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 1 비룡소 걸작선 49
랄프 이자우 지음, 유혜자 옮김 / 비룡소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낚시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즐겨 쓰는 우스갯소리로 ‘물고기의 기억력은 3초’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끼를 물었다가 치도곤을 당한 물고기가 금방 돌아서서 다시 미끼를 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물고기도 종류에 따라서 기억 정도가 다를 수도 있다는 실험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세계일보 2014년 7월 3일자 기사, “물고기 기억력은 3초? 최장 12일!”). 아무튼 물고기의 기억력과 비교해보면 분명 뛰어난 인간의 기억력은 신의 선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기억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인간진화의 결과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기억을 왜곡해서라도 낙관주의적으로 생각하고 기억하는 긍정적 편향을 가지도록 진화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탈리 샤롯은 “낙관편향은 미래에 틀림없이 닥쳐올 고통과 고난을 정확하게 지각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보호하고, 인생의 선택권을 제한된 것으로 보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줄 것이다. 이런 낙관편향을 유지하기 위해 뇌는 무의식적 망각을 설계해두었다. 그 결과, 스트레스와 불안이 줄면서 몸과 마음이 더 건강해져 행동하고 생산하려는 동기가 강해진다.”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탈리 샤롯 지음, 설계된 망각, 16쪽; http://blog.yes24.com/document/7310686) 과잉기억증후군을 앓는 질 프라이스는 뇌종양으로 수술을 받은 어머니가 위기에 빠지는 과정, 당뇨를 앓던 남편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겪은 고통을 오래도록 기억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초능력이 오히려 저주스러웠을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기억을 선별하는 능력은 내 마음의 작용방식과는 거리가 멀었다.”라고 한 특별한 재능이 그녀에게 고통을 준 원인이었습니다.(질 프라이스 지음,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 163쪽; http://blog.joins.com/yang412/13189206)”

 

질 프라이스의 경우를 보더라도 망각은 분명 신의 축복이라고 할 만합니다. 하지만 망각을 신의 축복이라고 여기는 우리는 한편으로는 꼭 기억해야 할 것들을 잊어버리는 것을 안타까워하기도 합니다. 가까이는 최근에 일어난 세월호 침몰사고로부터 멀리는 일제의 침략으로 고통 받은 36년을 기억하여,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근 급진 우경화하고 있는 이웃 일본의 행보를 의심스러운 눈길로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유태인으로 대표되는 인종말살정책을 강행했던 나치의 만행에 대하여 후세의 독일이 보여준 참회와 재발방지를 위한 노력을 보면, 일본이 보여 온 망설임과 눈가림은 피해국들의 포용을 얻어내기에는 어림도 없는 행보였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일본은 자위권을 확대하는 등 전쟁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신의 축복을 너무 많아서 일까요?

 

망각이라는 신의 축복을 지나치게 받아서 생긴 나라 안팎의 사건들을 보면서 독일의 동화작가 랄프 이자우의 판타지 소설 <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을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화라는 수단을 통해 돈과 시간의 노예가 된 현대인을 비판한 철학가’로 평가받고 있는 독일의 동화작가 미하엘 엔데가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한 랄프 이자우의 <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은 ‘기억’과 ‘망각’을 화두로 삼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서 저자는 사람들이 그 존재의 본질을 잊어버리고 망각해버린 것들이 미래에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저질렀던 끔찍한 만행은 독일인이라면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쌍둥이 주인공을 통하여 가족들과의 행복했던 기억과 사랑의 기억들 또한 우리가 살아가면서 시나브로 잊어버리는 것 중 하나라는 점을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876쪽에 이르는 만만치 않는 분량과 장르문학의 특성을 고려하면 조심스울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출판사에서 내놓은 줄거리를 요약하는 정도라면 적절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열일곱 살난 쌍둥이 남매인 제시카와 올리버는 느닷없는 찾아온 경찰관들이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 경비원으로 일하던 아버지가 고대 유물 크세사노 상과 함께 감쪽같이 사라져 용의자로 지목되었다는 통보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쌍둥이에게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기억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집안에 남겨있는 사진이나 물건들에서 아버지의 존재를 느낄 수 있을 뿐입니다. 두 사람은 아버지의 일기장을 통해 아버지가 원래 저명한 고고학자였으며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부활한 고대 바빌로니아의 신 크세사노의 음모를 알고 이를 막기 위해 크세사노가 지배하고 있는 잃어버린 기억 속의 나라인 크바시나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제시카가 현실 세계에 남아서 바빌로니아의 전설을 파헤치고 크세사노의 계략을 막기 위한 전략을 세우는 동안에, 올리버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박물관 안의 바빌로니아 유적 ‘이슈타르의 문’을 통해 환상 세계 크바시나에 들어가게 됩니다.

