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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와 처벌 ㅣ 나남신서 29
미셸 푸코 지음, 오생근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금년에는 개인적으로나 업무적으로나 송사(訟事)와 관련된 일들이 많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운영하고 있는 블로그에 올린 글내용에 포함된 사진이 지적재산권을 침해했으니 송사로 번지기 전에 관련 이미지를 구매하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피해정도를 입증할 자료와 적절한 배상규모를 제시해달라는 답변을 보냈는데 별다른 진전은 없는 상황입니다. 업무적으로는 신의료기술을 개발한 업체가 적절한 행정절차를 생략하고 판매한 진단기술에 대하여 심평원이 환수조처를 했는데, 해당 병원들이 제기한 행정소송에 증인으로 출석하거나 자문을 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모두 법이 정한 기준을 위반해서 생긴 일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기준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가를 살피는 일과 기준을 지키지 않았을 때는 어떠한 처벌을 부과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폭증하고 있는 기준이 잘 지켜지는지 감시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춘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크게 중요하지 않은 사항들은 자율에 맡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그 기준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잘 전파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고의성이 없다면 계도차원에서 처벌을 면제하기도 합니다. 국민건강보험제도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의료서비스가 적절하게 제공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심평원에서 일하다보니 관련기관에서 심평원을 오직 감시하고 처벌하는 기능만 가지고 있는 기관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계기가 되어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읽게 되었고, 몇 가지 느낀 점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광기의 역사; http://blog.joins.com/yang412/9772557>와 <지식의 고고학; http://blog.joins.com/yang412/12912054>으로 만나본 적이 있는 미셀 푸코는 구조주의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 철학자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2년 전에 [북소리]에서 <지식의 고고학>을 소개하면서 우리사회가 푸코의 사상에 대하여 오해를 해온 점이 있는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흔히 좌파적 경향이 있다고 알려진 푸코는 오히려 진보주의적 정서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고, 오로지 인간의 주체성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을 기획하신 분은 ‘역자 서문’을 먼저 읽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아마도 어려운 책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저자가 “근대적 정신과 새로운 사법권력과의 상관적인 역사를 밝히는 것(52쪽)”을 목표로 이 책을 썼다고 한 것을 두고, 이 책을 번역하신 오생근교수님은 “감옥, 죄수복, 쇠사슬, 처형장 등의 물질적인 형태뿐 아니라 범죄, 형벌, 재판, 법률 등의 비물질적이고 추상적인 문제를 다루면서, 푸코는 감옥의 역사를 서술한 것이 아니라 감옥과 감시체제를 통한 권력의 정체와 전략을 파헤친 것(6쪽)”이라고 요약하였습니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의 역사를 정리하는데 있어 앙시앵 레짐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하던 잔인한 신체형이 강도를 낮추어가게 되는 과정과 처벌중심에서 훈육과 규범화된 규제로 대체하고,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감시를 강화하기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근대들어 처벌의 중심이 되고 있는 감옥의 운영에 관하여 정리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글머리에서 인용하고 있는 1757년 3월 2일에 있었던 다미엥의 처형장면은 앙시앵 레짐의 시대에 벌어지던 처벌이 얼마나 끔찍했는가를 알게 해줍니다. “상기한 호송차로 그레브 광장에 옮겨진 다음, 그곳에 설치될 처형대 위에서 가슴, 팔, 넓적다리, 장딴지를 뜨겁게 달군 쇠집게로 고문을 가하고, 그 오른손은 국왕을 살해하려 했을 때의 단도를 잡게 한 채, 유황불로 태워야 한다. 계속해서 쇠집게로 지진 곳에 불로 녹인 납, 펄펄 끓는 기름, 지글지글 끓는 송진, 밀랍과 유황의 용해물을 붓고, 몸은 네 마리의 말이 잡아끌어 사지를 절단하게 한 뒤, 손발과 몸은 불태워 없애고 그 재는 바람에 날려 버린다.(23쪽)”
