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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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읽고 싶은 책 목록, 그러니까 독서부문의 버킷리스트에서 제일 첫머리에 아주 오랫동안 놓여 있었습니다. 기억나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일독을 권유받아왔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방대한 작품의 분량때문에 선뜻 시작하지 못한 것인데, 사정이 저와 같은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최근에 ‘새끼가 새끼를 치는 책읽기’라고 해도 좋을 계기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하였습니다. 시작은 박완서 선생님의 산문집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 ; http://blog.joinsmsn.com/yang412/12798700>였습니다. 선생님은 이 책에 일상의 삶에서 느낀 점, 책을 읽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그리고 먼저 가신 분에 대한 애달픈 마음 등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선생님은 조나 레러의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02521>를 읽으시고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읽게 되셨다고 했습니다. “신경과학이라는 학문이 생겨나기도 전에 이미 뛰어난 작가, 화가, 작곡가, 요리사, 등 일급의 예술가들이 알아낸 진실들을, 신경과학을 전공한 저자가 그게 과학적으로 옳았다고 재확인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할 뿐 아니라 빛나고 멋있어 보였다.(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 227쪽)” 책을 읽으신 느낌을 어쩌면 이렇게 간결하면서도 나도 읽어봐야 하겠다는 충동이 일게 쓰실 수 있을까요? 당연히 조나 레러의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를 읽었고, 내친 김에 박완서선생님처럼 국일미디어판으로 나온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를 읽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민음사판으로 나온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를 다시 읽으면서 라포르시안 [북소리] 독자 여러분과 함께 느낌을 나누고자 합니다. 민음사판은 파리3대학에서 프루스트를 전공한 김희영교수님께서 옮기셨다고 합니다(http://blog.yes24.com/document/6800673). 1998년에 초판이 나온 국일미디어판과 비교해서 민음사판에서는 당연히 14년의 시차가 말하듯, 번역의 흐름이나 단어 등에서 세월의 흐름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차이가 있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사소할 수 있습니다만, 첫 권의 모두에 등장인물의 성격을 요약해둔 점이나 풍부한 각주를 덧붙여 당시 프랑스 문화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 점도 책읽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국일미디어판은 이미 전권이 출판되어 있습니다만, 민음사판은 1부 ‘스완네 집 쪽으로’가 나와 있습니다. 예전에 박경리선생님의 <토지>를 읽을 때처럼 다음 편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따라 읽다보면 지루하다는 느낌없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다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돌아가서,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강박증을 가지고 있던 프루스트가 제목에 담은 뜻은 ‘시간이 멈추는 감추어진 공간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답니다. 천식이라는 고질병이 심해지면서 외출을 삼가게 된 프루스트는 파리 사교계를 주름잡던 화려한 시절에 대한 기억이 바로 자신을 지탱하는 힘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 것이 집필동기였다고 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지막편 ‘되찾은 시간’에서는 주인공이 노년에 이른 시점에서 주요 등장인물들이 퇴장하고 새로운 얼굴들이 등장하고 있는 사교계를 그리고 있는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과거의 사실들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면서, “얼마간이라도 나에게 작품을 완성시킬 만한 오랜 시간(longtemps)이 남아 있다면, 우선 거기에 공간 속에 한정된 자리가 아니라, 아주 큰 자리, 그와 반대로 한량없이 연장된 자리 ‘시간(temps)' 안에 차지하는 인간을 그려보련다.(국일미디어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되찾은 시간, 499쪽)”라고 적은 부분에서도 집필동기를 엿볼 수 있습니다.

