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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측과 논박 1 - 과학적 지식의 성장 ㅣ 현대사상의 모험 6
칼 포퍼 지음, 이한구 옮김 / 민음사 / 2001년 12월
평점 :
합리주의적인 관점에서 열린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옳다는 자신의 신념을 설명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통하여 칼 포퍼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고금을 통하는 방대한 분량의 자료를 검토하여 플라톤, 헤겔과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열린사회의 대척점에 있다고 보는 닫힌사회를 지향하는 대표적인 철학자들의 주장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1934년 발표한 <탐구의 논리>에서는 한 이론의 과학적 성격을 ‘반증가능성’을 기준으로 규정하였다는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현대 과학철학의 명제로 자리 잡게 된 반증가능성의 이론은 1963년 발간한 <추측과 논박>을 통하여 발전시켜 이 책은 그의 대표적 저서로 꼽히게 되었습니다.
예스24의 블로거 ‘루루의 책장’님은 이 책의 리뷰를 통하여 국내에 번역소개된 포퍼의 책을 두루 섭렵하였는데, 그 가운데 <추측과 논박>을 단연 압권으로 보았고, 포퍼의 대표저서로 한권만 꼽으라 한다면 이 책을 권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과학적 사실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을 때 논리적으로 냉철하게 판단하기 보다는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한국사회의 경향을 우려하였습니다. 그 예로 황우석교수 사태를 들어, “한국 사람들이 칼 포퍼의 반증 가능성 정신만 잘 이해하고 있었어도, 검증을 하지 않고 병원에 드러눕는 것이나 사이언스지의 권위에 기대어 회피하는 것이 ‘과학’과는 거리가 먼 신앙의 영역임을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하였습니다.
저 또한 황우석교수의 줄기세포조작사건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을 때 그 상황의 흐름 속에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지적입니다. [북소리]에서 오래 전 소개드렸던 <시민의 과학; http://blog.joinsmsn.com/yang412/12605547>을 통해서 과학과 관련한 사건이 자주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는 말씀과 함께, 이러한 움직임에 배태된 문제점이 무엇인지도 짚어본 바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저 역시 ‘루루의 책장’님이 지적한 것처럼 포퍼가 정리한 과학적 시각에서 사태를 냉철하게 지켜보는 훈련이 되어 있다면 감성에 휩쓸려 스스로 혼란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해봅니다.
<추측과 논박>은 ‘과학적 지식의 성장(The Growth of Scientific Knowledge)’이라는 부제가 의미하듯 역사를 통하여 인간이 과학적 지식을 축적해온 과정을 철학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 책은 과학 철학, 고대 철학, 칸트 철학과 자연과학, 변증법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 21편의 주요 논문과 강연문을 묶어 엮은 것입니다. 상권은 ‘추측’이라는 표제로 묶어 과학적 논리를 세우는 과정에 중심을 두었다고 한다면 하권은 ‘논박’이라는 표제로 묶어 과학적 논리가 성장해가는 과정을 살피고 있다 하겠습니다.
먼저 서론에 둔 글은 1960년 1월 영국 학술원의 연례 철학강좌에서 발표한 내용으로 ‘지식과 무지의 근원에 관하여’라는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과학이라는 학문의 성과로 축적되는 인간의 지식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어 이 책의 서론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서론에서 포퍼는 고전적 경험주의와 고전적 합리주의로 정리되는 영국과 대륙 철학계 사이의 오랜 논쟁거리인 지식의 궁극적 근원에 관한 관점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영국철학계는 모든 지식의 궁극적인 근원을 관찰에 두고 있는 반면, 대륙학계는 그 근원을 명석 판명한 관념에 대한 지적 직관에 둔다고 있다고 합니다.
