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라신 희곡선 ㅣ 프랑스 고전극 시리즈 2
장 라신 지음, 장성중 외 옮김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8년 2월
평점 :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한 책읽기입니다. 예를 들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스완네 집쪽으로(김희영 옮김, 민음사 펴냄, 2012년 ; http://blog.joins.com/yang412/12948920>을 보면, “사악한 자의 행복은 급류처럼 흘러가나니(194쪽)”라는 라신의 희곡 <아탈리> 2막 7장에 나오는 대사를 인용하기도 하고, “그때 나는 헛된 장식에 무겁게 짓눌리는 비극 속 여주인공처럼, 내 이마에 머리카락을 모으려고 온갖 매듭을 만들며 공을 들였던 그 성가신 손에게는 불경하게도, 파마하려고 붙인 종이를 떼고는 새 모자와 함께 발로 짓밟고 있었다.(254쪽)”라는 구절처럼 라신의 희곡 <파이드라>의 한 대사를 거의 문자 그대로 인용하는 것처럼 프루스트는 라신의 희곡 작품, 특히 <파이드라>, <아달랴>, <에스더> 등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의미작용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라신은 모두 열한편의 희곡작품을 썼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1999년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펴낸 <라신 희곡선집>에서 다섯 편을 소개한 바 있으며,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에서 2008년에 중복되지 않는 다섯편의 희곡을 번역하여 <라신희곡선>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라신의 희곡작품 가운데 로마의 역사를 토대로 한 <베레네케>와 <미트리다테스>, 희랍신화를 토대로 한 <이피게네이아>와 <파이드라>, 그리고 구약성서를 토대로 한 <에스더> 등을 담고 있습니다. 다섯 편의 비극은 라신의 후기작품들로서 옮긴이들은 머리말에서 “라신의 비극에 일관해서 나타나는 주제는 사랑이다. 라신의 사랑은 코르네유의 비극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을 선한 것, 아름다운 것으로 유도하려는 원동력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외부로부터 역습해오는 정념이다.(5쪽)”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작품 <베레네케>는 팔레스타인의 여왕 베레네케를 사이에 두고 로마황제 티투스와 코마네케의 왕 안티오쿠스 사이의 삼각관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티투스가 황제에 오르기 전에 동방을 정벌하러 갔을 때 베레네케를 보고서 한눈에 사랑에 빠져 로마로 데려오지만 황제는 이국의 여성과 결혼을 할 수 없다는 제한 때문에 베레네케를 추방하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 사이에 안티오쿠스가 사랑을 고백하면서 일이 꼬이는 상황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티투스와 베레네케는 역사적 실존인물이라고 하며, 라신은 두 사람의 이야기에 안티오쿠스라는 가공의 인물을 설정하여 이야기거리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비극이라고 하면 주요 등장인물이 죽음을 맞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이 희곡에서는 세 사람이 죽음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고, 베레네케가 두 남성을 버리고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미트리다테스의 경우는 한 술 더 떠서 4각 관계를 그리고 있는데, 역시 폰투스 등을 포괄하는 방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미트리다테스왕이 동방에서 데려온 약혼녀 모니메를 두고 왕의 배다른 아들들, 파르나케스와 크리파레스가 동시에 모니메에게 연정을 품게 된 복잡한 상황입니다. 미트리다테스왕은 로마로부터 끊임없이 받고 있는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로마로 진격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는데, 크리파레스는 로마와 내통한 어머니의 죄 때문에 아버지 미트리다테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 반면, 파르나케스는 로마와 내통하여 왕국을 안정화시키려고 합니다. 미트리다테스왕이 자신이 죽었다는 소문을 내어 로마를 교란시키려는 전략을 구사하는 과정에서 파르타케스와 크리파레스는 모니메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부왕이 생존해있다는 전갈을 받고서 황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파라타케스의 모함으로 크리파레스와 모니메를 죽이려던 미트리다테스는 파르타케스가 끌어들인 로마군과 전투과정에서 부상을 입고 숨을 거두지만, 크리파레스의 용전으로 로마군과 파르타케스를 패퇴시키는 것으로 극이 마무리됩니다. 이 작품 역시 역사적 사실과는 다소 다른 결말을 짓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피게네이아>는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http://blog.joins.com/yang412/13137059>에서 잠깐 등장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신화에서 이피게네이아는 아버지 아가멤논이 트로이로 출정에 나서면서 신탁을 집행하기 위하여 희생의 제물로 바쳐지고, 그 때문에 아가멤논의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는 전쟁이 끝난 다음에 아가멤논을 살해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라신은 아킬레우스와의 결혼을 빙자해서 끌어들인 이피게네이아를 살해하려는 오뒷세이아의 음모에 끌려들지 않은 아가멤논이 이피게네이아를 살리려 하는 등 상황을 엮어가다가 결국은 에리필레를 희생의 제물로 바치는 결말을 선택합니다. 라신의 의도대로라면 <오레스테이아>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는 셈이니 헷갈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극은 극일뿐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파이드라>입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져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소재이기도 합니다. 아테나이의 왕 테세우스의 아내 파이드라는 테세우스와 아마존의 여왕 안티오페 사이에서 얻은 휩폴뤼토스를 처음 본 순간 생긴 사랑을 억누르기 위하여 휩폴뤼토스를 밖으로 나돌게 합니다만, 결국에는 휩폴리토스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이 오고, 아리키아에게 마음을 두고 있던 휩폴리토스가 파이드라의 고백을 거절하게 되자 앙심을 품고 테세우스에게 휩폴뤼토스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고자질하기에 이릅니다. 분노한 테세우스의 명령으로 휩폴뤼토스는 결국은 죽음을 맞게 되고, 테세우스는 파이드라의 이간질 때문에 아들이 죽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파이드라 역시 곁에서 일을 꾸미던 오이노네가 죽은 다음에 자신이 꾸민일이라고 테세우스에게 고백하고 독약을 마시고 죽게 됩니다. 이 작품은 라신이 새로운 해석으로 탄생한 <이피게네이아>와는 달리 그리스 신화의 원형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희곡 <베레네케>의 첫머리에 당시 국무장관에 임명된 콜베르에 대한 라신의 헌정사가 나오는 점입니다. 궁정작가로 활동한 라신의 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 작품마다 작가가 쓴 머리말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베레네케>의 머리말에서 “스스로 가장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점은 제 주제가 매우 단순하다는 점입니다. (…) 물론 혹자는 제가 특히 정성을 기울인 앞서 언급한 단순성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줄거리가 이렇게 단순한 비극은 연극의 규칙상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 가장 중요한 규칙은 관객에게 기쁨과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14~15쪽)”라는 대목이 눈에 띕니다.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 위하여 연습을 하는 과정에서 희곡의 일부를 수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연이 거듭되면서 희곡 자체가 진화하게 되는 셈입니다. 따라서 판본에 따라서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무대에 올려진 극을 보는 것은 연출이 해석하고 배우에 의하여 표현되는 것을 느끼는 것이라고 한다면 희곡은 작가의 집필의도를 읽어가면서 나름대로의 해석에 따라 무대에서 극이 진행되도록 상상하면서 즐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극의 줄거리를 요약하다보니 제 느낌을 적을 공간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 작품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통하여 다시 정리할 기회가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