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평전
안도현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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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책방에서 나온 백석시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http://blog.joins.com/yang412/13371263』를 읽기 전까지는 백석의 시는 물론이고, 백석이라는 시인이 있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도 학교를 졸업하고서는 시(詩)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던 개인적인 이유와 함께 그동안 재북(在北)작가의 작품을 공식적으로 다루지 못하도록 한 정부정책이 맞물린 탓일 것입니다.

 

1988년 정부의 납․월북 문인 해금조치로 이들의 작품들에 대한 문학사적 조명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시인이자 국문학자인 이동순 교수께서 백석의 시를 수집 정리한 『백석시전집』을 1989년에 발간한 이래, 백석 문학에 대한 학계의 관심은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라는 표현대로 각종 연구논문과 비평이 1천편을 상회하고 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안도현 시인을 비롯한 여러 시인들이 시적상상력을 수련하는 과정에서 백석의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였다고 합니다. 그 안도현 시인께서 백석의 삶의 발자취와 작품세계를 정리한 『백석평전』을 내놓았다하여 읽게 되었습니다.

 

안도현 시인께서 백석의 시 「모닥불」을 처음 만난 것은 스무살 무렵 사회과학적 열정과 기운이 문학을 견인하던 시절이었다고 합니다. 「모닥불」은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잎도 머리카락도 헝겊 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깃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서울의 봄’이라고 부르던 시절의 암울한 사회적 분위기를 모두 태워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는 젊은 열정이 교감하는 무엇이 이 시에 있었음입니다. 그리하여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의 제목을 <모닥불>로 하고, 심지어 생사조차 모르는 백석을 만나러 가는 상상을 하기에 이릅니다. “백석 선생을 만나러 간다 / 흰 붕대 같은 산길을 밤새 걸어.....(‘백석선생의 마을에 가서’의 일부)” 안도현 시인께서 『백석평전』을 쓰게 된 것도 “평전이라는 형식으로 백석의 생애를 복원해 본다면 이것 역시 그를 직접 만나는 방식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결과라고 하니, 어떻게 보면 “시를 쓰면서 백석의 어투, 시어는 물론 시를 전개하고 마무리 짓는 방식과 세계에 반응하는 시인으로서의 태도까지 닮아 보려했던” 마음의 빚을 덜어내려는 의도보다는 이 또한 백석을 베끼기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역시 시가 가지고 있는 멋과 맛을 전혀 느끼지 못한 탓인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실려 있는 백석의 시들이 제게는 무척이나 생소하게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백석이 시어로 즐겨 써온 평안도 사투리가 전혀 익숙하지 않은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석의 작품을 통하여 평안도 사투리들이 분명 오래동안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어 역시 살아있는 생물처럼 세월의 흐름을 통해서 변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존 러스킨의 『참깨와 백합』의 역자 서문에 적은 문학작품에 쓰인 언어의 의미를 새겨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전작품은 동시대 작품들과 달리 그것을 창조한 정신이 아름다움만을 불어넣은 것은 아니다. 고전작품들은 그보다 더 감동적인 다른 것을 간직하고 있는데 바로 그 작품을 구성하는 재질, 그것이 쓰인 언어이다. (…) 그 작가들의 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어법이나 느끼는 방식을 간직하고 있는 잃어버린 언어의 아름다운 형태를 그래도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독서에 관하여, 53쪽, 은행나무, 2014; http://blog.joins.com/yang412/13437547)

 

