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쓴 후성유전학 - 21세기를 바꿀 새로운 유전학을 만나다
리처드 C. 프랜시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시공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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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어르신께서 암으로 진단받고 치료를 받고 계십니다. 하나도 아니고 폐암과 위암이 같이 발견되었습니다. 게다가 폐암은 전이까지 되는 바람에 수술도 받지 못하고 항암치료만 받고 있습니다. 항암치료 초반에는 암이 줄어드는 듯 하더니 치료에 더 반응하지 않고 현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처음 진단 받았을 때는 1년을 넘기실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만, 벌써 진단을 받으신 지가 1년하고도 4개월 정도 되었는데 여전히 건강하신 편입니다. 암들과 평화로운 동거가 이어지거나 시나브로 나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슬며시 들곤 합니다. 오늘 소개하는 리처드 C 프랜시스 박사의 <쉽게 쓴 후성유전학>에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위키백과사전을 보면, “후성유전학(後成遺傳學, epigenetics) 또는 후생유전학(後生遺傳學)은 DNA의 염기서열이 변화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유전자 발현의 조절인 후생유전적 유전자 발현 조절을 연구하는 유전학의 하위 학문이다. 이를 매개하는 분자적 수준의 이해는 아직 완벽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CpG 염기서열 가운데 시토신 염기에 특이적으로 일어나는 DNA 메틸화와 히스톤의 변형에 의해 조절되는 크로마틴 구조의 변화에 두 가지의 기전이 주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분자수준에서 일어나는 유전현상을 연구하는 새로운 분야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전문용어도 그렇고, 어려울 수 있는 주제임에도, 프랜시스박사는 제목 그대로 독자들이 ‘후성유전학’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습니다. 스토니브룩 대학에서 신경생물학과 행동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UC 버클리와 스탠퍼드 대학에서 박사 후 연구를 한 저자는 신경과학, 진화, 과학철학을 다루는 논문들을 발표해왔다고 하는데, 읽다보면 탄탄한 인문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서 말씀드린 암과 관련하여, 후성유전학이 암치료에 혁명을 일으킬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서문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암세포에서는 많은 유전자가 정상적인 메틸 부착물을 잃어버린다. 달리 말해, 탈메틸화(demethylation)된다. 탈메틸화는 갖가지 비정상적인 유전자 활동을 일으키는데, 그중 하나는 세포의 마구잡이 증식이다. 어느 하나의 특정한 돌연변이가 아닐라 이런 전체적인 탈메틸화야말로 암의 고유한 특징이다. 이것은 좋은 소식이다. 돌연변이와는 달리 후성유전적 변화는 되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8~9쪽)”

 

연구에 따르면 암세포의 유전자들은 메틸화 감소를 포함하여 메틸화 패턴이 독특하게 바뀌어 있다고 합니다. 이런 결과로 정상상태에서 억제되던 유전자들이 활성화되는데, 종양억제 유전자도 여기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혈액암의 일종인 백혈병 세포에 후성유전적으로 개입하여 정상 백혈구처럼 행동하도록 한 연구로 뒷받침되는데, 주목할 점은 백혈병세포가 정상화된 다음에도 염색체 재배열 상태는 되돌려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후성염색체의 시각에서 본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발암물질들을 염색체의 이상을 일으키는 발암물질과 후성유전적 변화를 일으키는 발암물질로 구분하는 방식으로 완전히 재분류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후성유전적 변화는 가역적이기 때문입니다.

