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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스캔들 - 키스의 문화와 예술, 그 상상력 읽기
윤향기 지음 / 이담북스 / 2012년 8월
평점 :
첫 키스를 기억하십니까? 그 첫 키스의 기억은 당신만의 비밀인가요? 아니면 당신 주위에 계신 분들도 모두 알고 있나요. 소중하게 간직할 사랑에 관한 내밀한 이야기를 마치 전리품처럼 떠벌이는 사람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연예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에게 흔히 첫 키스는 언제 해보았느냐는 질문을 미끼로 던지는 세태입니다. 이 질문을 시작으로 상대가 누군지 등 그 사람의 애정행각을 본격적으로 탐색하는 순서로 진행되곤 합니다.
출연자들은 마땅한 이야기 거리가 없으면 자신의 연애사를 거침없이 터뜨리고, 이런 이야기들이 다음 날 아침 신문의 연예란에 주먹만한 글자로 대서특필되기도 합니다. 그 상대방에게는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일이 될 수도 있을 터인데 사전에 허락은 받은 것일까 궁금합니다.
만해 한용운님께서는 <님의 침묵>에서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라고 적어 첫 키스의 순간이 한 사람의 인생에서 차지하는 무게가 작지 않음을 가늠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첫 키스의 추억도 두 사람만의 비밀로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의 주제는 윤향기시인의 <키스 스캔들>에서 다루고 있는 키스가 되겠습니다. 첫 키스라 함은 어느 아기라도 예쁘기만 한 시절, 가족 혹은 친지로부터 받는 뽀뽀를 이르는 것은 물론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보니 얼마나 다양한 키스의 종류가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윤향기시인은 메모리된 키스가 워낙이 다양하다면서 버드키스, 크로스 키스, 햄버기 키스, 에어클리닝 키스, 슬라이딩 키스, 인사이드 키스, 프렌치 키스, 이팅 키스, 와이드스페이스 키스 등 대표적인 9가지 형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키스가 “때로는 따뜻하고, 때로는 차갑고, 때로는 단단하고,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격정적이고, 때로는 잔혹한 사람이 나고 죽는 것보다 더 오래된 옹알이 소리가 그 속에는 들어있다.(22쪽)”고 적고 있어 종류와 느낌을 조합하면 같은 느낌의 키스는 없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녀는 키스가 무의식적 본능에서 표출되는 하나의 기호로서 “누군가에게는 환희의 기호로, 누군가엔 더할 나위 없는 슬픔으로 표현되는 저항, 방어, 광기, 도취, 매혹만 있는 것이 아니라 치유와 통합, 회복의 힘이 옵션으로 들어 있다.”고 프롤로그에 적고 있습니다. 저자의 남다른 흥미와 관심으로부터 배태되어 오랜 노력 끝에 탄생한 <키스 스캔들>을 통하여 키스의 종류와 연원과 의미변천을 명화와 명시를 통해 생물학, 인류학, 문화심리학, 정신분석학적 분석을 감상해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될 듯합니다.
