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 -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현자
김상근 지음 / 21세기북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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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EBS 인문학특강] 공개강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의 김상근교수님이 진행하시는 ‘인문의 시대, 르네상스’입니다(http://blog.joins.com/yang412/13184697). [EBS 인문학특강] 시리즈의 마지막 공개강좌라고 합니다. 이렇게 좋은 강좌가 있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이날 공가강좌에서 김교수님 르네상스 미술을 완성한 엘 그레코와 카라바조의 미술세계와 르네상스의 절정기를 살았던 마키아벨리의 삶과 철학을 주제로 말씀해주셨습니다. 녹화된 공개강좌 내용은 8월 15일과 22일 밤 11시 15분에 각각 [EBS 인문학특강]에서 방영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혹시 교수님의 열강에 빠져있는 제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윌리를 찾아라!’는 게임처럼 저를 찾아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신학을 전공하시는 김상근교수님은 16세기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에 대한 연구로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Ph. D.)를 취득했다고 하는데, 학위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탈리아의 문화예술에 눈을 뜨게 되고, 16세기 동서양 문화와 사상의 원류를 찾기 위해 르네상스 예술로 표현된 유럽의 시대정신을 뒤쫓고 있다고 합니다. 이번 [EBS 인문학특강]를 통하여 김상근교수님이 그동안 정리해온 연구성과를 관심있는 분들에게 알리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이날 강의의 첫 번째 주제였던 화가 엘 그레코와 카라바조의 이름이 생소할지도 모르겠다는 교수님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귀에 익은 이름이다 싶었던 것은 영화기획자 고형욱씨가 아들과 함께 한 유럽 미술 기행기 <아빠의 자격; http://blog.joins.com/yang412/12327788>에서 읽어본 이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날 준비해오신 두 화가의 작품을 직접 보면서 김상근교수님의 설명을 듣게 되니 그림에 문외한인 저도 작품에 담긴 화가의 뜻과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림 이외에도 두 화가들의 발자취를 따라 직접 다녀오신 그리스의 크레타섬과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피렌체 등, 그리고 스페인의 톨레도에 이르기까지 현장의 모습을 곁들인 르네상스 미술에 대한 설명을 통해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주제, 마키아벨리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생소했습니다. 아직 읽어보지 못한 <군주론>으로 유명하고, 이 책을 계기로 ‘국가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이나 방법도 허용된다는 국가 지상주의적 정치사상’을 마키아벨리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키아벨리가 약자들의 수호성자였다는 김상근교수님의 재해석이 당혹스럽기도 하면서 참신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날의 공개강좌에서는 참석하신 분들을 추첨하여 교수님의 최신작 <마키아벨리>를 선물로 주는 이벤트도 있었습니다. 내심 기대를 했습니다만 아쉽게도 행운은 제 편이 아니었는데, 동행하신 분이 전 시간에 얻은 행운을 제게도 나누어주셨습니다. 덕분에 [북소리]에서 김상근교수님의 <마키아벨리>를 소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아무래도 자신과 생각이 같은 주장에 마음이 솔깃하게 기울고 다른 주장은 색안경을 끼고 보기 쉽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제 생각과 다른 주장을 담은 책도 열심히 읽는 편입니다. 그 이유는 그런 주장에 허점은 없는지 찾아서 저의 생각이 맞았다고 주장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제가 틀렸다는 사실을 확인하기도 합니다. 결국 다양한 생각을 두루 읽어 나름대로의 생각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김상근교수님께서 마키아벨리에 대하여 연구를 하게 된 동기는 한 마디로 ‘괘씸하다’는 이유였다고 합니다. 1469년 피렌체에서 태어나 1527년 사망하여 르네상스시대의 절정기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는 같은 시대에 같은 도시에서 살았음에도, 그가 남긴 그 많은 문장 가운데 피렌체예술이나 르네상스 예술가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키아벨리에 관한 기록은 물론 그가 살았던 피렌체에서부터 그의 족적이 남아있는 길을 모두 뒤쫓았는데, 심지어는 마키아벨리가 공무차 네 차례 방문했던 프랑스의 모든 도시도 순례했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군주론>에 담은 마키아벨리의 진심이 왜곡되어 힘과 권력을 가진 강자에게 권모술수를 가르치는 음흉한 참모라는 누명을 쓰게 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김상근교수님은 마키아벨리의 모습을 이렇게 정리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마키아벨리는 진짜가 아니다. 마키아벨리의 정수를 이해하지 못하던 신학자들, 사회과학자들, 처세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제멋대로 그를 해석해왔고, 그의 심오한 사상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해 온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는 착한 심성을 가진 선량한 사람이었고, 르네상스 정신의 근간을 제공했던 인문학의 정수에 도달한 탁월한 인문학자였으며, 무엇보다 이 세상 모든 약자들을 품에 안으며, ‘울지마라, 인생은 울보를 기억하지 않는다’고 위로하고 격려하던 약자들의 진정한 수호성자였다.(6~7쪽)”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명망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법률가였던 아버지의 파산으로 훗날 “나는 즐거움 이전에 인고(忍苦)를 먼저 배워야 했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 베르나르도는 리비우스의 <로마사>를 얻기 위하여 아홉 달 동안 색인작업에 매달리는 힘든 노력을 기울이고, 포도주 세병과 식초 한 병을 건넨 끝에 책을 제본하기도 했다고 전합니다. 그의 서재에는 로마 역사가 리비우스의 전집, 로마의 문법학자 마크로비우스의 책,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 책, 로마를 대표하는 자연과학자 대(大) 플리니우스의 책을 비롯하여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가 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서 등이 소장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베르나르도의 파산은 변변치 않은 수입에도 불구하고 값이 만만치 않은 책들을 구입한 것이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베르나르도의 풍성한 서재가 아들 마키아벨리의 인문학적 소양의 바탕이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마키아벨리의 이런 배경에서 조선 시대의 선비의 모습이 읽혀지는 것은 저만의 생각일까요? 요즘 같으면 집안 살림에 관심 없는 남편이라면 쫓겨나기 십상일 터이지만 조선시대의 선비나 이탈리아의 학자들은 좋은 시절을 살았던 모양입니다.

