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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ㅣ 밀란 쿤데라 전집 1
밀란 쿤테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평점 :
민음사에서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시리즈로 내면서 쿤데라의 소설세계를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일찍이 읽었지만, 삶에 대한 통찰의 깊이가 없을 때였던 젊을 때라서 작가의 메시지를 제대로 읽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조선일보의 [101 파워클래식]을 통하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소개되고 북콘서트를 통해서 작품의 깊이를 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쿤데라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민음사의 쿤데라 전집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밀란 쿤데라는 1929년 체코의 브르노에서 태어났습니다. 피아니스트로 야나체크 음악원교수인 부친의 영향을 받아 그 음악원에서 작곡을 공부한 그는 프라하의 예술아카데미 AMU에서 시나리오작가와 영화감독 수업을 받았습니다. 1963년 이래 「프라하의 봄」이 1968년 소련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프라하에 진주하면서 좌절될 때까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운동'을 주도했지만 결국은 일자리를 잃고 저서마저 압수되고 말았습니다. 1960년대 작품 <농담>과 <우스운 사랑> 2권이 체코에서 발표되었는데, <농담>은 1968년 프랑스 갈리마르(Gallimard)출판사에서 불어로 번역출간되면서 단숨에 프랑스문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초현실주의 작가 아라공(Louis Aragon)은 <농담>의 불역판 서문에서 “금세기 최대의 소설가들 중 한 사람으로 소설이 빵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증명해주는 소설가”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농담>을 통하여 체코의 사회주의 체제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쿤데라는 집필활동을 금지당하는 불운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고통의 시간은 오히려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게 됩니다. <농담>을 통하여 쿤데라를 알게 된 프랑스 문화계의 도움으로 쿤데라는 1975년 프랑스로 망명하여 정착하고 작품활동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체코에서의 작품활동이 금지된 것이 전화위복이 된 셈입니다.
밀란 쿤데라는 자신의 작품들을 통하여 다양한 모습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9723>에서는 4인 4색의 사랑을, <느림;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58261>에서는 절차가 생략된 인스턴트식 사랑을, <향수;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70113>에서는 고국을 떠난 사람들에서 뿌리가 없는 사랑을, <정체성;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22675>에서는 우연에 흔들리는 사랑을 그리고 있습니다. <농담>은 젊은 시절에 암울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쓰인 작품으로, 불안한 느낌을 주는 젊은이의 좌충우돌식 사랑이 느껴집니다.
<농담>의 전체 스토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캠퍼스에서 만난 마르케타에게서 사랑을 느낀 루드비크가 봉사활동을 떠난 마르케타의 마음을 얻으려 보낸 엽서에 쓴 농담이 꼬투리가 되어 사상을 의심받게 되는 상황에 몰리게 됩니다. 평소 친하게 지낸 제마네크가 도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출당과 퇴교라는 최악의 결정을 내리는데 앞장서는 황당한 상황을 맞게 됩니다. 사태는 퇴교로 끝나지 않고 군입대와 탄광노역으로 이어지게 되고, 그곳에서 만난 여인 루치에에게 마음을 주게 되지만 평소 헌신적 사랑을 보이던 그녀는 결정적 순간에 자신을 닫아걸고 홀연히 사라지고 맙니다. 고통스럽던 탄광노역도 끝나고 프라하로 복귀한 루드비크는 우연히 만나게 된 제마네크의 아내 헬레나를 유혹하여 제마네크에게 복수하려는 계획을 실행하기에 이르지만 그의 의도와는 다른 결말에 이르게 됩니다.
작가는 전체의 스토리를 모두 7개의 작은 이야기로 쪼개고 있습니다. 작은 이야기들은 주인공 루드비크를 비롯하여 조연격으로 등장하는 헬레나, 야로슬라프, 코스트카가 화자(話者)가 되어 이끌고 있습니다. 다만 마지막 이야기는 루드비크와 헬레나 그리고 야로슬라프가 중심이 되어 진행되는데, 현재 시점의 사건은 루드비크의 고향 모라비아에서 진행됩니다. 헬레나는 앞서 이야기한대로 루드비크가 대학에서 쫓겨나는데 앞장선 제마네크의 아내이고, 야로슬라프는 고향 모라비아에서 루드비크와 함께 전통음악 지킴이 활동을 같이 한 친구이며, 코스트카는 대학시절부터 여러 차례 위기에 빠졌을 때 루드비크로부터 도움을 받은 친구입니다. 코스트카는 현재 모라비아에 정착하고 있어 루드비크의 계획을 도와주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루드비크의 여인 루치에와도 관련이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사건들이 일어나고 소소하게 묻히는 사건들도 적지 않습니다만, 눈길이 가는 이슈들을 들여다보기로 하겠습니다.