연희원교수님의 <에코의 기호학;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10610>을 통하여 순수미술과 대중미술이 공유할 수 있는 점을 소개드린 적이 있습니다. 에코의 기호학적 방법론과 세계관을 적용하여 예술과 미의 보편적 전달가능성에 대한 기호학적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는 말씀을 드렸던 것 같습니다. “21세기에는 순수미술과 대중미술을 구분하는 일이 무의미해졌다. 과거 예술은 특별한 사람들에게 하녀처럼 봉사했지만 현대 대중미술은 대중들과 함께 걷는다.(176쪽)”라고 정리하고 있는 윤향기 시인께서도 공감하는 부분 같습니다. 더 나아가 ‘최근 아트 개념 속의 몸은 상품으로서의 섹슈얼리티로 포장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클림트, 뭉크, 실레, 브랑쿠시, 마그리트, 비어즐리, 루벤스, 워터하우스 등 대가들이 키스를 소재로 하여 그린 명화를 씨줄로 하고, 다양한 작가들의 시(詩)는 물론 소설,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키스에 관한 이야기들을 날줄로 엮어 이야기를 풍성하게 하고 있습니다. 윤향기 시인께서 독자들을 위하여 카르페디엠, 소울 푸드, 에로티시즘, 팜므파탈, 타나토스, 에로스 등 무려 열두 가지나 되는 키스의 성찬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가질듯한 ‘인간은 왜 키스를 하는가?’하는 원초적 궁금증에 대하여 저자는 “사회심리학자들은 이 같은 행동은 촉각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살피려는 의도에서 시작됐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생물학자들은 키스를 교환하는 것은 소금기를 얻으려는 시도로부터 유래됐다고 분석한다.(17쪽)”고 적었는데,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생물학자들의 주장은 너무 메마른 사고의 결과로 보여 혹시 허점은 없을까 심각하게 연구해봐야 하겠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저자는 에드바르트 뭉크가 키스를 소재로 하여 그린 여러 점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뭉크의 <절규>라는 작품은 미술에 문외한인 저도 알 정도로 잘 알려진 작품입니다. <절규>가 제작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1893년 어느 날 황혼 무렵 친구 두 명과 함께 길을 걷고 있는데, 피오르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쪽으로 태양이 지고 있어 하늘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다고 합니다. 이 정경을 보는 순간 뭉크는 갑자기 알지 못하는 슬픔에 휩싸이면서 불안감이 엄습하여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난간에 기대어 검푸른 피오르드와 거리 위로 낮게 깔린 불타는 듯한 구름을 바라보고 있는 그를 잠시 지켜보던 친구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는데, 뭉크는 공포에 떨면서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마치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자연의 날카로운 절규가 대기를 갈갈이 찢는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는 것인데, 이 날의 강렬한 느낌이 <절규>로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다음 블로그 ‘금모래 사진 겔러리’ 자료를 다시 구성하였습니다. http://blog.daum.net/jdchung5/3366489) 뭉크의 <절규>는 오슬로에 있는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에서 볼 수 있고, 사진촬영이 가능하다고 하니 오슬로에 가실 기회가 있으시면 꼭 들러보시기를 권합니다.
뭉크의 작품은 대체적으로 어둡고 섬뜩한 느낌을 주는데, 이는 우울증을 앓던 여동생을 비롯한 가족사를 비롯하여 세 살 연상의 유부녀와의 사랑이 실패하면서 생긴 정신적 상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쉽지 않을 부분입니다. 뭉크가 명성을 얻기 전까지만 해도 전시회 때마다 혹평이 뒤따랐다는 사실에서도 이런 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저자가 인용한 “나는 매일 죽음과 함께 살았다. 나는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두 가지 적을 안고 태어났는데, 그것은 폐병과 정신병이었다. 질병, 광기, 그리고 죽음은 내가 태어난 요람을 둘러싸고 있던 검은 천사들이었다.(36쪽)”고 한 뭉크의 말은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질투>라는 제목으로 된 작품에 대하여 작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방은 뭉크의 무의식이고, 뒤의 두 남녀는 마음속에서 일어난 상상을 그린 것이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사랑과 미움, 선과 악의 경계에서 안주하지 못한 채 흔들거리는 사내가 한없이 무기력해 보인다. 그러나 그의 왼쪽 눈은 분노, 오른쪽 눈은 절망으로 이글거린다. 자기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그녀의 포식본능을 새장 안에 가두고 싶어 하는 눈빛이다.(40쪽)” 욕망 혹은 호기심이 바깥으로 향하는 연인을 붙들어 매려는 노력은 마르셀 푸르스트 역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9; 갇힌 여인>에서 알베르틴과의 숨바꼭질을 통하여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어 쉽게 이해가 됩니다만, 화가의 제작의도가 함축적으로 담기는 회화작품에서는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제 눈으로는 <질투>에서 뭉크의 간절함을 제대로 읽어낼 수 없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합니다.
