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박현섭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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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빌미가 되어 시작한 고전읽기입니다. 안톤 체호프는 작가 이외에도 의사로서 그리고 사회활동가로서도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고 합니다. 작품해설에서 소개된 것처럼, “전염병 방역과 빈민 구제 사업을 위해 분주하게 지역 사회를 돌아다니며 농민들의 실상을 접하게 된 체호프는 비참한 민중에 대한 연민과 무력한 지식인들에 대한 회의를 자신의 방식대로 그려냈다.(190쪽)”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죽음과 맞서 싸우는 환자들을 보면 생명에 대하여 많은 생각이 교차하게 됩니다. 그리고 보면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유명작가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체호프 단편선>에 실린 ‘공포’나 ‘티푸스’에서 죽음에 대한 느낌이 세밀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연에서까지 말입니다. “강 위로 그리고 목초지 위로 안개가 피어올랐다. 우유처럼 희고 짙은 가느다란 안개 기둥이 물위에 비친 별빛을 덮는가 하면 버드나무 기지에 매달리기도 하면서 강 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안개 기둥들은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었다. 어떤 것들은 서로 껴안고 있는가 하면 어떤 것들은 인사를 나누었고 어떤 것들은 수도사가 넓은 소맷자락에 감긴 손을 기도하듯 하늘로 치켜드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이 광경이 드미트리 페트로비치로 하여금 유령과 죽은 이들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든 것 같았다.(18쪽)” 이처럼 환상적인 이야기를 할 때 유령이나 저승세계에서 소재를 취하는 이유를 작가는 ‘이해할 수 없으니까 무서운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서운 것의 정체를 알고 나면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거울’과 ‘티푸스’에서는 급성전염병에 대한 공포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티푸스는 이에 의하여 전염되는 발진티푸스입니다. 당시만 해도 이를 옮기는 쥐를 잡고, 개인위생을 철저하게 하면 감염을 예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손놓고 볼 수 없어 간병을 하다가 같이 감염되어 사망하는 불행한 일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티푸스환자를 돌보기 위하여 왕진을 다녀온 의사에게 왕진을 청하는 여인을 그리고 있는 ‘거울’에서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의 숙명을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삼일 동안 전염병 지역에 있다 왔어요. 지쳤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병이 났어요.(128쪽)”라고 말하는 의사에게 그녀는 “하지만 선생님은 가야 돼요! 안 가곤 못 배길 거예요! 이건 이기주의라고요! 사람은 이웃을 위해 목숨도 버릴 수 있어야 돼요. 그런데도 선생님은… 선생님은 안 가시겠다는 겁니까! 선생님을 고발하겠어요.(129쪽)”라고 말합니다. 결국 따라나선 의사는 그녀의 집에 도착해서는 숨을 거두게 되고, 그녀는 다른 의사를 찾아나선다는 이야기입니다. 맞습니다. 그녀는 지독하게 이기주의적입니다. 환자를 돌볼 의사는 건강해야 합니다. 그래야 더 많은 환자를 돌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티푸스에 감염되어 앓는 동안 누이가 전염되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동물적인 기쁨이 우선한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티푸스’에서 그리고 있습니다. “(카차가 죽었다는) 무시무시한 뜻밖의 소식은 클리모프의 의식 속으로 온전하게 전달되었지만 그것이 아무리 무섭고 강력한 것일지라도 회복기의 중위를 가득 채우고 있는 동물적인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그는 울며 웃었고, 이내 먹을 것을 주지 않는다고 투정하기 시작했다.(158쪽)” 하지만 그의 동물적 감성은 이성에게 자리를 내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주일 쯤 지나 그는 심장이 찌그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잠시의 기쁨은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책읽기에 대한 체호프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내기’도 무척 인상적입니다. 사형과 종신형의 윤리성을 따지다가 15년간 외부로부터 유폐된 생활을 견디는데 200만 루블을 건 내기가 시작됩니다. 사형이 종신형보다 더 윤리적이라고 생각한 쪽에서 내건 돈입니다. 사형은 단번에 죽이지만 종신형은 천천히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더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내기에 나선 스물다섯의 젊은 변호사는 처음에는 가벼운 책읽기로 시작했다가 육년 반이 되었을 즈음부터 철학과 역사공부를 시작해서 4년동안 육백여권의 책을 읽어내고는 두껍지도 않은 복음서 한권을 들고 일년을 읽어내고서 다시 이년동안은 자연과학, 화학, 의학, 장편소설, 철학, 신학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섭렵하는 모습이 마치 “바다 위에 널린 난파선의 잔해들 속에서 헤엄치면서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아무것에나 무턱대고 매달리는 한 인간을 연상시켰다.(140쪽)”라고 했습니다. 이 변호사는 15년을 채워서 내기에 이겼을까요? 체호프는 기막힌 반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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