부제도 그렇고, <저잣거리에서 만난 단원>이라는 제목도 심상치 않습니다. 어떻게 200년을 거슬러 올라가 1806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단원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일까요?
이야기는 미술관에서 열린 ‘큐레이터와의 대화’ 프로그램에 참여한 우리의 주인공이 전(傳) 김홍도의 <부벽루연회도>의 설명을 들으면서 시작합니다. 안내를 맡은 큐레이터가 참가자들을 쥐락펴락하면서 그림으로 빠져들게 하고, 주인공은 그림 속 인물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림 속의 인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 순간 주인공은 미술관으로부터 사라지게 됩니다. 프롤로그를 ‘그림으로 들어가며’라는 심상치 않은 제목으로 한 것처럼 그림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200여년을 거슬러 광화문통에 떨어진 주인공은 단원과 조우를 하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단원이 이미 누군가 미래로부터 자신을 만나러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너무 놀라지 말게나. 자네가 온다는 연통은 미리 받았네.(29쪽)” 어떻게 가능했을까하는 궁금증을 저자는 외면하지 않고 뒤에서 설명하는 자세함까지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최근에 읽은 <너에게 닿는 거리, 17년; http://blog.joins.com/yang412/13550283>에서처럼 타임슬립을 매개로 하여 단원 김홍도를 만나 그의 작품세계를 들어본다는 내용입니다.
<별에서 온 그대>의 주인공 민준이 시공간을 자유롭게 왕래하는 것처럼 우리 주인공은 단원이 이끄는대로 시간과 공간을 이동하면서 단원의 작품에 등장하는 장면들을 보면서 작품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http://blog.joins.com/yang412/=13488647>을 읽으면서 한국화를 감상하는 법에 눈을 뜨기는 했습니다만, <저잣거리에서 만난 단원>은 전체로서의 작품을 이해하는 방법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프롤로그에서 <부벽루연회>를 설명하는 것처럼 그림을 구성하는 세밀한 부분까지 들여다보면서 당시 사회상을 추론하기도 합니다만, <씨름>을 설명하면서 제시하는 속화(俗畵)의 놀라운 의미를 짚기도 합니다. 즉 단원은 <씨름>에서 평민이 양반을 제압하는 순간을 그려냈는데, 그 이유는 실력으로만 상대를 제압하는 씨름을 통하여 양반과 평민이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다는 것이고, “보는 이와 그리는 이의 마음이 합쳐야 비로소 그림이 진가를 발휘하는 법(35쪽)”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웃음을 방편으로 한 속화를 그리게 된 것은 양반은 체면 때문에, 백성들은 끼니 때문에 웃을 새가 없어 긴장감이 팽팽한 웃음 없는 조선사회에 그림을 통하여 웃음을 찾아주려 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나아가 ‘속화를 통하여 서민의 일상에서 익살과 해학을 잡아낸 것인데, (백성의) 고단한 삶을 고단하게 그려서 보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하기보다는 웃음을 일으켜 삶에 새로운 시작을 제시했다(66쪽)’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페르소나라는 용어나, 단원이 언급하는 코쟁이들이 쓰는 말이라거나 하는 내용을 조금 앞서가는 것 아닌가 싶어 아슬아슬하다 싶기도 합니다. 이렇게 <씨름>에서 시작한 단원으로부터 직접(?) 듣는 작품해설은 <무동>, <서당>, <타작>, <빨래터>, <군선도>, <성하부전도>에 이르기까지 주로 속화를 중심으로 하여 저잣거리를 누비고 있습니다.
<군선도>에서 암시한 신선의 세계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는 것입니다. 마포에서 쪽배를 타고 금강에 이르는 일이 가능할까요? 어떻거나 금강으로 가는 길에 <선상관매도>, <도담삼봉>, <범급전산도>, <묵죽도>, <총석정도>, <소림명월도>, <주부자시의도>, <협접도> 등을 살펴봅니다. <명경대>, <창명낭화도>를 통하여 금강에 가는 방법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바로 선계의 붓으로 그림을 그리면 그곳에 눈 앞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단원은 이미 선인이었던 것입니다. ‘선인은 지혜와 사랑과 의지를 두루 갖춘 존재이며, 깨달음을 얻어 우주의 일부가 된 이들로, 선인이 지상에 인간의 몸을 가지고 내려와 선계의 법을 전하고 돌아간다.(136쪽)’라는 선교(仙敎)의 사상을 전하기도 합니다.
이제 저자는 <영원암>, <송하선인취생도>, <진주담>, <표훈사>, <은선대십이폭>, <효운동>, <구룡연>, <만물초> 등, 정조임금의 명을 받들어 금강산으로 가서 선화를 그리게 된 배경과 ‘천하절경을 잘 살리기 위해서는 형상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선화그리는 법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결국 단원은 그림으로 세상을 바꾸려 하였지만, 달이 차면 기울고 꽃은 피면 진다는 평범한 진리대로 말년이 그리 호사스럽지는 못했던 모양입니다. 다만, “세상에 남겨진 선화가 너희의 진화를 도울 것이다!(249”라는 속내를 가졌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저자께서 지나치게 앞서간 것은 아닐 듯 싶기도 합니다.
‘그림에서 나오며’라는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나무꾼이 산속에서 선인들이 바둑 두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돌아와보니 도끼자루가 썩을 만큼 긴 시간이 흘렀더라는 고사에서 힌트를 얻어 ‘그림 속 세상’을 구경할 생각이 들었음을 비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꿈은 세상을 넓게 만들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자의 꿈이 널리 세상에 펼쳐지기를 같이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