팜므파탈적 키스를 논하고 있는 ‘위험한 욕망의 키스’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자신의 구애를 거절한 세례 요한의 목을 끌어안고 키스를 퍼붓는 살로메를 그리고 있는 회화작품들과 오스카 와일드의 시 <살로메>가 눈길을 끕니다. “당신의 입술에서는 쓴 맛이 나는군. / 피 맛인가? 아니야! 사랑의 맛이겠지. / 사랑이 쓴 맛이라지.” 하지만 섬뜩한 느낌을 주는 오브리 빈센트 비어줄리의 <살로메> 연작이나 막스 클링거의 <율리우스 살로메>와는 달리 뤼시앵 레비 뒤르메르의 <살로메>는 마치 잠든 연인에게 살짝 입을 맞추듯 한 느낌이 드는 것은 파스텔화 특유의 분위기도 한 몫을 한 것이겠지만, 세례 요한의 목을 다정하게 감싸는 듯한 살로메의 포즈도 기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자가 ‘불온한 쾌락의 키스’라는 범주에 넣은 이야기들 가운데, 한트 세발트 베함의 <키스>라는 작품을 제외하고는 딱히 불온하다싶은 느낌이 오지 않습니다. 카미유 클로델과 오귀스트 로댕 사이의 안타까운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카미유 클로델의 작품 <사쿤달라>의 배경이 되는 인도의 고전희곡 <샤쿤탈라>의 스토리 역시 고난을 겪게 되는 남녀가 종국에는 사랑을 이룬다는 내용입니다. 카미유의 동생 폴의 작품해설을 보면 이해가 되실 것 같습니다. “남자는 무릎을 꿇었고, 욕망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이 남자는 고개를 들고, 감히 잡을 수 없는 이 놀라운 존재를, 저 높은 곳에서 그에게로 추락한 이 신성한 육체를 열망하며 껴안는다. 눈멀고 귀먼 이 여인은 사랑이라는 무게에 짓눌려 굴복하고 만다. 이 보다 더 강렬하고, 동시에 정결한 작품을 본다는 것을 일을 수 없다.(49쪽)” 물론 이러한 해설에는 누이 카미유에 대한 위로가 포함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키스는 성적 친밀감의 원초적 본능이다.”라고 시인은 단도직입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키스를 통해 관능의 새로운 세계로 발을 들여 놓을 때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감각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저자가 풀어놓은 키스의 미학을 제대로 알려면 미학에 관한 기본적 지식을 쌓아야 할 것 같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미학을 집대성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미(美)란 크기와 질서가 잡힌 배열에 근거한다.(미학산책 43쪽;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18284)”고 말한 바 있습니다. 즉, 사물의 모든 부분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를 미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미의 대상에 대한 별도의 설명이 없어도 보는 이가 마음으로 미를 느끼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고전적 개념의 미학이라 하겠습니다. 반면 뭉크의 예에서도 보는 것처럼 현대 화가들의 작품은 전문가의 설명이 곁들여지면 이해의 폭이 깊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미학, 특히 현대 미학을 이해하는데 있어 전문가들의 설명을 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만 기억해 두어야 할만한 점은 있습니다. 로저 킴볼은 예술사에 정치적 개입을 경계하면서도 예술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온갖 종류의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 요소들이 개입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습니다.(평론, 예술을 엿먹이다, 61쪽;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66017) 다만 생생한 기운의 중심은 작품 자체가 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예술사가 아니라 일종의 자서전 혹은 정치적 설교가 되어버리고 말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언제쯤 키스를 해보셨습니까? 혹시 너무 오래되어 키스하는 방법을 잊어버리신 것은 아닌가요? “당신이 일상에서 잊어버린 키스! 그러나 어쩌면 당신의 영혼이 아직 기억하고 있을 키스! 生의 에너지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나는 키스에는 요란한 온도와 불빛이 있다. 그것은 때로 당신이 느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넓고 훨씬 신비롭다.(53쪽)“고 합니다. 그러니 하던 대로 사랑하고, 하던 대로 그래도 키스를 하라고 윤향기 시인은 조언하고 있습니다. 키스는 바로 치유인 동시에 휴식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