 

제시카가 박물관의 연구원인 미리암의 도움으로 옛 바빌로니아 지역에서 출토된 점토판 조각의 쐐기 문자를 연구하며 암호를 풀어나가는 동안 크바시나에 들어간 올리버는 여러 가지 모험을 겪으면서 크세사노가 왕으로 군림한 이후 벌인 여러 가지 악행들과 온 세상을 장악하려는 크세사노의 야망을 분쇄할 방법을 찾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작가는 올리버와 제시카가 같은 목표를 찾아 애를 쓰는 과정을 엇갈려 서술하고 있습니다. 결국 쌍둥이 남매는 무의식과 꿈을 통해 서로에게 중요한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크세사노의 진짜 이름을 찾아내 그 이름을 세 번 부르면 그를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을 읽는 독자들은 우리에게는 비교적 생소한 바빌로니아 문명이 등장하고, 현실과 가상의 세계가 뒤엉켜 있어 이야기의 줄기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독자도 있는 듯합니다.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나 존 로널드 루엘 톨킨의 <반지의 제왕>처럼 아예 가상의 세계를 무대로 이야기가 전개되면 오히려 쉽게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는 것과는 다르다는 말씀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과 가상을 뒤섞어 이야기를 지은 것을 저자는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난 뇌리에서 쉽게 잊혀지지 않는 글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제시카와 올리버의 이 소설은 단순히 흥미로운 책 이상이여야 했다. 이 책은 기억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어야 했고, 무관심과 관용의 부재를 질타하는 호소여야 했다.(1권 445쪽)” 그러기 위하여 저자는 ‘이 책에서 많은 역사적 사실을 인용하면서 또한 몇 가지는 평범하지 않거나, 전혀 새로운 관계로 설정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새로운 지식을 만들기 위해 ‘사실들’을 연결하는 일은 언론매체들도 완벽하게 해내지만, 지루하다는 느낌 밖에는 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들에 대한 인식을 날카롭게 하기 위하여 상상의 인물을 등장시키고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것들을 아주 세밀하게 연결시켜서 분리하기 어렵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결국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상상 속의 산물인지 헷갈릴 수도 있습니다만, 진실과 상상의 산물을 구분해보려는 시도는 책읽기에 더한 즐거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저자는 “내가 이 책으로 몇몇 독자들을 고고학의 세계로 유혹했다면 다행으로 여기고 싶다.(1권 448쪽)”라는 속내를 감추지 않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의 핵심은 성서에 나오는 반전설적인 바빌론의 존재를 증명한 로베르트 콜데바이(1855. 9. 10 ~ 1925. 2. 4)의 고고학적 성과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독일의 건축가이자 고고학자인 콜데바이는 1899년 3월 26일부터 남부 이라크에 있는 바빌론의 유적지의 발굴을 시작해서 18년에 걸쳐 거의 중단 없이 발굴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발견물은 마르두크 신전 기단(基壇)이었는데, 이것은 지구라트라 불리는 계단 모양의 유구(遺構)로서 그 위에 천문관측대가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근처에서 놀라울 정도로 잘 설계된 우물이 딸린 아치형 구조물을 발견하였는데, 그것이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바빌론 공중정원의 유허(遺墟)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그밖에 이 도시의 거대한 성채, 유명한 이슈타르 대문의 증거 및 마르두크의 신전에 다다르는 대로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출토된 이슈타르 대문은 현재 독일 베를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복원되었던 것이 작가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킨 것 같습니다.

