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윤리 딜레마 31
마크 G. 커쥬스키.로사 린 B. 핀커스 지음, 강명신 옮김 / 청년의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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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환자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진료를 제공해야 한다고 배웁니다. 하지만 의료현장에서는 비용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현실의 벽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인턴시절 응급실근무를 하다보면 소생가능성이 낮다는 설명을 듣게 된 보호자가 환자를 집으로 모시겠다고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건강보험이 있어도 진료비 부담이 만만치 않던 때라서 보호자의 요청을 병원에서 말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소생가능성과 진료비부담을 고려한 판단이었을 것입니다.

 

최근 우리사회에서 연명치료의 중단이 다시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보건복지부가 연초에 발표한 ‘생명나눔 인식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국민의 72.3%가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데 찬성하고 있다고 합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521333). 그 이유로 ‘가족의 고통’(69.4%), ‘고통만을 주는 치료’(65.8%), ‘경제적 부담’ (60.2%) 등을 꼽고 있습니다. 설문의 결과만을 놓고 보면 설문의 응답자가 자신이 환자인 상황에서라기보다는 보호자의 입장에서 판단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연명치료중단을 반대하는 이유로는 ‘생명은 존엄하므로 인위적으로 사망에 이를 수 없다’(54.5%)가 가장 많았다고 하는데, 이 부분의 해석에 다소 오해가 있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고통만을 주는 치료’인 연명치료가 생명의 존엄성을 해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와 상충된다고 하겠는데, 연명치료 자체가 인위적으로 사망을 유예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보면 연명치료의 중단은 죽음에 이르는 자연과정에 따르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노인인구가 급증하고 있고 상대적으로 만성질환이 많은 노인층에 의료비가 집중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노인환자들은 건강보험이 커버하는 요양병원에서 치료를 받거나 요양보험이 커버하는 요양시설에서 간병을 받고 있습니다. 노인환자의 진료는 상황에 따라 의료진의 판단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고, 그 타당성 여부는 아직 구체적으로 논의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연명치료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환자나 보호자들의 요구에 대하여 병원이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2009년 보호자가 연명치료의 중단에 대하여 법의 판단을 요구한 김할머니사건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결국 법은 보호자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렇다고 의료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례를 법원으로 가져갈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제도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병원윤리위원회나 임상윤리자문 등이 그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어, 일부 병원에는 병원윤리위원회가 설치되어 있기도 하지만 아직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라고 합니다. 위원회의 전문성이 떨어지거나 일선 의료인들이 임상현장에서 만나는 상황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국의료윤리학회장을 지내신 고윤석교수님께서는 의료인 개개인의 의료윤리에 대한 인식을 제고시키기 위한 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십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분야에 대한 관심이 늦었던 까닭에 교육에 필요한 자료가 별로 없는 상황에서 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의 강명신교수가 번역하여 소개한 마크 커쥬스키와 로사 린 핀커스의 <병원윤리 딜레마 31>는 좋은 참고서가 될 것 같습니다. 저자들이 펜실베니아 주 서부지역 병원을 네트워크로 연결하여 윤리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참여자들이 발표한 사례들 가운데 31건을 뽑아 다듬은 것이라고 합니다. 먼저 사례를 요약하고 관련용어와 쟁점을 정리한 다음, 관점과 주요 포인트를 환자와 가족 병원관계자들의 입장에서 짚고, 이어서 가능한 다른 결말과 실제 결말을 소개하고서 사례 전체에 대한 해설과 참고문헌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사례들은 ‘동의와 의사결정능력’, ‘퇴원딜레마’, 그리고 ‘의료의사결정과 가족’ 등과 같이 환자중심의 이슈 뿐 아니라 ‘조직윤리와 기관윤리’, ‘재활윤리’, ‘고용문제’ 및 ‘기말보호의 문제’ 등 기관중심의 이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에 따라 나누고 있습니다.

 

물론 사례들이 미국의 병원과 요양시설 등을 포함한 의료 환경에서 이루어진 것들이라서 문화적 배경이나 의료 환경이 다른 우리나라에 바로 적용하기 어려운 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참고할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하겠습니다. 그 가운데 관심이 가는 몇 가지 사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먼저 적극적 치료를 거부하는 급성심근경색증환자의 사례입니다. 우울증으로 치료받은 환자의 병력을 고려한 의료진은 혹시 환자가 우울증 때문에 치료를 거부하여 죽음에 이르려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 확대하면 의사조력자살을 시도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된 것인데 결국은 윤리위원회에서 신중한 검토 끝에 적극적 치료대신 통증완화를 위한 약물치료에 머물기로 결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환자와 가족 그리고 의료진의 입장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윤리위원회가 개입하여 3자적 시각에서 상황을 검토하고 결론에 이르는 윤리위원회의 전형적 활동 사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대장암에 동반된 패혈증으로 입원한 67세 여자환자의 사례에서 환자와 보호자는 끝까지 적극적 치료를 다해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패혈증에 의하여 쇼크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경우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지 않도록 하자는 의료진의 요청에 동의하지 않은 경우입니다. 이 사례의 경우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여 심장박동을 되돌렸다고 하더라도 환자의 삶의 질은 계속 나빠질 것이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를 것입니다. 저자들은 “무의미한 치료 사례들 이면의 윤리적 추론은 의료제공자가 지닌 두 가지 의무, 즉 환자의 자율성을 존중해야 하는 의무와 불필요한 통증과 고통 또는 모욕감을 환자에게 주지 말아야 하는 의무 사이의 갈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92쪽)”고 정리하였습니다. 적극적 치료들 가운데 성공이 거의 불가능한 무의미한 치료에 대한 판단기준을 분명하게 하고 의료진은 환자가 처한 상황을 가족에게 분명하게 전함으로서 불필요한 갈등의 여지를 줄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68세의 울혈성심근질환 환자가 심장마비로 입원한 사례는 반대의 경우입니다. 환자의 병력과 병세를 감안하였을 때 깊은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가 회생할 가능성이 낮다고 본 가족들이 완화치료를 제외한 적극적 치료를 제한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주치의가 동의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오랫동안 환자와 접촉해온 주치의로서 치료를 제한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저자들은 의료의 온정적 간섭주의와 의사가 가진 환자자율성 존중의무라는 의료윤리 이슈가 충돌하는 상황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만든 주치의의 본래 의도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저자들은 다양한 경우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앞서 말씀드린 환자에 대한 정서적인 애착이 있었을 수도 있고, 적극적 치료를 철회하는 것이 적극적 안락사행위에 해당된다고 판단하였을 수도 있으며, 종교에 기반한 삶의 존엄성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학이 작용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치의의 개인적 윤리의식이 반영될 수 있는 방안은 없었을까요? 하지만 주치의가 가족들과의 접촉을 기피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고수한 것은 같이 일하는 의료진에 부담을 키우는 일로서 적절치 못한 선택이라고 하겠습니다. 결국은 가족들과 만나 의견을 조율했어야 옳을 것입니다.

