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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망각 - 문학과 문화학의 교차점
최문규 외 지음 / 책세상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기억’은 제가 뒤쫓고 있는 화두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기억이 만들어지는 기전이 궁금해서 시작한 일이기도 하지만 기억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찾아 읽고 있습니다. <기억과 망각>은 ‘문화개념’이라는 색다른 관점에서 기억을 다루고 있어 흥미를 끌었습니다. 저자들에 따르면 문화개념은 결코 투명하지 않고 매우 복잡한 층위로 이루어져 있고, 자체만으로는 파악될 수 없고 다른 주제와 연관시켜 간접적으로나 조명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저자들은 문화개념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기억과 망각;이라는 주제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기억과 망각>에서는 다양한 문화적 매체가 기억과 망각을 중심으로 수행하는 문화적 역할을 정리한 것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 책에 참여하고 있는 일곱 분의 필자들이 모두 독일문학을 전공하신 분들이라는 점입니다.
전체 내용을 요약해보면, 1장에서는 문화의 기원, 문화학과 문학의 상관관계를 전반적으로 조명하고, 2장에서는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문화적 기억과 문자 문화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3장에서는 문화 전승의 구술성과 기록성의 측면에서 기억에 의지하여 구술로 전승되던 문화가 문자라고 하는 기록문화로 전환되면서 일어나는 변형을 살폈습니다. 4장에서는 역사드라마를 통하여 기억이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살피고 있는데, 역사 드라마를 통해서 과거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변형과 구성으로서의 역사가 사회적 기억으로 상승될 수 있는 한편 부정적인 차원에서 완화될 수도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5장에서는 개인의 정신영역에서 나타나는 기억과 망각 현상을 논하면서 서사와의 관련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6장에서는 망각의 의미를 짚고 있습니다. 또한 기억이 핵심 추동력으로 작용하는 문화에서 망각이 인간의 삶과 관련하여 어떻게 평가되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7장에서는 문화학과 문학을 접목시키는 기억과 망각을 주제로 현대문학의 대표적 작가인 카프카의 텍스트와 글쓰기를 고찰했습니다. 마지막으로 8장에서는 글자 매체와 기술 매체와 관련하여 기억과 망각의 특징을 조명했습니다.
기억과 망각이라는 문화학적 주제를 인문학적 차원에서 파악해보려는 노력이 하필이면 독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궁금증은 독일문화학자 아스만의 설명에서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엄청난 저장 능력, 이른바 ‘인공 기억’능력을 갖춘 새로운 전자 매체의 등장, 두 번째는 무엇인가 지나갔다는 의식 때문에 그 기나간 것이 기억의 새로운 대상으로 부각되어야 한다는 점, 세 번째는 유럽의 특수한 상황과 관련된 것으로 의사소통적 기억이 문화적 기억의 장으로 넘어가는 시점이라는 사실 등입니다. 저자들은 2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비극으로 꼽고 있는 파시즘적 만행을 겪은 산증인 들이 사라지고 있음에 주목하고 있는 것처럼 동아시아에서는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직접 경험하고 과거에 대한 의사소통적 회상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이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점을 고려하며 기억에 의존하는 문화의 전달이 단절되지 않도록 하는 방안마련이 시급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기억과 망각에 관하여 저자들의 인용에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지만, 더 생각할 필요가 있는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가 <파이드로스>에서 주장하는 문자 또는 쓰기에 대한 비판입니다. 첫째, 쓰기는 현실적으로 정신에 속한 것을 정신의 밖에 설정하려 한다는 점에서 비인간적이며, 하나의 사물이자 만들어낸 제품에 불과하다. 둘째, 쓰기는 기억을 파괴한다. 쓰기는 내적 수단 대신 외적 수단에 의지하기 때문에 망각되기 쉽다. 셋째, 씌어진 텍스트는 기본적으로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는다. 텍스트는 설명에 대한 요구에 대답하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어리석은 말만 되풀이되는 공간이다. 마지막으로 구술되는 말은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으나 씌어진 말은 그럴 수 없다. 실제의 말과 사고는 본질적으로 실제 인간끼리 주고받는 맥락 안에 존재하는 데 비해 쓰기는 그러한 맥락을 떠나 비현실적․비자연적 세계 속에서 수동적으로 이루어진다.(73쪽) 기억을 문자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기록하는 자의 의지에 따라 변형이 일어날 수도 있겠으나, 기억에 의존하여 구술로 전달되는 것 역시 기억의 퇴화와 전달자의 의지에 따라서 얼마든지 왜곡될 수도 있다는 점이 고려되지 않은 것 같아 헷갈리는 것 같습니다.
문화의 전달 매체로서의 문자의 역할과 기능에 대하여 꼼꼼하게 논의한 내용을 담고 있어 기억과 망각이라는 주제에 관하여 시각을 넓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