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미학 기행 - 지중해의 태양에 시간을 맞추다
김진영 글.사진 / 이담북스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철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재를 전공하신 김진영님의 <그리스 미학기행>을 손에 넣고서도 선뜻 읽기 시작하지 못한 것은 책갈피에 적힌 “시작은 니체의 책 한 권 이었다”는 저자의 집필의도 때문이었습니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이 바로 그 책이었는데, 서구 예술의 뿌리가 바로 ‘그리스 비극’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자신있게 설파한 니체의 해석은 청춘의 열망을 들끓게 만들어 “그리로 가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한 작가의 그리스 여행은 여러 차례 이어졌고, 그는 그곳에서 미노아, 미케네, 고전 시기, 비잔틴의 미술과 신화, 철학, 문학, 종교 등에서 예술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읽지 않고서는 저자를 따라나설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고명섭기자님의 <니체극장;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70004>을 읽으면서 <비극의 탄생>을 먼저 읽어야 할 작품으로 점찍어두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고명섭기자가 인용한 박찬국님의 <니체극장> 해제를 다시 인용해보면, “<비극의 탄생>은 그리스 비극의 기원과 몰락에 대한 고전문헌학적 탐구를 넘어서, 음악과 비극이란 무엇이고,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예술철학적 탐구이고, 세계의 궁극적 근거는 무엇인지에 대한 형이상학적 탐구이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고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탐구이고, 논리적인 지성에 입각한 학문을 진리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로 내세우면서 비극적인 음악과 신화를 비하하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이래의 서양 형이상학과 이러한 형이상학에 입각한 서양 역사와의 대결이기도 하다.(니체극장, 121쪽)”

 

<비극의 탄생>을 일독하면서 떠오른 느낌은 니체는 그리스 비극의 본질을 해부하고 그리스 비극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역할을 정리하고, 이어서 독일 음악과의 관계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음악정신으로부터 나온 비극의 탄생’이라는 작은 제목의 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술의 발전은 아폴론 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관련이 있다.(곽복록 옮김, 비극의 탄생 22쪽)” 그리스 예술의 하드웨어적인 면이 아폴론적이라고 하면 소프트웨어적인 면은 디오니소스적이라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스 비극에서 대사로 구성되는 부분을 아폴론적인 장치라고 한다면 디오니소스적인 장치는 바로 합창단을 통해서 구현되는 음악이라는 것입니다. 니체가 “그리스 비극의 아폴론적 대화부분에서 표현되는 것은 모두 단순하고 투명하며 아름답게 보인다.(곽복록 옮김, 비극의 탄생 58쪽)”라고 적은 것을 보면 그리스 비극이 비극다운 것은 바로 합창단의 음악을 통하여 표현되고 있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사실 대학시절 활동했던 연극동아리에서 소포클레스 원작을 장 아누이가 각색한 <안티고네> 공연에 스태프로 참여했습니다. 장 아누이의 희곡에서는 합창단을 대신하여 ‘코러스’라는 등장인물이 무대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데, 니체가 말하는 디오니소스적 요소를 배제하였다는 점에서 본다면 소포클레스가 담아내려했던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비극의 탄생>을 읽고 난 다음에야 제대로 저자와 함께 <그리스 미학기행>에 나섰습니다. 여행이라 하면 ‘관광’ 혹은 ‘유람’이라고 번역하는 ‘sightseeing’에 머물지 않고, 그 장소에 얽혀있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인문학적 여행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그곳에 가서 꼭 보아야 할 것들을 빠트리지 않도록 준비를 많이 해야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지에서의 느낌보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얻는 즐거움이 큰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김진영님과 함께 하는 <그리tm 미학기행>은 좋은 여행의 참고서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와 함께 하는 그리스 여행길은 아름다웠던 그리스 고전미술, 영웅의 땅 펠로폰네소스, 그리스 종교, 니코스 카잔차키스로 대표되는 그리스 문학을 주제로 한 4부로 되어 있습니다. 작가가 직접 찍은 엄청난 양의 사진은 구구절절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구석구석까지 읽어낼 수 있어 좋습니다. 우리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는 현재 경제적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코트라 현지 주재원은 그리스는 비효율적인 정부운용, 심각한 관료주의, 부정부패 등 내부적으로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 때문에 주변 채권국들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는 가운데, 채권국의 요구에 따라 공공부문 인력감축과 연금 등 복지지출 삭감을 진행하고 있지만, 사회불안이 심화되어 대규모 파업 등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코트라 지음, 2013 세계, 기회와 도전, 175~176쪽;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12239) 당장 그리스로 떠나기가 부답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그곳에 사는 사람과 부딪히게 됩니다. 따라서 그곳 사람들을 이해하면 도움이 많이 됩니다. 여행을 시작하면서 저자는 그리스 남자들의 특징을 소개하는 친절을 베풀고 있습니다. 그리스 남자들은 능글맞으면서도 퉁명스러운데 호메로스의 서사사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영악한 오디세우스(Willy Odysseus)야 말로 그리스 남자를 설명하는데 가장 명쾌한 답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속임수를 써서라도 고난을 벗어나려는 영악함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행지에서 묘지를 방문하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웰링턴 국립묘지를 찾은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과 죽은 자를 경배하고 수호하는 근엄한 위병의 모습을 보면서 미국 사람들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결코 잊지 않는 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 듯했습니다. 갑자기 묘지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저자가 아테네에서 관광객이 별로 찾지 않은 케라메이코스로 독자를 안내하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플라톤의 아카데미아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습니다만, 죽은 자의 부활을 기원하는 종교행렬이 바로 케라메이코스에 있는 ‘히에라’문에서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저자는 “죽은 자의 땅 케라메이코스는 역설적으로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59쪽)”고 적었습니다. 우리를 케라메이코스로 안내한 이유를 알듯 말듯 사뭇 철학적이기도 합니다.

