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 구스타프 말러를 만나다 - 정신분석적 심리치료를 만든 역사적 만남들 휴먼테라피 Human Therapy 34
이준석 지음 / 이담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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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언급하는 책을 읽다보면 프로이트를 공부해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만, 막상 정신과 영역에 대한 이해의 폭이 그리 넓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주저하게 됩니다. 정신과를 전공하신 이준석박사님의 <프로이트, 구스타프 말러를 만나다>를 만나게(?)된 것은 제목이 주는 말랑한 느낌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신분석의와 음악가의 만남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 하는 나름대로의 기대가 작용한 것도 사실입니다.

 

먼저 이 책의 성격을 간략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이 책은 정신분석학이 탄생하고 현대의 심리학으로 발전하게 되는 과정에서 변곡점을 만들었던 프란츠 메스머(1734~1815),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 그리고 하인즈 코헛(1913~1981), 세 사람이 학문적 성취를 이루는 과정에서 만난 특별한 사건들을 조망하고 있습니다. 메스머의 메스머리즘은 ‘심리학 없는 심리치료’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심리학 위한 심리치료’로, 그리고 코헛의 자기 심리학은 ‘심리학 너머 심리치료’라는 제목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들 세 사람은 활동한 시기나 활동무대는 달랐어도 비엔나 의과대학 출신의 의사였고, 하나같이 비엔나에서 쫓겨나 타국으로 망명하는 신세였다고 합니다. 자신에 닥친 고난을 극복한 이들의 열정에 힘입어 현대의 정신분석적 심리치료가 어떻게 탄생하고 발전하게 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사용했던 최면이나 정신분석이라는 방법론을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필자의 앎이 많지 않아 깊이는 부족하겠지만 그동안의 공부를 소개하기로 합니다.

 

18세기 의학을 공부한 메스머의 학문적 뿌리가 16세기 초반 활동한 의사 파라켈수스(1493~1541)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의외라고 할 만합니다. 그만큼 저자의 자료추적의 집요함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18세기 의학이 그렇겠습니다만, 16세기의 의학 역시 과학적 방법론이 세워지기 이전의 경험적 혹은 관념적 이론에 바탕을 둔 의학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천문학적 지식이 없는 자는 의술에 필요한 지식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23쪽)”고 한 파라켈수스의 주장에 공감할 의사가 얼마나 될지 궁금해집니다. 파라켈수스의 이러한 주장은 인간이란 우주 전체와 그것을 구성하는 원소들로 이루어진 소우주라고 여긴데서 나온 것으로 당연히 우주는 소우주인 인간의 몸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유추한 것입니다. 그 결과를 의학으로 가져온 것이 자석치료였다는 것입니다. 요즈음에도 자석이 질병치료에 유용할 것이라고 믿는 분들이 적지 않아 16세기의 관념적 의학의 뿌리가 참 깊고도 질기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개혁적 성향이 강했던 파라켈수스는 전통 가톨릭에 대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다수의 저작을 남겼는데, 이 저작들이 메스머와 파라켈수스를 연결하는 고리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15살이 된 메스머가 신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입학한 바이에른 지방의 딜링엔 예수회 대학에서 만난 파라켈수스의 사상에 빠져들어 결국은 신학을 포기하고 비엔나 의대에 입학하게 됩니다. 비엔나 의대의 졸업논문이 ‘행성의 영향에 대하여’였던 것만 보아도 메스머가 파라켈수스에 얼마나 경도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메스머는 처음에 광물자석을 치료에 적용하다가 이를 동물자기설(動物磁氣說)로 발전시켰는데, 건강한 자신의 자기를 불어넣어 흐트러진 환자의 자기를 바로 잡는다는 치료개념이었습니다. 치료과정을 살펴보면 메스머가 미리 자신의 동물자기를 불어넣은 유리조각이나 쇳조각을 집어넣고 물을 가득채운 오크 욕조통에 꽂아놓은 쇠막대를 붙들고 앉아 있는 환자에게 “내 눈동자를 바라보세요!”라고 말하면, 메스머의 눈동자에 집중하던 환자들이 얼마 후 심한 경련이 일어나면서 증상이 호전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이런 치료를 행하다가는 당장 돌팔이 사이비 의사로 몰리기 십상일 것 같습니다. 모차르트, 파라디스 등을 치료하면서 당시 비엔나에서 유명세를 탔던 메스머는 그의 인기를 시기한 의사들의 질시를 받게 되는데, 전기에 관한 실험으로 유명한 벤자민 플랭클린이 참여한 실험에서 메스머의 동물자기의 허구가 드러나면서 몰락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메스머는 자신의 자기요법에도 치료되지 않는 환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환자가 치유되려는 갈망을 가지지 않으면, 자신으로부터 발산되는 치료적 유동물질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라포르 이론’을 만들어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문제가 생길 때를 대비한 안전판이었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 과학이 발전하면 동물자기가 입증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하니 메스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치료법을 굳게 믿었던 것 같은데, 당시의 의학수준으로는 이런 황당한 치료법의 진실을 가려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편 샤스뜨네 퓌세귀르 후작은 메스머의 자기요법을 자기수면요법으로 개량하게 되었는데 근대적인 의미의 최면요법의 원형(原形)이라고 합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뇌성마비 아동의 신경병리를 공부하고자 파리의 살페트리에르병원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엉뚱하게도 신경과장 쟝 마르텡 샤르코교수가 히스테리환자를 최면으로 치료하는 과정을 만난 것이 진로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최면치료의 효과에 몰입해가던 프로이트는 어느 시점에서부터 치료성과가 지지부진해지면서 최면에 회의를 가지게 되었는데, 결정적으로 최면치료를 받던 환자가 성적 이상행동을 하는 상황을 만나게 되면서 최면치료와 결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최면치료의 효과를 검증한 현대의 회의주의자들은 최면을 정상과학과 비정상과학의 경계지대에 걸쳐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비과학이 아닌 것이 확실한 최면의 신경생리학은 아직도 밝혀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이클 셔머, 변경지대의 과학 49쪽;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02415)