 

과도한 흡연으로 인한 다기관 폐쇄성폐질환과 울혈성 심부전, 당뇨, 비만, 갑상선 부전증 등 다기관질환을 앓는 49세 여자 환자가 심장발작으로 뇌사에 빠진 사례에서는 자원의 배분문제와 함께 환자의 병력과 치료경력에 관한 윤리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1. 환자의 과거의 ‘불순응(비협조, 불이행) - 예를 들어 경고에도 불구하고 흡연을 지속한 것이나, 당뇨병에도 불구하고 비만인 것’은 죽기를 원하는 - 즉 생명연장기술로 삶을 지속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욕구를 표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2. 만일 환자나 대리인이 삽관과 ‘풀코드(full code)’를 요청했다 하더라도, 환자의 불순응을 고려할 때, 이 요청에 따르는 것은 고가의 의료자원을 공정하게 사용하는 것인가?(128쪽)”하는 문제입니다.

 

이는 사회보험의 성격인 건강보험의 보장한계를 구체화하고 가입자들의 의무를 확대하여 보험자의 부담을 줄이려는 의도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건강보험공단이 금년 수가협상과정에서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에 대한 인센티브 연계방안을 병원협회와 논한 것을 두고 사회적 반발이 극심했던 것을 고려한다면 보험가입자에게 건강에 위해요인이 될 행동을 자제하도록 하는 의무를 부과하는 논의가 우리사회에서 과연 가능할까 싶습니다. 저자들은 흡연자에 대한 자원배분의 타당성에 대하여 다양한 방향에서 접근한 논거들을 인용하고 있어 나름대로의 추론을 세우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자원배분 이슈와 관련하여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제도 자체가 제한된 자원을 바탕으로 운용되고 있는 점을 고려한다면 적용범위를 좁게 하되, 범위 밖의 영역은 의료소비자의 부담으로 하는 방안도 적극적으로 검토할 시점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임신21주째 주폐포자충 폐렴과 거대세포바이러스 감염증이 동반된 에이즈에 뇌경색까지 합병되어 인공호흡이 필요한 저산소증 상태에 빠진 임산부의 사례에서 의료진의 선택을 다룬 사례를 보면서 역시 제가 인턴시절 겪었던 사례를 이해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인턴 시절 경험한 사례는 오래되어 병력이 모두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전격성 간염으로 입원한 임신부에게 분만을 유도하는 의료적 처치를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자들이 다루고 있는 사례에서는 병원의 원내변호사는 주의 생전유언법을 바탕으로 태아가 출산가능한 시기에 이를 때까지 사전의료의향서나 연명치료 보류의 권리가 임산부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의료진은 그 결과에 대한 뒷감당을 남편과 아들이 짊어져야 한다는 점을 고려했다고 합니다. 결국은 적극적 치료로 인하여 기대할 수 있는 환자의 여명이 태어난 아이가 생존하는데 필요한 재태기간 25주를 채울 수 없는 상황이 고려되어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지 않기로 결정되었고 환자는 임신상태로 죽음을 맞았다고 합니다. 인턴 시절 제가 지켜보았던 임신부 역시 가족들과의 협의를 통하여 분만을 유도하는 의료적 처치없이 죽음을 맞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과 알렉산더대왕의 해결방식이 생각나는 순간입니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고르디우스왕은 자신의 수레를 신에게 제물로 바치고 아주 복잡한 매듭으로 묶어 놓고서 “장차 이 매듭을 푸는 사람이 아시아의 지배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합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 매듭을 풀려했지만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는데, 알렉산더대왕이 예언을 듣고서 매듭을 단칼에 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발상의 전환을 이야기할 때 잘 인용하는 이야기입니다.

 

앞서 인용한 임신부의 사례에서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권리와 임산부의 권리가 상충되는 상황은 고려할 사항이 많아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만, 저자들은 오히려 간단한 해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즉 “의료진이 그들의 상식을 묵묵히 따르고 환자를 위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행할 때, 법적으로 또한 도덕적으로도 최선을 다하게 된다는 것(156쪽)”입니다. 저자들이 다루고 있는 31건의 사례 가운에 극히 일부인 4건의 사례만을 인용하였습니다만, 다른 사례들 역시 의료현장에서 만날 가능이 충분한 사례들이라 생각합니다. 사례에 따라서 다른 판단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저자들이 소개하는 사례들과 다른 결정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 의료윤리에 관심을 가지고 검토해두면 판단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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