작가는 1945년 8월 25일, 소련군 사령부가 경성에서 신의주를 운행하는 경의선 철도를 차단한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해방 5년 전 만주를 유랑하다가 해방 무렵에는 신의주에 머물던 백석이 경성이 아닌 고향 정주로 귀향한 것을 경의선 철도 운행중단과 연결한 것이 옳은지는 분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특히 함흥에서 만나 깊은 정을 나누던 자야라는 여인이 살고 있는 경성으로 돌아오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자야라는 여성 이야기가 나온 김에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나타샤에 대한 생각을 적어보려 합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읽고 ‘나타샤가 누구일까?’하는 의문을 가졌던 것은 그저 저의 저급한 호기심이었을 것입니다. 부모님의 강요로 치룬 결혼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은 여성이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백석의 짝사랑이기도 했고, 한 때는 난(蘭)이라고 부르던 통영의 박경련이었을까? 아니면 함흥에서 만난 자야라는 이름의 기생이었을까?’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백석으로부터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제목의 시를 건네받은 것은 자야라는 여인과 소설가 최정희가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최정희가 잡지의 편집을 맡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자가발전일 가능성도 없지 않을 듯합니다. 어떻든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싯구절만 두고 생각해본다면 박경련과 자야라는 여인 모두 가능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라는 첫 연을 생각해보면 박경련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연에서 “눈은 푹푹 나리고 /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리는 대목에서는 자야라는 여인일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함흥 영생고보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부터 만주에서 지낼 때 백석은 꾸준하게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있었던 점을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타샤는 러시아 여성들 사이에 가장 흔한 이름이기도 하고,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의 주인공 이름이기도 합니다. 통영의 박경련을 애모할 무렵 이상의 여인을 난(蘭)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나타샤는 백석이 꿈꾸는 이상형일 뿐 특히 누구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안도현 시인은 『백석평전』을 통하여 백석이 태어난 평안북도 정주군은 물론 백석의 집안내력, 백석이 수학한 오산학교, 유학한 일본의 아오야마 학원시절, 유학에서 돌아와 일하게 된 조선일보사, 함흥 영생고보시설, 만주 신정에서 하던 일은 물론, 해방 후 북한에서 활동하다가 삼수로 쫓겨 가게 된 내력 등 백석과 관련된 일이라면 모조리 섭렵하여 정리하고 있습니다. 백석은 아오야마학원 영어사범과를 다녔습니다. 중등학교 영어교사를 양성하는 과정입니다. 훗날 함흥에서부터 러시아어를 공부하여 러시아문학을 번역소개하기에 이른 것을 보면 백석은 어학부문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백석은 영어과목을 공부하는 틈틈이 시(詩)를 공부하였는데 당시 일본 문학계를 풍미하던 모더니즘 운동을 수용하면서도 가장 조선적인 것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를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가 초기 작품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평안도 사투리를 과감하게 사용하여 향토색이 진하게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일본에 유학하던 선배 문인들이 일본어로 된 시를 발표하기도 했지만, 백석은 일본어로 쓴 시를 단 한편도 발표한 바 없다고 합니다. 백석의 성향에 대하여 이동순 교수는 이렇게 요약하였습니다. “백석 시인의 가치관과 그 방향성은 좌파 문학인의 이념성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부르주아 민족주의 계열의 문학인들과도 그리 밀접한 관계를 갖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사상적으로는 온건중도파, 문학적으로는 이미지스트와 민족주의를 결합한 상태로 설명해낼 수 있을 것이다.(134쪽)” 그렇다면 안도현 시인에게는 백석의 독특한 시세계는 물론 그의 민족주의적 사상까지도 흠모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일제 강점기, 특히 만주사변을 일으킬 무렵부터 국내에서 활동하던 대표적 인사들이 일제의 강압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미 많은 세월이 흐른 탓에 그들의 친일 행적이 겉으로 보이는 면 외에도 속사정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만. 어찌되었건 일제강점기에 국내에서 활동하던 많은 지식인들의 친일 행적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36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일제의 강압을 수용할 수 없었던 행동파들은 해외로 거점을 옮겨 항일운동을 하던 것과는 달리 국내에 머물고 있던 분들은 일정부분 행동의 제약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백석은 항일운동까지는 나서지 않았지만 경성에서 함흥으로, 그리고 만주로 정처 없이 떠돌면서도 일제의 강압에 굴복하지 않은 굳건한 모습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랬던 백석도 해방 후 북한체제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초기에 러시아문학을 번역소개하는 활동에 머물다가 동시작가로 시작(詩作)을 재개한 뒤로 문학의 순수성을 고수하기 위하여 북한당국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결국은 함경도 삼수로 내쳐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종국에는 평양의 압력에 굴복하여 김일성을 찬양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지만, 북한 문화계의 주류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문화계 인사들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안도현 시인의 입장은 상당히 유연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백석평전』에서도 일제에 협력한 문화계 인사들의 행적을 특별한 논평 없이 소개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 나아가 “역사문제연구소 등에서 미당 등 문학계 인사들의 친일행적을 지적하고 분명하게 하는 것은 분명히 옳은 일이라고 하겠으나, 이들이 문학계에 남긴 자산까지도 마다할 이유는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라는 입장입니다.(주간 소통신문 2011년 6월 7일자 기사, “안도현, 서정주 채만식 친일행적 인정하지만..”)