 

사실과 작가의 상상을 구분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라고 앞서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먼저 ‘기억은 인간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동안만 변화한다(1권 191쪽)’는 니피(유리로 만든 벌새로 상대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의 설명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올리버가 크바시나에서 활약하는 동안 도움을 주는 엘레우키데스는 자칭 소크라테스의 제자인데,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크바시나에 오게 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플라톤을 냉소적으로 비판하는 엘레우키데스 이외에 아리스티포스, 크세노폰, 안티스테네스, 알키비아데스 등 그가 소개하는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구굴검색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지만 엘레우키데스는 <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 이외의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을 보면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인 듯합니다.

 

장르소설을 읽는 맛은 작가가 예고하는 힌트를 놓치지 않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에서 중요한 힌트는 비교적 초기에 볼 수 있습니다. 제시카와 함께 문제를 푸는데 도움이 될 인물목록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미리암은 기원전 3세기에 수메르왕의 호칭은 ‘동서남북의 왕’이란 의미를 담은 ‘루갈-안-업-다-림무-바’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를 들은 제시카는 아버지의 일기에서 읽은 글 가운데 있는 크세사노의 황금상 밑에 적혀 있다는 ‘세상의 왕’이라는 호칭을 기억해냅니다. 이 이름은 결정적 순간에 결정적 작용을 하게 됩니다.

 

올리버가 크바시나에 들어갔을 때 처음 만난 니피는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서 크바시나를 방문한 인간인 올리버와 아버지를 고엘름이라고 부릅니다. ‘구원의 영웅’이라는 뜻을 가진 고엘름이 크바시나에 나타나서 크세사노의 폭압으로부터 기억들을 해방시켜줄 것이라는 소문이 수천년 전부터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엘름 올리버는 특별한 존재임이 틀림없습니다. ‘날아다니는 네덜란드인’이라는 배의 폰 오라니엔 선장이 생전에 저지른 행동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다고 후회하는 모습을 보면서, 올리버는 처음에 희생자였던 선장이 나중에는 죄를 저지른 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의 죄가 면해질 수는 없겠지만 억지로 죄값을 치르는 것보다는 가슴 깊이 반성하는 것이 더욱 값지고 중요하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크세사노의 힘을 막을 수 있게 도와주신다면 선장님이 하신 행동으로 인해 눈물을 흘린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다시 웃음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선장을 설득하게 됩니다. 이처럼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도 올리버가 특별한 사람이기에 가능한 것 아닐까요?

 

올리버는 그를 도와주는 많은 기억들과 함께 크세사노에게 억류되어 있을 아버지를 찾아 나섭니다. 그 과정에는 인간 의식의 저변에 깔려 있는 사고와 꿈들이 살고 있다는 모르굼의 진흙수렁도 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현인 레벤 니아가가 해준 “기억과 망각, 너의 세계와 나의 세계 사이에는 균형이 존재한다.(2권 188쪽)”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이 구절은 작가가 책읽는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결정적 메시지가 아닐까요? 또한 제시카와 미리암이 사건을 추적해가는 과정에서 나치와 관련된 사람들의 기억들을 비롯하여 세상의 모든 독재자에 관한 흔적을 지우려는 크세사노의 음모를 발견하게 됩니다. 크세사노는 바로 ‘간절히 갖고자 하는 생각들을 모두 가져가리라’라는 자신의 예언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의 세상 크바시나와 기억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세상을 모두 지배하는 자리에 오르려는 것입니다. 올리버와 제시카는 크세사노의 야망을 어떻게 막아 인류를 구원하게 될까요?

 

<잃어버린 기억의 박물관>을 통하여 우리는 신의 선물 ‘기억’과 신의 축복 ‘망각’이 제대로 균형이 잡혀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 새겨봅니다.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의 보수주의자들이 꼭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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