자신의 영혼보다도 피렌체를 사랑했고, 너그러웠으며 기본적으로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던 마키아벨 리가 간교하고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으로 자리매김된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군주론>에서 국가를 통치하는데 필요한 덕목을 강한 용어로 설명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고, 특히 이탈리아적인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프랑스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마키아벨리즘’이라는 단어가 미친 영향도 크다고 합니다. 김상근교수님은 피렌체공화국에서 제2서기관으로 종횡무진 활약하다가 스페인과 결탁한 교황청의 음모로 공직에서 쫓겨난 마키아벨리가 복귀한 메디치가문에 헌정한 <군주론>이 일종의 취업제안서였다고 보았습니다. 군주론에 담긴 내용은 일견해서 체사레 보르자가 이탈리아공국을 세워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에 대한 영감을 얻었던 것이고, 보르자를 이상적 군주로 보았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김상근교수님은 <군주론>에서 흔히 오독되어 마키아벨리의 진정성을 왜곡하는 대표적 사례로 군주론 3장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알아 두어야 할 것은, 대중이란 머리를 쓰다듬거나 없애버리거나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 타인에게 해를 가할 때는 보복의 우려가 없도록 해야 한다.(219쪽)” 하지만 이런 상황에 대한 전제를 알게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즉 “언어, 풍습, 제도가 다른 지역의 영토를 지배할 때는 여러 가지 문제가 따르게 마련인데, 그것을 유지하는 데 많은 노력과 함께 행운이 따라야 한다.”는 논지를 펼치면서 전제로 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민족을 통치하는데 있어 강압적인 방법을 써야 한다는 권고가 옳은지도 제고해 볼 문제인 것 같습니다.