 

암과 관련한 흥미로운 이론은 암의 미세환경에 주목한 ‘조직기반 암이론’입니다. 이 이론에서는 암은 정상적인 세포간 상호작용이 망가진 결과, 즉 소통의 실패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소통은 거시(巨視)사회나 미시(微視)사회 모두에서 참으로 중요한 요소인 것 같습니다. 이 이론으로 탈메틸화처럼 암의 시작단계에서 발생하는 최초의 후성유전학적 변형이 일어나는 기전을 설명할 수 있으며, 암의 진행단계에서 발생하는 유전적, 후성유전학적 변형도 설명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후성유전학적 개입을 통하여 악성 흑생종이나 유방암 세포들을 정상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어 암치료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후성유전학의 효과를 두고 저자는 성인(聖人) 다미앵신부의 기적을 재평가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벨기에 출신의 다미앵신부(1840-1889)는 하와이 몰로카이 섬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위하여 생을 바친 선교사로, 가반 도우즈의 <문둥이 성자 다미안; http://blog.joins.com/yang412/7569694>을 통해서 그의 삶을 읽고 감동을 받은 바 있습니다. 다미앵신부가 성인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감동적인 선교활동에 더하여 전이암을 앓던 오드리 토구치라는 하와이 여성이 그의 무덤에 가서 암을 치료해달라고 기도했더니 암이 싹 나았다는 기적 같은 일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 점에 대하여 저자는 암의 후성유전학적 관점, 특히 미세환경을 중시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다미앵신부를 성인으로 인정할 근거가 약해진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환자의 면역체계가 알맞은 순간에 환자의 구조에 나선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인데, 그렇다면 환자의 지극한 소망을 담은 기도가 그녀의 암세포를 둘러싼 미세환경을 바꾸어놓은 계기가 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모든 암환자의 기도가 같은 효과를 나타내는 것은 아닐 터이니 말입니다.

 