 

백석이 문학적으로 가장 빛났던 시기는 1935년부터 1941년까지 7년 동안이었다고 합니다. 1935년 8월 30일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했는데, 백석의 생애 최초로 세상에 내놓은 시였습니다. “산턱 원두막은 뷔였나 불빛이 외롭다 / 헝겊심지에 아즈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잠자려 조을든 문허진 성터 /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들 같다 / 어데서 말 있는 듯이 크다란 산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 헐리다 남은 성문이 / 한울빛같이 훤하다 /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백석의 고향 정주에 있는 쇠락한 옛성의 풍경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말미에 그 풍경을 배경으로 하여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등장시키고 있는 점이 바로 백석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백석은 시를 통하여 과거의 기억을 환기시키면서도 풍속과 사람을 겹치게 해서 보여줌으로 해서 시에 생생한 활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백석이 세상에 내놓은 유일한 시집 『사슴』은 1936년 1월 20일 100부 한정판으로 제작되었는데 그의 대표작「여우난골족」을 비롯하여 모두 33편을 담았다고 합니다. 시집에 대한 첫 번째 리뷰는 조선일보 학예부 김기림기자가 썼는데, “백석의 시가 기억 속의 동화와 전설에 나오는 소재, 그리고 향토적인 분위기를 취하고 있지만 거기에 따른 감상주의와 복고주의를 일체 배격하고 있음에 주목(97쪽)”하였다고 합니다. 안도현 시인은 백석이 고향의 방언을 시어로 차용한 것을 이렇게 평가하였습니다. “고향의 말인 방언이야말로 몰락의 길로 치닫고 있는 조선의 현실을 지켜낼 수 있는 하나의 시적인 역설로 작용할 수 있으리라고 그는 판단했다.(99쪽)” 하지만 카프의 열성 멤버였던 임화 시인은 “이 난삽한 방언은 시집 『사슴』의 예술적 가치를 의심할 것도 없이 저하시킨 것이라 믿으며, 내용으로서도 이 시들은 보편성을 가진 전조선적인 문학과 원거리의 것이다.(127쪽)”라고 비판하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집 『사슴』은 많은 문인들의 주목을 받았는데, 특히 윤동주시인은 백석의 시집을 구하지 못하여 발을 동동 굴렀다는 것입니다. 1938년 1월에 발표된 노천명 시인의 첫 번째 시집 『산호림』에 실려 있는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로 시작하는 노천명의 대표작 「사슴」을 읽으면서 백석이 떠올려지는 것은 당시 이들의 친분관계를 보면 자연스러울 수도 있겠습니다.

 

1947년 말 부터 1948년 가을에 걸쳐 서울의 잡지에 백석의 시가 발표되기도 했지만, 이 시들은 오래 전에 쓴 것들이라고 합니다. 백석은 해방 5년 전 부터 일제의 강압이 극에 달하면서 붓을 꺾어 시작(詩作)을 중단한 상태였고, 해방 후 북한에 머물면서도 러시아문학의 번역에 치중하다가 1956년에 동화시라는 형식으로 시작(詩作)을 재개하지만 작가동맹 아동문학 분과에서 ‘벅찬 현실’이 그려지지 않은 실패작으로 규정되면서 논란이 인 끝에 함경도 삼수로 내쳐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에서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고 노래했던 것은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것이었을까요? 안도현 시인의 『백석평전』이 백석에 대한 일반독자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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