 

저자를 따라가다 보면 고집스럽게 대중교통을 이용한다거나 걷게 됩니다. 지난해 보스턴에 갔을 적에 저도 시내에 흩어져 있는 볼거리를 걸어서 돌아보느라 무리한 탓인지 무릎에 부상을 입고 몇 개월째 고생하고 있습니다만, 저자는 굳이 걷기를 선택하는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걷는다는 것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생각하는 방법이다. 몸으로 생각하는 경험은 훨씬 직관적이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 몸으로 생각하는 경험은 걸으면 닿는 길의 감촉, 목덜미를 감싸게 하는 바람, 등을 데우는 태양까지도 기억한다.(150쪽)” 역시 철학하시는 분은 다르다 싶습니다.

 

앞서 인용한 그리스사람들의 성품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더 해야 하겠습니다. 저 역시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고, 혹시 그리스를 찾게 되는 경우 당황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기억해야 할 것 같아서입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15분 전에 떠난 버스를 타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군가 뒤늦게 버스를 타려는 사람을 위하여 15분 이상 기다리는 차에 앉아 있었던 적은요? 메이데이날 올림피아로 가는 길에 막차를 놓친 작가에게 터미널의 티켓창구의 남자가 베풀어준 친절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미 떠난 버스의 운전사와 통화를 해서 기다리도록 한 다음에 택시를 타고서 버스를 따라가 탈 수 있도록 조치를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있는 버스에 올라탔을 때 외국 여행자들은 수군거리는 듯했지만, 정작 그리스사람들은 그저 무심할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약간은 비아냥대는 투로 ‘적당히 무질서’한 면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자는 오히려 ‘모호하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는 의견입니다. 우리는 흔히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이중적 생각을 가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 사람들의 이러한 모호함은 남이 해도 그럴 수 있고 그러니 내가 해도 남들이 납득할 것이라 생각하는데서 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식 절충주의가 보다 더 현실적일 수 있다는 것이고, 이는 인간의 본성에 충실한 내면의 목소리 즉, ‘다이몬(daimōn)의 소리’라는 것입니다. 그리스어에서 다이몬(δαμων)은 영혼이나 작은 정령으로 ‘초자연적 존재’를 의미하는데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갖게 되는 수호령을 말합니다. 인간에게 갑작스럽게 찾아드는 불가사의한 운명적 사건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든 나쁜 결과를 가져오든 모두 다이몬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저자는 메테오라에 있는 그리스정교의 수도원으로 독자들을 안내합니다. 이들 수도원은 그리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는 동안 그리스의 문화와 정신을 지켜온 보물창고의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수도원들은 아슬아슬하게 솟은 바위 위에 올라앉아 있어 가느다란 밧줄에 의지하여 출입이 가능할 정도로 폐쇄적인 곳입니다. 