요즘도 우리 주변에서 보면 제대로 입증되지 않은 암치료법을 비싼 값으로 파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이런 사례에서는 암이 완치되었다고 주장하는 환자의 경험담을 입증자료로 내놓고 있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물론 완치된 환자의 경험이 틀렸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몇 건의 사례를 일반화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점을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치료효과를 나타냈는지 몰라도, 누구에게나 치료효과를 나타내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치료법을 파는 것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완치된 사례는 후성유전학적 관점에서 오비이락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이 책에서 발견한 또 다른 흥미로운 이야기는 유전법칙을 발견한 멘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에 읽은 에른스트 페터 피셔의 <슈뢰딩거의 고양이; http://blog.joins.com/yang412/13275612>에서 오늘날 멘델이 유전학의 시조로 알려지게 된 것은 전적으로 자연과학자 윌리엄 베이트슨의 덕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베이트슨이 멘델의 논문을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멘델이 독일어로 애매하게 표현된 내용을 모두 명료한 언어로 바꾸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이 분명하지는 않습니다만, 멘델이 교배실험을 하는 과정에서 통계값을 일부 조정했다는 의혹을 읽은 기억도 있습니다. 프랜시스 박사는 과학실험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극단값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는 문제에 관한 새로운 인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꽤나 다른 변이는 진지하게 고려했지만, 살짝 다른 변이는 오차범위 안이라고 간주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라이트는 설명되지 않는 변이를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강조했다. 그러다 보니, 유전자와 유전자 작용에 관한 그의 견해는 고전 유전학의 주류로부터 상당히 멀어졌다.(131쪽)” 슈얼 라이트박사는 유전자의 효과와 발생과정에서 무작위적 사건들이 아주 중요하다고 본 것인데, 그의 독특한 발상이 후성유전학의 기틀을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비만에 관한 이야기를 마지막 화제로 올려보겠습니다. 요즈음은 다소 뚱뚱한 편인 저는 대학을 졸업할 무렵까지만 해도 말라깽이였습니다. 아무래도 먹는 것보다는 활동량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살이 찌게 된 것을 환경 탓으로 돌리면서도, 두 아이들은 저의 어린 시절과는 달리 말랐던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궁금증을 설명하는 연구가 바로 네덜란드의 기근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환경이 유전자에 영향을 어떻게 미치는가 하는 문제를 논하기 위하여 저자가 인용한 사례는 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독일군의 통제작전으로 식량공급이 끊겨 2만 2천 명이 사망한 네덜란드 서부의 끔찍한 기아사태입니다. 네덜란드의 기근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시작된 날짜와 끝난 날짜가 정확하게 밝혀져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 기간 동안 모든 시민들의 건강기록을 꼼꼼하게 작성하여 보관해두었다는 점에서 비만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이 비극적 기근이 산모의 영양이 태아의 발달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근 중에 태어난 아이들은 기근 전에 태어난 아이들보다 몸무게가 상당히 덜 나갔는데, 놀랍게도 임신 중기와 후기에 기근에 노출되었던 사람들은 기근 전이나 후에 태어난 사람들에 비해 청년기에 비만율이 무려 2배에 달했고, 정신분열증이나 우울증과 같은 정동장애의 발병률도 더 높았다고 합니다. 바로 외부 환경이 우리의 유전자 활동을 조정함으로써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자료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유전자활동을 조사해본다면 영양상태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들의 활성에 변화가 생긴 유전자를 찾아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렇다면 비만을 치료하는 새로운 길이 열릴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네덜란드 기근의 ‘할머니 효과’가 후성 유전적 유전 여부는 아직 분명하게 밝혀진 것은 아닌가 봅니다만, 저와 제 아이들의 경우를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임스 바커가 주장한 절약 표현형 가설로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요? 절약 표현형 가설이란 태아가 태반을 통해서 영양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하면 태내에서 절약 표현형을 갖도록 프로그램밍된다는 것인데 출생 후가 출생 전에 비하여 식량이 풍족하게 되면 절약표현형이 비만을 유발하는 효과를 나타내고 그에 따른 여파를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도 유명연예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삶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외부환경으로부터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우선 뇌의 시상하부에서 시작하는 호르몬분비의 연쇄가 이어지면서 우리 몸은 회피할 것인지 싸울 것인지를 준비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스트레스에 반응하는 방식은 개인적인 편차가 크다고 합니다. 저자는 스트레스에 대한 개인적 편차를 설명하기 위하여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디어헌터>의 줄거리를 비교적 상세하게 요약하고, 등장인물 세 명의 반응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영화가 개봉된 두어 해가 지난 다음에 개념이 정리된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roder; PTSD)는 심각한 외상을 보거나 직접 겪은 후에 나타나는 불안장애를 의미하는데, 영화 <디어헌터>에서처럼 베트남 전쟁 참전군인의 30%에서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PTSD는 비만처럼 어머니의 경험이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고 하는데, 2차 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여성이나 세계무역센터 붕괴를 직접 경험한 여성들의 자녀에서 특히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즉 이런 사건을 겪은 여성들 가운데 많은 수가 PTSD를 경험했는데, 당시 임신한 상태였던 여성들이 낳은 아이들은 고양된 스트레스 반응과 과다 반응성 스트레스축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어머니가 PTSD를 겪지 않은 사람들에 비하여 앞으로 불안증, 우울증, 심지어는 PTSD에 더 취약할 것으로 예측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우선 독자들에게 후성유전학이라는 새롭고 흥분되는 과학분야를 쉽게 소개하기 위하여 우선 중요한 포인트를 중심으로 요약하였다고 하는데, 첫째, 후성유전적 과정의 속성에 관한 것, 둘째, 우리 환경이 단기적으로든 장기적으로든 우리 유전자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 셋째, 후성유전적 과정에도 무작위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후성유적 유전자 행동 변화 중에는 개체의 수명을 넘어서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다섯째는 앞선 네 가지 주제를 통합하는 메타주제로서 단백질 합성에서 세포 분화, 암까지 다양한 생물학적 과정들을 설명함에 있어서 유전자의 역할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 등입니다.

 

유전학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학문을 소개하려다 보니 아무래도 용어나 개념에서 다소 생소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만, 전체적으로 보면 다양한 소재를 인용하여 쉽게 설명하려는 저자의 노력이 충분히 반영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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