이와 같은 끔찍한 처벌은 다중이 모인 자리에서 이루어졌는데, 신체적 형벌을 가하는데 일정한 기준이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 형벌은 평가하고, 비교하고, 등급을 정할 수 있는, 어떤 분량의 고통을 만들어내야 한다. 둘째, 고통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규칙이 수반된다. 셋째, 신체형은 일종의 의식을 구성한다. 그 의식에는 형벌의 희생자를 불명예스러운 인간으로 만들어야 하며, 만인에게 사법 측의 승리로 보여야 한다는 두 가지 요청을 충족해야 했습니다. 즉 처벌은 공정한 판단으로 결정된 것이며, 그로 인하여 범죄자가 받는 끔찍한 고통이 일반인에게는 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는 억압효과를 나타낼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중대하고 잔혹한 사형을 내릴 만한 범죄를 본보기로 삼아 처벌하는 일이야말로 공공의 안전과 이익을 위한 것(79쪽)”이라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공개적 형벌의 집행에 포함되는 과정으로는, 첫째, 죄인은 스스로 유죄임을 인정하고 공개적으로 사과하도록 하였습니다. 둘째, 자백을 반복하게 하는데, 이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을 자백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셋째, 신체형을 범죄와 연결시키는데, 범죄당시의 상황을 재현토록 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 이어진 공개적 형태의 신체형이 중단된 것은 상황의 변화에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처형장면을 보기 위하여 모여드는 군중은 양의적(兩意的) 역할을 가지는데, 처벌과정을 지켜보면서 두려움을 품도록 하는 목적으로 초대된 민중은 처벌을 보증하는 입회인이 되기도 했던 까닭에 어느 정도까지는 처벌행위에 관여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군중은 범죄자에게 욕설을 퍼붓거나 심지어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정도가 지나쳐 범죄자를 보호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고, 그 경우에 사람들은 사법당국에 격렬하게 항의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민중의 의식이 깨어감에 따라 구경꾼으로 동원된 민중이 권력의 처벌을 거부하는 상황도 생겼다고 합니다.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처형을 방해하고, 사형집행인의 손에서 사형수를 탈취하고, 폭력에 의존하여 죄인의 사면을 얻어내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형집행인을 공격하고, 재판관을 매도하고, 판결에 대해 큰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는 것(105쪽)”입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형수가 판결의 부당함을 호소하여 민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경우에는 오히려 권력이 농락당하고 죄인이 영웅시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형벌을 완화시켜 범죄에 적합한 것으로 해야 한다. 사형은 살인범에게만 부과해야 한다. 인간성에 위배되는 신체형은 폐지해야 한다.”라는 입장이 나오게 된 것은, 처형의 폭력성이 권력의 정당한 행사를 넘어서고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 개혁자들은 사회집단 전체를 통해 일반화될 수 있고, 경제적이고 효과적인 처벌수단을 다음 여섯 가지 원칙에 근거하여 마련하였습니다. 1. 분량의 최소화 법칙, 2. 관념성 충족의 법칙, 3. 측면적 효과의 법칙, 4. 완벽한 확실성의 법칙, 5. 보편적 진실의 법칙, 6. 최상의 특성화 법칙, 등입니다. 이 법칙들은 범죄로 인하여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되는 이익을 상쇄할 수 있는 처벌효과로 범죄를 사전에 예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범죄행위에 대하여 징벌적 효과를 기대하던 사법체계가 범죄를 예방하는 효과를 기대하는 것으로 변화하면서 규율을 학습함으로써 징벌을 대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규율은 신체를 통제하여 권력에 순종하도록 만드는 효과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규율을 효과적으로 적용하기 위하여 시간과 공간에 따라 개인을 분할하는 기술이 필요하였습니다. 