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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 - 한 정신 의학자의 정신병 산업에 대한 경고
앨런 프랜시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4년 3월
평점 :
지금은 장성해서 의업을 잇게 된 큰 아이는 말을 늦게 배웠습니다. 곤지곤지와 같이 아이를 어르는 짓을 해도 쉽게 따라하지 않으면서도 혼자 있을 때는 옹알이면서 무언가 손짓을 하곤 했습니다. 혹시나 자폐성향이 있나 해서 마음 조리며 지켜보던 기억이 납니다. 걷는 것도 늦어서 돌이 지나서야 걷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늦었던 말문이 트이고 나서는 금세 말이 늘어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책장에 꽂아둔 화집을 펼쳐서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징검다리처럼 건너뛰는 디딤판으로 사용하는 등 남다른 놀이를 혼자서 즐기기도 해서 걱정이 남기도 했습니다. 뜬금없이 큰 아이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은, 얼마 전에 들은 학교 선배님의 걱정 때문입니다. 손자 아이가 성장이 더디고 말이 늦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큰 아이 이야기를 해드리면서 늦되는 아이도 또래 아이들을 빠르게 따라갈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최근 들어 현대의학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담은 책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습니다. 의학을 전공하지 않은 비전문가가 의학 관련 자료들을 섭렵하여 문제점들을 발굴하여 집대성하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합니다. 이런 종류의 책들은 저자가 세운 나름대로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자료들만 선별하여 논리를 전개하는 특징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전문가의 시각으로 보면 바로 문제점을 짚을 수 있습니다만, 건강우려증을 가지고 있는 일반인의 경우 쉽게 빠져들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 의사라고 하시는 분들 역시 이런 종류의 책을 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조금 깊이 파고들어 보면 의사이기는 하지만 전문영역이 세분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보면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니면 일반인과 별 차이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일상의 근심과 고난마저 정신병으로 둔갑하는 시대, 범람하는 정신 장애에서 현대인을 구원하라!’라는 카피가 달린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을 받아들었을 때, ‘한 정신의학자의 정신병 산업에 대한 경고’라는 부제가 없었으면 앞서 말씀드린 종류의 책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 책을 쓴 앨런 프랜시스교수는 뉴욕 주립대학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코넬 의과대학의 외래병동 책임자를 거쳐서 듀크대학교 정신의학부 학부장으로 일하고 있는 분입니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정신장애를 진단하는 교본으로 사용되고 있는 정신장애진단편람 3판(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DSM-III)와 3판의 개정판(DSM-IIIR)을 정리하는 작업에 참여하였고, 정신장애진단편람 4판(DSM-IV)의 작성책임을 맡아 팀을 조직하고 이끌어 출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DSM-IV를 정리하면서 저자가 주도하는 팀이 미리 정한 기준에 따라서 정신장애를 정의하고 진단기준을 정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의학의 발전 속도가 눈부시다 보니 여전히 미흡한 부분이 남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DSM-5가 요구되었습니다. DSM-IV를 끝으로 공적활동을 정리했던 저자는 DSM-5에서는 정신장애의 진단기준이 지나치게 완화되어 정신질환이 양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며 그 이면에는 정신질환의 치료제를 개발하는 제약회사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것이라는 생각에 DSM-5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활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은 저자의 이러한 의도를 담은 책입니다.
저자의 우려는 머리말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DSM-IV를 작성하면서 정신질환의 진단과열현상을 다스리기 위하여 강박적일 정도의 기법을 적용하여 보수적인 결과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자폐증, 주의력 결핍장애, 소아 양극성 장애의 세 가지 정신장애가 유행하는 현상을 예측하지도 막지도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비교적 조심스럽게 작성된 DSM-IV이 결과적으로는 득보다 실이 많았는데, 방만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DSM-5가 가져올 결과는 한 마디로 끔찍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습니다. DSM-5는 정상적인 사람들을 오진할 것이고, 진단 인플레이션을 부추길 것이며, 부적절한 의약품 사용을 장려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인용하고 있는 사례들 가운데 우리나라의 데이터가 포함된 자폐증의 경우는 심각한 것 같습니다. DSM-IV 이전에는 극히 드물어, 아이 2,000명에 한명 꼴로 진단을 받았던 자폐증이 지금은 미국에서는 80명 중 한명 꼴로 뛰었고, 더 놀랍게는 한국에서는 38명 중 한명 꼴로 뛰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실무근으로 밝혀졌습니다만, 예방접종이 자폐를 일으키는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부모들의 공포심을 자극하게 되었던 것이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보통이 아닌 것 같다는 신호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부모들은 자폐증을 의심하고 병원순례를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종국에는 자폐증이라는 진단을 받아내고 치료를 시작해야 안심하게 되는 역설적인 현상이 생긴 것은 아니었을까요? 불과 20년 만에 자폐증의 유병률이 20배나 증가한 것은 진단 관행이 급변한 것이지 아이들이 갑자기 더 자폐적으로 변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 ‘정신병이 정상을 잠식하다’에서는 정신장애라는 진단을 붙이는 작업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2부 ‘정신 질환에도 유행이 있다’에서는 정신질환의 역사적 흐름을 살피고 있습니다. 마귀 들림에서 다중인격에 이르기까지 과거에 유행하던 정신질환 진단에서부터 자폐증에서 사회공포증에 이르기까지 요즈음 유행하는 진단명, 그리고 건망증에서 폭식장애에 이르기까지, 곧 불어 닥칠 것으로 예견되는 진단의 의미를 짚고 있습니다. 3부 ‘범람하는 정신장애로부터 나를 지켜라’에서는 정신진단 인플레이션을 바로잡는 방법에서부터 정신과 상담을 받기 전에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전공한 병리학은 우리의 몸에 이상이 생겼을 때, 해당 장기에 생긴 변화를 진단하는 학문입니다. 