 

프로이트가 40세가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정신분석을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마음이 따뜻했던 아버지를 잃은 상실감을 이해하기 위하여 프로이트는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그 의미를 찾는 자기분석을 시작하게 되는데, 그 결과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질투가 내게도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런 현상이 아동기의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이런 자신의 생각을 소포클레스의 희곡으로 잘 알려진 오이디푸스 왕의 사례와 연결하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어린이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아버지에 대한 질투로 이어진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가능한 것인가 하는 의문과 함께, 이런 현상이 아동기의 보편적 현상이라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소포클레스가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에서 그려내려 한 것은 신에 의하여 예정된 일은 인간의 힘으로 뒤집을 수 없다는 한계를 말하고자 함이지, 아버지를 질투하고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극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보이는 점도 있어, 프로이트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차용한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 싶은 생각도 하게 됩니다.

 

태어나면서 받은 신탁 때문에 어린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아버지를 질투할 틈도 없이 버려지는데,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새로이 아버지가 된 코린토스의 왕 폴리보스에게 이런 감정이 향하는 것이 순리적일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철이 들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피하기 위하여 집을 떠난 오이디푸스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 친부 테베의 왕 라이오스를 죽이고 그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을 하게 되는 과정은 프로이트의 아동기 성적 판타지와는 거리가 멀다고 하겠습니다.

 

프로이트가 성경 창세기에 착안하여 도출했다는 <꿈의 해석>을 통하여 정신분석을 하는 것 역시 검사자의 주관에 의하여 꿈이 해석되는 것이며 꿈의 해석이 안고 있는 보편성이나 꿈을 꾼 자의 특수성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즉 꿈의 해석이 과학적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인데, 여기에 대하여 “나는 전혀 과학적인 사람이 아니며, 관찰자도 아니며, 실험가도 아니며, 사상가도 아닙니다. 나는 기질로 볼 때 정복자일 뿐이고, 호기심, 과감성, 집요함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에서 탐험가일 뿐입니다.(137쪽)”라는 프로이트의 고백이 꿈의 해석을 통한 정신분석의 과학성을 판단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회의주의자 마이클 셔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을 비과학, 즉 엉터리에 속한다고 분류하고 있습니다.(마이클 셔머, 과학의 변경지대 41쪽, 274~280쪽) 프로이트는 자신을 불필요한 가설 없이 순수한 데이터만으로 연구하는 19세기 과학의 위대한 영웅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많은 이론이 사변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가 1885년과 1907년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의 논문, 노트, 편지, 사적인 일기, 초고의 주요 부분들을 파기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산도르 페렌찌가 자기성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정신분석에 대한 프로이트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자기성찰을 통해 얻는 자료들을 과학적으로 정리하여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이 실험을 통해 수집된 외적 자료를 이용해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처럼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224쪽)” 사변이 실험을 대체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해석되는 것 같습니다. 그의 딸 안나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에 통계적 검증과 실험적 기법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에 대하여 “왜들 그렇게 눈이 멀었을까요?”라면서 정신분석 고유의 지식과 방법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데서도 정신분석학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기심리학으로 정신분석학적 심리학을 새롭게 자리매김한 하인즈 코헛은 학문적 뿌리를 프로이트에 두고 있지만, 심리치료에 공감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치료자 중심이었던 기왕의 정신분석과 차별을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즈음 우리사회에서도 크게 화두가 되고 있는 ‘공감’에는 1) 마음을 읽는 도구, 2) 마음과 마음을 잇는 매듭, 3) 마음의 영양소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코헛은 기존의 정신분석학에서 어느 순간 모순되고, 근거가 희박하며, 종종 모호한 이론적 추론 속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다가 임상현상들을 직접 관찰하는 자세로 되돌아가서 자신이 관찰한 바를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공식을 발견할 필요를 느꼈고 그 결과 ‘자기의 회복’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아-이드-초자아로 구성된 전통 정신분석학의 구조와 결별하고 자기심리학을 세우게 되는데, 인간의 파괴적 성향은 타고난 본성이 아니라 ‘자기’와 자기-대상‘ 사이의 공감적 반응에 실패했기 때문에 파생된 이차적 결과물이라는 것입니다.

“유아기 성욕은 인간의 마음을 만드는 근본적인 핵심이 아닙니다. ‘자기’와 공감적인 ‘자기-대상’ 사이의 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과정이 마음을 만드는 근본적인 핵심입니다. 성적 충동이나 공격적 충동이 두드러진 아기는 ‘자기-대상’으로부터 상처를 입거나 오랫동안 공감적 반응을 얻지 못했던 아기입니다.(276쪽)” 어떻습니까? 상당히 공감이 가는 이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정리를 해보면, 저자는 프란츠 메스머의 ‘최면치료’에서 시작하여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거쳐 하인즈 코헛의 ‘자기 심리학’으로 대표하는 현대심리학이 발전해온 과정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잘 아는 인물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세 사람의 심리학자들이 어떤 학문적 성과를 얻을 수 있었는가를 살피는 독특한 설명구조를 만들어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익숙한 만큼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현대에 들어 합리성을 잃었다고 볼 수도 있는 과거의 이론을 인용하는 것은 “모든 심리학이 실제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맞닿아 있기 때문에 이런 심리학 이론들 사이에 경계나 우열을 가리는 것 또한 무의미한 짓(296쪽)”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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