전체 스토리의 발단이며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농담’입니다. 진실만 이야기하는 세상이라고 한다면 일단 재미가 없고, 혹은 곤혹스러운 상황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듣는 이의 입장을 고려하여 말을 지어내는 경우가 선의의 거짓말(white lie)이라고 옹호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농담은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발전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에 윤활유가 될 수 있는 농담도 상황을 보아 적당하게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루드비크의 비극은 사랑하는 여성 마르케다가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산간지방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동안에 보낸 엽서 한 장에서 시작됩니다. 평소 장난기가 상당한 루드비크와 달리 마르케다는 진지함 그 자체였다는 것이 문제의 발단입니다. 1948년 2월 이후 진행된 사회주의 운동으로 체코사회는 해학이나 아이러니가 용인되지 않는 사회가 되어있었다는 것인데 루드비크는 내밀한 슬픔 같은 것이 많지 않아 사회변화를 심각하게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산간지방의 봉사활동이 주는 즐거움에 빠져 자신이 보내는 절절한 사랑의 메시지에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마르케다에게 충격을 던져 혼란스럽게 할 요량으로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루드비크.”라고 적어 보낸 엽서가 당의 감시망에 걸려들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쓴 편지를 누군가 감시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면 어떤 느낌이 들겠습니까? 근래 우리의 일상이 감시카메라에 담겨 제3자가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이 우리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사회안전망이기 때문에 용인하고 있는 것이며, 이 정보가 범죄의 수사 이외에 사용되지 못한다는 제약을 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농담>에 등장하는, 편지마저도 감시당하는 사회가 끔찍한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사로운 생각이 감시의 기준에 걸려 진실이 왜곡되어 해석되고 제대로 해명할 기회도 없이 그 개인을 파멸로 몰아넣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그렇게 변할 수도 있다는 위협에 오랫동안 노출되어왔다는 점입니다. 북한사회가 바로 그런 사회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사회를 동경하는 사람들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음을 경계합니다. 우리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일부 사회적 문제점들이 자신이 바라는 방향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남과 북이 대처하고 있는 분단상황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북한이 그토록 살기 좋은 사회라면 그곳을 떠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두 번째는 루드비크의 사랑에 대한 생각입니다. 전편을 통하여 그의 애정공세를 받는 여성은 세 사람입니다. 철없던 시절 연모했던 마르케다는 그의 삶을 탄광의 막장으로 몰아넣고서 홀연히 그의 삶에서 사라집니다. 인생의 막장과도 같았던 탄광에서 만난 루치에는 그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안겨 캄캄하기만 하던 삶에 한줄기 빛이 되는데, 그는 과연 루치에를 사랑하기나 한 것일까요?
“루치에를 발견하고서 나도 나의 운명을 다시 움직이게 만들었다.(123쪽)”고 적었을 뿐 아니라, “사랑이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결정적 계기들이 언제나 극적인 사건들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며, 처음에는 전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던 상황들이 그런 계기가 되는 수가 종종 있는 법이다.(139쪽)”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에 대한 그의 사랑이 진심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루치에를 신비로운 존재로 감추어 두는 편을 택한 것으로 보이며, 루드비크의 사랑에 대한 생각이 오락가락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말미에 이르러서야 코스트카에 의하여 밝혀지는 루치에의 과거의 상처를 루드비크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점을 설명하지 않은 채 남겨둔 것은 독자의 판단에 맡기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그리고 마지막 여인 헬레나, 남편 제마네크와의 결혼이 파경에 이른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녀를 유혹하여 제마네크에게 타격을 주겠다는 루드비크의 어쭙잖은 계획은 오히려 제마네크에게 들통이 나는 묘한 상황으로 루드비크를 비참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헬레나의 자살소동 마저도 희극적으로 마무리한 것은 루드비크의 치기에 가까운 사랑놀음에서 오히려 안쓰럽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쿤데라는 코스트카의 목소리를 통하여 이런 루드비크의 인생이 잘못되었다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영혼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용서를 모릅니다. 당신은 복수를 열망하지요. (…) 하지만 증오는 또다시 증오를 낳고 복수의 복수를 계속 불러올 뿐, 대체 무엇을 가져다주나요? 루드비크 당신은 지옥에서 살고 있어요. 다시 말하지만, 지옥에서요. 그래서 나는 당신이 가엾습니다.(407쪽)”
<농담>은 쿤데라가 프랑스로 망명하기 전에 체코에서 쓴 작품이라서인지 모라비아 토속음악과 ‘왕들의 기마행렬’이라는 토속문화로 대표되는 체코의 토속문화에 대한 작가의 자부심과 그것들이 변질되어 가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라비아는 와인과 전통공예로 유명한 지역이며 남부 모라비아의 중심이 되는 브르노(Brno)는 체코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슬라브코프(Slavkov)성을 중심으로 한 전쟁과 승리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밀란 쿤데라를 비롯하여 에드문트 후설,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레고르 요한 멘델과 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들이 바로 모라비아 출신이라고 합니다.
쿤데라가 그의 작품에서 고향의 모습을 자주 그리고 있는 것은 고향에 대한 자신의 향수를 담고싶어서가 아닐까요? <농담>에서 그리고 있는 다음 장면, “그때부터 나는 작은 들판들이 이어진 들길로 나가곤 하는 일이 점점 잦아졌다. 비탈 위로 홀로 들장미가 피어나는 그 들길로...(271쪽)”에 나오는 들판길은 <향수>의 “상사와 이야기하고 있는 도중에 그녀는 갑자기 섬광처럼 들판으로 난 길을 보았다.(향수 21쪽)”는 대목에 나오는 들판길과 묘하게 오버랩되는 느낌이 듭니다.
야로슬라프로 대변되는 전통문화에 대하여 적고 있는 부분에서 볼 수 있는 변화는, ‘왕들의 기마행렬’에서 왕으로 지목된 아들이 숨어버리는 사건과 기마행렬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과거 대단한 위용을 자랑했던 행사가 그저 형식만 갖춘 초라한 행사로 전락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작가의 마음으로 읽히게 됩니다. 그리고 모라비아 민속음악을 연주하는 모임에 루드비크가 참여하는 것으로 변질되는 문화마저도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뿐만 아니라 술집에서 열린 연주회가 민속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 취객들의 소란 속에 묻히는 안타까운 현실에 더하여 야로슬로프의 죽음으로 전통문화의 종말을 우려하는 쿤데라의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