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전집 6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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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시 읽게 된 것은 순전히 민음사와 조선일보가 같이 진행한 북콘서트 덕분이었습니다(http://blog.aladin.co.kr/761535117/5707234). 오래 전 읽으면서 ‘어렵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던지, 이야기 내용이 가물거리기에 다시 읽고서 북콘서트에 참석했어야 하는데, 미국 출장 때문에 겨우 시간만 맞출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도 진행을 한 영화평론가 이동진님과 문학평론가 강유정님께서 300명이 넘는 청중들의 마음을 휘어잡아 2시간여 동안 유연하고 매끄럽게 진행했다. 그러다 보니 단순하게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에 북콘서트를 통하여 두 분으로부터 들은 설명이 녹아들면서 이해의 폭이 넓어진 것은 좋은데, 오롯이 나만의 생각이 아닌 누군가의 생각이 혼재된 리뷰가 될 것 같습니다.

 

‘프라하, 그리고 4인4색의 러브스토리’라는 부제가 달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잘 알려진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화되었던 체코슬로바키아가 1968년 1월 당 제1서기에 오른 두브체크가 주도한 자유화운동으로 유명한 ‘프라하의 봄’이 8월 바르샤바조약기구의 5개 연합군의 침공으로 무너지는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날 북콘서트에서 두 사람은  “가볍게 읽으면 풍부한 텍스트를 정신없는 사각관계로만 납작하게 만들어내는 흔하디흔한 사랑놀음이 되지만, 제대로 읽으면 특수한 하나의 사랑 이야기로 사랑 전체의 진면목을 제대로 잡아내는 소설”이라고 정리하였습니다.

 

저자는 4사람의 주요 등장인물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사건과 그들의 사념을 세밀화 그리듯 따라가고 있다지만, 실제로는 토마시와 테레자 두 사람의 관계가 메인이 되며, 사비나와 프란츠는 토마시와 테레자 사이에 끼어들어 상황을 복잡하게 이끌어가는 역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즈음 사랑을 다루는 통속드라마의 유행인 4각관계의 전형이라고나 할까요>

 

우선 외과의사 토마시는 자신의 생활이 한 여인에 매이는 것은 불가하다고 믿기 때문에 다양한 여성과 인연을 맺는 바람둥이인데, 어느날 과장을 대신하여 지방병원에 파견나갔을 적에 카페에서 우연히 마주친 테레사와의 만남이 숙명이라고 믿게 됩니다. 이동진님은 이 두 사람의 관계는 그저 여섯 번의 우연이 겹쳐서 다져진 관계일 뿐이라고 정리하면서 굳이 숙명이나 필연이라는 용어를 피하고 말았는데, 제 경우는 사실 우연이란 한 번의 만남에 적용할 수 있는 단어일 뿐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두 번도 아니고 여섯 번의 우연이 겹친다는 것(사실은 신분상승을 노린 테레사가 주도한 우연이 몇 차례 있다고 본다면 숙명적인 관계라고는 볼 수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을 필연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화가인 사비나는 짧은 만남으로 끝나는 토마시의 일반적인 여성편력의 패턴에서 벗어나는 독특한 관계입니다. 물론 그 이유는 토마시와 테레사의 관계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로 배치한 관계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토마시와 사비나는 가끔 정사를 나누기는 하지만 이는 어쩌면 일상적인 일일 뿐 두 사람 사이에 애절한 사랑의 끈으로 이어져 있다는 느낌은 없습니다. 그것은 사비나의 애정관 역시 토마시와 상통하는 바가 없지 않은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프란츠는 사랑을 논함에 있어 지나치게 평범하여 특징이 없는 인물로 정리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어찌되었거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등장하는 네 주인공의 운명이 비극적으로 마무리 될 것이라는 느낌은 곳곳에 숨겨져 있는데, 그것은 신분상승을 꾀하면서도 토마시의 바람기를 견디지 못하는 테레사의 독점욕이 결과적으로는 토마시까지도 나락으로 끌어내려 죽음으로 이끌고 마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카페의 여급으로 지내면서도 기회를 만들고자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를 들고 다니는 테레사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어린시절의 상처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어 잠들 때도 하다못해 발목이라도 꼭 붙들어야 하는 강박관념으로 발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토마시, 나도 어쩔 수 없어. 나도 다 이해해. 당신이 날 사랑하는 것도 알고 당신의 바람기가 그리 심각하지 않다는 것도 알아…”라고 하면서도 스스로를 어쩔 수 없다는 것이지요.

 

토마스는 테레사와의 만남이 6번의 우연이 겹친 필연으로 받아들이면서 스스로 정한 테두리 안으로 테레사를 끌어들이게 되는데, 결국 소련군이 진주한 프라하를 탈출하여 스위스에 정착한 다음 그곳에서 만난 사비나와 토마시의 관계가 이어지는 것을 못견딘 테레사가 프라하로 훌쩍 떠나자 결국 토마시도 뒤따르게 되는데, 베토벤의 4중주의 마지막 악장의 모티프 “Muss es sein?(그래야만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Es muss sein!.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대바구니에 담겨 물에 띄워져 이집트 공주의 슬하에 들어감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는 모세의 경우처럼 테레사가 마치 대바구니에 담겨 자신에게 온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숙명적으로 그녀를 보호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쿤데라는 지금 인용한 베토벤의 4중주를 비롯하여 희랍비극 <외이푸스왕> 등을 적절하게 인용하여 이야기의 흐름을 견고하게 만드는 장치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입양한 잡종개 카레닌 역시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하는 중요한 소품입니다. 테레사가 들고 다닌 <안나 카레리나>에서 차용하여 암컷이면서도 ‘카레닌’이란 남성이름으로 붙인 개는 두 사람의 비극적 사고를 앞두고 개에서는 노환이라 할 암에 걸려 안락사를 맞고 있는데, 키우던 개와의 이별이 마치 사람 사이의 이별만큼이나 애틋하게 그리고 있는 것은 아마도 테드 케라소티가 <떠돌이 개와 함께한 행복한 나의 인생; http://blog.joinsmsn.com/yang412/12380779>에서 오마주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은 간혹 등장하는 ‘나’라는 존재입니다. 아마도 네 사람의 관계를 객관적으로 드려다 보는 입장에 있는 저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3자적 입장에서 등장인물을 묘사하고 설명하는 역할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쿤데라는 ‘나’를 빌어 자신의 작품관의 핵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소설 인물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처럼 어머니의 육체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의 상황, 하나의 문장, 그리고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거나, 본질적인 것은 여전히 언급되지 않았지만 근본적이며 인간적 가능성의 씨앗을 품고 있는 은유에서 태어난다.(355쪽)”고 정리하면서 “그러나 작가란 자기 자신 이외의 것은 말할 수 없다고들 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일반 작가들의 행태를 풍자하면서 “내 이력서 속 자아로부터 그 어떤 인물도 도출되지 않았다. 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나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들 모두를 사랑하며 동시에 그 모두가 한결같이 나를 두렵게 한다. 그들은 하나 같이 내가 우회하기만 했던 경계선을 뛰어넘었다. 나는 바로 이 경계선(그 경계선을 넘어가면 나의 자아가 끝난다.)에 매혹을 느낀다. 그리고 오로지 경계선 저편에서만 소설이 의물을 제기하는 신비가 시작된다.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에서 인간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355쪽)” 그래서 쿤데라의 작품이 어렵다고 이야기들을 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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