 

프루스트의 시간과 기억과의 관계는 노벨상 수상작가 오르한 파묵의 <순수박물관2;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3484>을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지금’이라는 하나하나의 순간들과 ‘시간’을 구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자처럼, 이 하나하나의 순간은 나뉠 수 없고 쪼개질 수 없다. 시간은 이런 나뉠 수 없는 순간들을 합친 선이다.(순수박물관, 35쪽)” 아리스토텔레스가 지금이라고 말하는 순간이 쌓여진 시간을 바로 기억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동물의 기억이 어떻게 저장되고 심지어는 유전자에 담겨서 후손에 전달되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도 상당부분이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입니다. 기억에 대한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한 에릭 캔델교수는 연구에 쏟은 자신의 삶을 적은 책 <기억을 찾아서; http://blog.joinsmsn.com/yang412/10991633>에서 사이박사와 같이 진행한 연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프리온이라고 하는 세포막단백질이 기억이 저장되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우리는 프리온단백의 점변이나 아직 밝혀지지 않은 원인으로 삼차원적 구조가 변하게 되고 그 결과 뇌가 스펀지처럼 변하는 광우병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끔찍한 광우병의 발병과 관련이 있는 프리온이 정작 기억이 저장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나가다 보면 쉽게 지나쳐버리기 쉬운 사물이나 상황을 프루스트는 얼마나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솔길에는 산사나무향기가 짙게 풍기고 있었다. 울타리는 임시 제단 위에 쌓아 놓은 산더미 같은 산사 꽃들로 칸막이가 보이지 않는, 쭉 늘어서 있는 노천 제단 같은 모습이었다. 그 제단 밑으로 햇빛은 방금 채색 유리를 통과한 듯, 바둑판무늬 빛을 땅바닥에 그렸다. 산사 꽃향기는 마치 내가 성모마리아 제단 앞에 서 있기라도 한 듯이, 그 형태 안에 뚜렷이 드러나며 촉촉하게 내 주위를 감돌았고, 장식된 꽃들 역시 마치 성당의 붉은 복도 난간이나 채색 유리창살 대에 투조 세공을 한 딸기 꽃의 하얀 살로 피어난 꽃들처럼, 저마다 방심한 표정으로 섬세하고도 눈부시게 빛나는 불꽃 양식 잎맥 무늬 수술다발을 들고 있었다. 이에 비하면 몇 주 후에 작은 바람의 숨결에도 날아가 버릴 단색 붉은 실크 블라우스를 입고, 햇빛 아래서 이 시골길을 기어 올라갈 들장미는 얼마나 순진한 농부 아가씨 같아 보일까!(244쪽)”

 

이처럼 세밀한 묘사는 프루스트 자신이 오감을 통하여 얻은 경험에 바탕하고 있음일 터인데, 아마도 심연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특별한 경험을 적고 있습니다. 프루스트의 이런 관념적 기술은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기억을 끄집어내는 독특한 장치로 프루스트는 후각과 미각을 들고 있습니다.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 내가 찾는 진실은 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차가 내 속에 있는 진실을 일깨웠지만, (…) 생각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차의 첫 모금을 마신 순간으로 되돌아가본다. (…) 분명히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팔딱거리는 것은 그 맛과 연결되어 맛의 뒤를 따라 내게로까지 올라오려고 애쓰는 이미지, 시각적인 추억임에 틀림없다. (…) 그러다가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85~89쪽)”

 

프루스트는 이어서 미각과 후각이 깊이 잠겨 있는 추억을 끄집어낼 수 있게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주 오랜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에도, 존재의 죽음과 사물의 파괴 후에도, 연약하지만 보다 생생하고, 비물질적이지만 보다 집요하고 보다 충실한 냄새와 맛은, 오랫동안 영혼처럼 살아남아 다른 모든 것의 폐허 위에서 회상하고 기다리고 희망하며, 거의 만질 수 없는 미세한 물방울 위에서 추억의 거대한 건축물을 꿋꿋이 떠받치고 있다.(90쪽)”

 