기억이 분명하지는 않습니다만, 달밤에 행글라이더로 바위 위에 있는 수도원으로 잠입하는 장면이 나오는 영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장소에서는 고독이란 단어가 저절로 떠오를 것 같습니다. 저자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바로 “수도자들의 수행과 그 공간이 여전히 우리를 들뜨게 하는 것은 바로 고난과 고독 속에서 빛나는 정갈한 감동(288쪽)”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자와 함께 하는 그리스 미학여행은 어느 덧 마지막 기착지 크레타섬으로 가는 여객선이 떠나는 피레우스의 선착장에 이르게 됩니다. “항구도시 피레우스에서 조르바를 처음 만났다. 나는 그때 항구에서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시작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 http://blog.joinsmsn.com/yang412/12775771>에 나오는 바로 그곳입니다. 저자를 따라서 들어간 크레타 섬에서는 크노소스 궁전과 베네치아 사람들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이클라리온의 부르치는 물론 묘소를 비롯한 카잔차키스의 흔적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산토리니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진 테라섬에서는 카잔차키스가 “언덕 위로 올라 사위를 내려다보았다. 화강암과 단단한 석회암의 풍경이 펼쳐졌다. 짙은 콩나무, 올리브나무, 무화과와 포도넝쿨도 시야에 들어왔다. 어두운 계곡으로는 오렌지나무 숲, 레몬나무와 모과나무가 보였으며, 해변 가까이로는 채소밭도 보였다. 바다가 펼쳐지는 남쪽으로는 아프리카에서 달려온 듯 한 파도가 크레타 섬의 해안을 물어뜯고 있었다. 가까이 있는 모래섬들은 막 솟아오르는 아침 햇살에 장밋빛으로 반짝거렸다.(그리스인 조르바, 49쪽)”고 묘사한 크레타섬의 풍광을 그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저자의 여행을 따라가는 책읽기를 통하여 저자의 마음에 남은 울림을 얼마나 전해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에필로그에 그리스 여행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남기고 있습니다. 앞서 ‘케라메이코스의 오래된 묘비가 주는 삶과 죽음에 관한 근원적 묵상’만을 인용하였습니다만, 저자는 여행지마다 느낀 점을 한 줄로 요약하면서 다음과 같이 종합하고 있습니다. “니체가 예술 탄생의 배경으로 지목한 그리스인의 이중성은 마치 기쁨과 슬픔 같이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는 것이었다. 다만 그들의 일상에서 날것처럼 살아 있다는 점이 달랐다.(382쪽)”

 

니체가 <비극의 탄생>을 통하여 갈라놓은 것처럼 그리스인들은 아폴론적인 면과 디오니소스적인 면을 같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둘 사이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모호함이 있는데, 이런 모호함은 예측할 수 없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왼쪽과 오른쪽이 다른 표정인 야누스가 서로 반대쪽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것에 비유하여 이러한 이중성의 파괴력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마치 식물의 줄기나 잎이 태양을 향하는 향일성(向日性)을 보이는 것처럼 그리스인들의 이중성은 그 경계가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이상으로 연결되어 있어 빛나는 예술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