 

마키아벨리 시절 이탈리아는 도시국가들이 난립하여 서로 경쟁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군주론>을 통하여 통일 이탈리아를 이끌어낼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군주상을 담았다고 해석하는 것 같습니다. <군주론>이 복귀한 메디치 가문의 수장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헌정되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당신을 도와 피렌체가 이탈리아를 통일하는 위대한 과업에 참여하고 싶다는 마키아벨리의 염원을 담았다는 해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군주론>의 서문에서 “군주의 은총을 받으려는 사람은 군주가 받아서 기뿐 선물을 가져가는 것이 관습인데, 자신도 ‘전하에 대한 보잘것없는 충성의 표시를 가지고 찾아뵙고’ 싶다고 애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로렌초 데 메디치는 마키아벨리의 역작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김상근교수님은 이탈리아의 지정학적 위치와 르네상스시절의 시대적 상황이 현재의 우리나라의 정치적 상황을 비교하기도 합니다. 시대는 영웅을 요구하고 있지만, 운명은 마키아벨리나 우리국민 편이 아닌 것 같다는 안타까움이 배어있다고 할까요? 우리나라의 현 상황을 500년도 넘은 르네상스시대의 이탈리아와 비교하는 것보다는 당시 이탈리아의 상황과 비슷한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을 비교해보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도시국가가 난립하던 이탈리아와 춘추전국시절 중국의 사회상에서 유사한 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이상주의적인 국가를 추구한 사람으로 공자를 마키아벨리와 대비시켜 비교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두 사람이 추구하는 바나 인생행로에서 비슷한 점도 있을 것 같고, 차이점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통해서 피력하고 있는 이상주의적인 군주상은 “원래 인간은 은혜도 모르고, 변덕이 심하며, 위선자인데다 뻔뻔스럽고, 신변의 위험을 피하려고만 하고, 물욕에 눈이 어두워지기 마련이다.(157쪽)”라고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견해를 기조로 하고 있습니다. 반면 공자사상의 근간이 되는 유교에서는 “인간은 교화(敎化)와 발전이 가능하고 개인적·사회적 노력을 통해 완벽하게 될 수 있다.”고 보고 있으니 마키아벨리의 견해와는 차이가 있다고 보겠습니다.

 

공자 역시 스스로를 ‘옛 것을 살려 새로운 것을 알게 하는(溫故而知新)’일의 전수자라고 했으니, 요새 말로 치면 바로 인문학에 정통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키아벨리와 통하는 점이기도 합니다. 옛것은 배움을 통하여 익힐 수 있는 것인데, 배우는 이유는 자신을 발전시켜 실현시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공자는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를 널리 펼치기 위한 방법으로 요즘으로 치면 정치라고 할 공직에 참여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공자는 50세를 전후하여 고국 노나라에서 최고위직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의 도덕적 엄정성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왕의 측근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여 결국 자리에서 물러난 다음 자신의 고결한 정치철학을 실현할 수 있는 나라를 찾아 천하를 주유하였지만 결국은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전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한때 유럽 각국을 누비며 놀라운 통찰력으로 피렌체의 위상을 끌어올리는데 기여하던 유능한 외교관 마키아벨리는 바뀐 정국에서 변신의 계기를 찾아내지 못하고 권력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고향 산탄드레아에 머물면서 <로마사논고>를 비롯한 저술작업과 루첼라이 정원모임을 통하여 젊은이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공자의 삶과 마키아벨리의 삶에서 닮은 점이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제환공이 관중의 권고에 따라 9차례에 걸쳐 제후들을 규합하여 동맹을 맺되 무력을 쓰지 않은 구합제후(九合諸侯)의 사례를 칭송한 것처럼 무력과 간교함과는 거리가 있었던 공자의 철학이고 보면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에서는 거리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마키아벨리의 새로운 면모를 찾기 위한 책읽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그의 <군주론>을 읽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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