큰 아이가 어렸을 적에 부드럽고 달콤한 마들렌을 특별하게 좋아하기 때문에 퇴근길에는 동네 빵집에 들러 마들렌 몇 개를 사들던 기억이 있습니다만, 옮긴이는 조가비처럼 생긴 프티트 마들렌이라고 하는 기억회상장치에 대하여 조가비처럼 생긴 마들렌의 접힌 주름이 펼쳐진다는 상상에서 기억에 숨어있는 과거의 부활을 감추었다고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청각 역시 기억을 되살리는 계기가 된다는 점 역시 소홀하게 다루지는 않았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요 무대가 되고 있는 프랑스의 살롱에서는 다양한 음악을 연주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하고, 그 음악에서 특별한 기억을 되살리기도 합니다. 프루스트는 음악을 넘어서 일상에서 듣는 소리를 음악으로 격상시키고 이 소리가 기억을 되살리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다음 장면입니다. “화창한 날씨에 태어나 화창한 날씨와 더불어서만 다시 태어나는 이 음악은, 그런 나날의 본질을 함유하면서 우리 기억 속에 그 이미지를 일깨우는 동시에, 그런 나날이 돌아왔다는 것을, 실제로 우리 주위에 있다는 것을, 그래서 즉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음을 확인해 준다.(151쪽)”

 

음악이 기억을 되살리는 장치라는 사실은 개인적 경험으로도 동의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조건반사와 같은 것입니다만, 제 경우는 ‘Song for Anna’라는 제목의 연주곡이 그런 장치입니다. 그 옛날 다방에서 만나 이야기를 하던 중에 나온 이 노래를 듣던 여자 친구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라고 지나가듯 말한 것이 조건을 형성하는 계기가 된 것이지요.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이 노래를 듣게 되면 그때 좋아했던 친구가 생각나곤 합니다.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통해서 오감, 특히 후각과 미각이 기억이라고 하는 뇌의 기능과 연관이 있다는 점을 시사했음에도 당시의 정신의학자들은 관심을 두지 못하고 있었다고 조나 레러박사는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브라운 대학의 심리학자 레이첼 허츠박사의 ‘프루스트적 가설을 시험하기’라는 연구에서 우리의 후각과 미각이 특히 센티멘털하다는 주장을 인용하면서, “그것은 후각과 미각만이 뇌의 장기 기억 센터인 해마조직과 직접 연관되는 감각들이기 때문이다. 해마 조직에 새겨진 후각과 미각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의 다른 모든 감각들(시각, 촉각, 청각)은 먼저 언어의 원천이자 의식의 관문인 시상에 의해 가공된다. 그 결과 이런 감각들은 우리의 과거를 불러오는 데는 훨씬 덜 효과적.(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148쪽)”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기억에 대한 프루스트의 직관력이 뛰어났음을 강조한 조나 레러박사가 책의 제목까지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라고 정한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반전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기억을 되살리는 장치에 대하여 지루할 정도로 자세히 설명한 프루스트는 기억의 허구성도 짚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억의 부정확성을 증명하는 실험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만, 프루스트는 기억이 현실을 직접 재현하지 않는 대신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한 불완전한 복사본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200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르한 파묵은 하버드대학의 ‘찰스 엘리엇 노턴’ 강연에서 “나는 세계의 본질을 알고, 인간적으로 성숙해지고, 내 정신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꿈속에 잠긴 기분으로 다른 모든 것을 잊고 소설을 읽곤 했습니다.(소설과 소설가, 11쪽;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5937)”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책읽기를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는데, 프루스트 역시 소설읽기를 통하여 독자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볼 수 있게 합니다. “내가 독서를 하는 동안, 안에서 밖으로 진리발견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그 중심적인 믿음 다음에 오는 것은, 바로 내가 참여하는 행동들이 주는 감동이었다. (…) 소설가가 쓴 책은 꿈과 같은 방식으로, 그러나 우리가 자면서 꾸는 꿈보다 선명하고 더 오래 기억되는 꿈으로 우리를 뒤흔들 것이다.(153~155쪽)” 그 이유는 짧은 시간을 통하여 소설을 읽어 얻는 경험을 실제 삶에서라면 일부를 아는데도 몇 년이 걸릴 것이고 우리 기억에 갈무리되는 과정이 너무 느리게 진행되어 우리 지각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근래 들어 책읽기를 소홀하게 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었으면 싶은 좋은 경구라는 생각이 들어 마지막으로 덧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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