규율은 통제하는 신체로부터 네 가지 성격이 구비된 개체성을 만들어낸다고 하는데, “(공간배분의 작용에 의해서) 독방 중심적이고, (활동의 규범화에 의해서) 유기적이며, (시간의 축적에 의해서는) 생성적이며, (여러 가지 힘을 조립하는 점으로는) 결합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263쪽)”라고 합니다. 규율이 적용되는 대표적 집단은 군대입니다. 그밖에도 수도원, 학교, 구빈원 등이 있는데, 병원 역시 규율이 적용되는 대상이라고 해서 열심히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병원이 강력한 규율을 요구하는 장소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페스트를 비롯한 전염병의 유행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환자격리 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도시에 페스트가 발생하면 우선 엄격한 공간적 분할이라는 행정조치를 내려 그 도시와 지방의 봉쇄는 물론이고, 그곳에서 나가는 것을 금지하며, 이를 위반하면 사형에 처하는 것입니다. 40일간의 검역기간이 끝날 때까지, “폐쇄되고, 세분되고, 모든 면에서 감시받는 이 공간에서 개인들은 고정된 자리에서 꼼짝 못하고, 아무리 사소한 움직임이라도 통제되며, 모든 사건들이 기록되고, 끊임없는 기록 작업이 중심부와 주변부를 연결시키고, 권력은 끊임없는 위계질서의 형상으로 완벽하게 행사되고, 개인은 줄곧 기록되고 검사되며, 생존자, 병자, 사망자로 구별된다. 이러한 모든 것이 규율 중심적 장치의 충실한 모형을 만든다. 페스트라는 전염병에 대응하는 방법이 질서이고, 질서는 모든 혼란을 정리해 주는 기능을 갖는다.(306쪽)”라고 했습니다. 개인의 일탈된 행동이 집단을 위기로 빠트릴 수 있다는 인식을 공유하였기에 불편을 감수하였을 것입니다.
최근 페스트에 버금갈 정도로 위험한 전염병인 에볼라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하여 국제적 협력을 강화하고 있는 가운데, 일부 보건의료전문가가 보이는 행태에는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에볼라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가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은 아프리카에서 구호활동을 하던 의료진이 매개역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구호활동에 나선 의료인이 감염되면 본국으로 후송시켜 치료하게 되는데, 치료과정에서 환자와 접촉한 의료진이 새로 감염되기도 하고,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에볼라환자와 접촉한 사람이 귀국한 다음 잠복기 동안 격리되지 않고 활동하는 과정에서 바이러스를 전파하여서 발생한 것입니다(중앙일보 2014년 19월 25일자 기사. “뉴욕에도 에볼라 환자 … 접촉한 3명 격리 조치”; http://blog.joins.com/yang412/13534487).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의무격리가 인권을 침해한다면서 법적대응에 나선 의료인도 있다고 합니다(세계일보 2014년 10월 28일자 기사, “의무격리 논란, 美 간호사 입원 3일 만에 집으로”; http://blog.joins.com/yang412/13536130) 멕시코에서 시작된 신종플루가 유행할 때 해열제를 먹고 공항검색을 빠져나왔다고 자랑하던 사람의 무용담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자신 때문에 검역체계가 무너지면 참혹한 상황을 빚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하고 답답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는 잠시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으로 다수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로 위안을 삼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페스트에 감염된 도시의 사례에서 검역을 강화하기 위한 조처에 대하여 저자는 ‘죽음을 초래하는 질병에 대해 권력은 끊임없는 죽음의 위협으로 대처하였다’라고 비판하고, ‘중요한 것은 사회의 여러 역량을 강화시키는 일이다(321쪽)’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재앙이 될 수도 있는 급성 전염병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한 검역체계에 대한 일반의 인식수준은 오히려 근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 저자의 주장이 공허한 울림으로 남는 것 같습니다.
페스트의 사례처럼 극단적으로 봉쇄적인 규율이 있는가 하면, 메카니즘으로서의 규율이 있다고 했습니다. 권력의 행사를 보다 신속하고 경쾌하게, 그리고 보다 효율적으로 만들면서 그것을 개선해나가는 하나의 기능적 장치이고, 미래의 사회를 위한 교묘한 강제권의 구상인 것입니다. 규율의 기능적인 전환을 통하여 규율구조를 확산시키고, 규율의 메커니즘의 국가관리를 통하여 효율을 극대화하려는 것인데, 모두에서 말씀드린 심평원의 기능과 역할이 이러한 메커니즘에 따르는 사례가 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