당연히 정상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잘 알아야 비정상이라고 진단할 수 있기 때문에 정상을 익히기 위하여 많은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자궁경부암을 진단하는 경우처럼 전암성 변화에서부터 완전하게 암이라고 진단하게 되는 변화에 이르기까지 변화가 단계적으로 똑 떨어지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전문가들끼리 모여서 진단의 눈높이를 맞추고 진단기준을 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신질환의 경우도 누구나 동의할 수준의 진단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즉 정상과 비정상은 연속되는 스펙트럼 가운에 어딘가에 존재하는 경계를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고, 기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미터법이 만들어진 과정을 알면 기준을 정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로버트 P. 크리스의 <측정의 역사; http://blog.joins.com/yang412/13035187>에서는 고대로부터 측정법이 발전해온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보다 위대하고, 인쇄술 이후 인간의 창의력이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여겨지는 미터법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프랜시스교수는 다양한 학문적 영역에서 정상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전적 정의로부터, 철학, 통계학, 의학, 정신의학, 심리학 등으로 점점 좁혀 가보지만, 궁극적으로 정신장애가 질병인지, 신화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헷갈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마치 호접몽에서 깨어난 장자가 자신과 나비를 구분하는 것이 어렵더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특히 정신의학은 생물학적 검사법이 없기 때문에 정상/질병 경계를 조작하는 행위에 유달리 취약하기 때문에 제약사의 약삭빠른 마케팅에 쉽게 좌지우지되는 주관적 판단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65쪽)
프랜시스교수는 정신질환을 정의하고 분류하는 일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짧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주술사가 질병의 치료를 담당하던 고대로부터 히포크라테스시대를 거쳐 린네가 생물들의 소속을 찾아준 분류법을 도입한 것을 계기고 하여 필리프 피넬이 정신질환을 분류하기에 이르렀고,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하여 DSM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미셸 푸코는 <광기의 역사; http://blog.joins.com/yang412/9772557>에서 광기를 이성의 대척점에 서는 비이성으로 보고 시대에 따라서 광기를 보는 사회적인 시각의 변화를 살펴보면 정신질환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으실 것입니다.
알렉스 라이트는 <분류의 역사; http://blog.joins.com/yang412/12486806>에서 지구상의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정보의 수집, 처리에 관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인간은 여기에 더하여 수집된 정보를 분류하여 종합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분류의 역사>에서는 진화생물학, 문화인류학, 신화학, 수도원 생활, 인쇄의 역사, 과학적 방법, 18세기 분류학, 빅토리아 왕조시대의 도서관 사서직, 초기 컴퓨터 역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영역으로부터 자료를 뽑아, 결국은 인류가 살아남아 현세에 이르게 되기까지 기여했다고 할 수 있는 정보처리에 관한 역사적 변천과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한편 의학에서의 질병분류는 질병의 원인을 찾아 치료방법을 구하고 환자의 예후를 결정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질병을 진단하는 기준을 정하여 같은 눈높이로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함으로써 여기에서 얻어지는 자료의 효율적 활용이 가능해지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합니다. 질병분류 체계는 의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에 확실한 근거를 바탕으로 하여 보수적으로 운용되는 편입니다. 그런데 의사라면 누구나 새로운 질병을 발견하여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환자의 증상이나 검사결과 등에서 기존의 질병과 다른 점을 추출해서 임상적 의미를 부여하려 노력하게 됩니다. 이런 노력의 결과가 쌓이게 되면 새로운 질병이 분류체계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질병분류체계가 보수적으로 운용되다 보면 새로운 질병의 추가가 어렵기 때문에 새로운 질병 후보군을 내놓은 의사들이 반발하게 됩니다. 이런 반발이 커지다보면 새로운 질병을 확대하는 진보적 성향이 세를 얻게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새로운 치료제가 등장하게 되면 그 효과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기 마련입니다. 나아가 질병의 초기단계에서 적용하면 완치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질병의 초기단계에 새로운 치료제를 사용할 수 있도록 진단기준을 완화하려는 압력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저자는 바로 DSM-5가 진보적 시각에서 개정된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불필요한 정신의약품의 남용을 막기 위해서라도 진단 인플레이션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합법적 향정신성 의약품 산업은 그릇된 정보를 공격적으로 퍼뜨림으로써 번영을 일구어왔다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기 위하여 제약회사의 마케팅전략을 차단하고 부작용이 큰 약은 퇴출시키며, 적절하지 않은 처방을 남용하는 의사도 단호하게 다스릴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는 ‘정신과 진단은 정신과 의사에게만 맡겨 두기에는 너무 중요하다’라는 폭탄선언도 불사합니다.
진단기준의 완화로 인하여 정신장애가 범람할 위기상황을 맞아 스스로를 지킬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저자가 정리해둔 <정신과 상담을 받기 전에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을 새겨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정신장애 진단은 의사 혼자서 할 수 없기 때문에 환자와 의사의 협동이 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선 정신 장애 진단의 열쇠는 환자 스스로 문제점을 깨닫는데서 출발하는 자기보고(self report)에 있습니다. 자신에게서 나타난 증상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기록해야 합니다. 기록을 바탕으로 진단을 스스로 검토해봅니다. 다만 섣불리 자가진단을 내리지 말고, 유행하는 진단을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제가 심각하다면 의사를 만나야 합니다. 이때 가족이 동행해야 합니다. 진단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고 납득되지 않을 때는 다른 의사를 만날 필요가 있습니다. 제약회사의 말에 현혹되지 말고 자연이 치유력을 발휘할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