스스로를 ‘경험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일종의 합리주의자이며, 또한 한 사람의 자유주의자이기도 하다’고 정의하고 있는 포퍼는 이 글을 통하여 고전적 경험주의와 합리주의의 차이점이 그들 간의 유사점에 비해 훨씬 적다는 사실과, 둘 다 모두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적었습니다. 포퍼는 직설적이고 명료한 논증과 광범위한 논의대상으로부터 핵심을 추출하여 문제를 제기하여 비판할 뿐 아니라 자신의 문제제기에 대한 반박에 대하여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다시 반박하는 적극적인 학문의 자세를 보여 주목받아왔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 플라톤 등 그리스 철학자들이 지식의 근원에 대하여 가졌던 생각으로부터 데카르트, 베이컨에 이르기까지 인식론의 전반을 살펴보면서, 저자는 지식의 근원에 관한 질문은, “지식의 가장 좋은 근거-가장 믿을 만하고, 실수하지 않게 하고, 의심이 나는 경우에 우리가 호소할 수 있는 최고 법정으로서 의지할 수 있고 의지해야만 하는 최선의 근거-는 무엇인가”라는 숨이 찰 정도로 긴 질문 대신에 “우리는 어떻게 오류를 검출하고 제거하기를 기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라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앞선 질문에서 보는 이상적인 근거는 존재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그 근원이 우리로 하여금 실수를 저지르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63쪽)
글 제목 ‘지식과 무지의 근원에 대하여’를 해제하면서 지식은 근원이 있다고 할 수 있겠으나, 무지의 근원이 과연 존재하겠느냐는 지적이 있었다고 글머리에서 밝힌 포퍼는 “우리의 지식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반면 우리의 무지는 필연적으로 무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의 무지의 주된 근원이기 때문이다.(70쪽)”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모든 지식은 인간적이라는 것, 즉 지식 속에는 우리의 오류, 편견, 몽상, 소망 등이 뒤엉켜 있으며, 우리가 비록 진리에 이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진리를 탐구하려는 노력뿐임을 시인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라도 단정하고 있습니다.
<추측과 논박>의 ‘추측’편은 첫 글 ‘과학: 추측과 논박’이라는 제목의 글에 이어 ‘철학적 문제들의 본성과 그 과학적 뿌리’, ‘인간의 지식에 관한 세 가지 문제’가 이어지며, ‘칸트의 비판과 우주론’ 그리고 ‘과학과 형이상학의 지위에 관하여’ 등이 이어지고, 마지막 열 번째 글은 ‘진리, 합리성, 그리고 과학적 지식의 성장’이라는 글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서론에서 지식의 근원을 논하고 있습니다만, ‘인간의 지식에 관한 세 가지 견해’에서는 이 문제를 더 깊이 파헤치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 견해는, 본질주의, 구조주의 그리고 추측, 진리 그리고 실재라고 설명하는 불확실성입니다. 갈릴레오 철학을 구성하는 본질주의는 합리적인 의심을 뛰어넘어 사물의 본질적 성질을 발견하는 것이 과학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정의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본질주의적 사고는 ‘사물의 숨겨진 본질을 발견할 수 없다는 구조주의적 과학철학자들에 의하여 부정되고 있습니다. 정리해보면, 본질적 실재의 세계 가운데 관찰 가능한 현상의 세계만 우리가 인식할 수 있고 이렇게 인식한 현상의 세계를 기술적 언어 또는 기호적 표현의 세계를 통하여 지식으로 축적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면 결과적으로 우리가 보는 본질이란 현상을 통하여 우리가 볼 수 있는 본질의 일부에 불과하고 과학은 이러한 현상을 구체화할 수 있는 계산규칙에 불과하다 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본질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검증할 수는 없지만 엄격한 비판적 시험에 회부될 수 있는 추측을 세우고, 이를 검증하여 반증하는데 성공한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볼 수 없었던 실재를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세 번째 견해가 새로운 지식을 축적하는데 있어 보다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로 돌아가라’는 제목은 처음에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려야 하겠습니다. 과거의 전통은 가져다 쓸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요즈음 세상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일까 싶어서 입입니다. 저 역시 자주 인용하는 내용입니다만, 전통적인 경험주의 인식론이나 전통적인 과학사 서술에서는 ‘모든 과학은 관찰에서 출발해서 서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이론으로 나아갔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베이컨의 철학적 사유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인데, 포퍼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초기 철학자들을 연구하면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을 연구하다보면 대담하면서도 매혹적인 사상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포퍼가 예로 들고 있는 탈레스는 “지구는 배처럼 물 위에 떠 있으며, 지진이란 물의 움직임으로 인해 지구가 흔들리는 것이다.(275쪽)”라고 했는데, 탈레스는 아마도 바다에 열려 있는 그리스가 지구의 본질이라고 보았을 것이며, 역시 지진이라는 현상을 관찰한 결과를 바탕으로 이와 같은 논리를 세웠을 것입니다. 따라서 땅이나 바다가 모두 지구라는 천체 안에 있는 현상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탈레스의 생각은 과학적으로 정확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지구상에 흩어져 있는 대륙이 지진을 동반하면서 이동하는 대륙이동현상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로 이해할 수도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포퍼는 베이컨 철학에서 말하는 관찰은 “관찰이 우리의 과학적 지식의 <참된 원천>이라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과학적 진술이 왜 참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포퍼는 고대 그리스 철학이 찬란하게 발전할 수 있었던 비밀은 바로 비판적 논의의 전통에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정 학파에서 단순하게 스승의 교설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비판적 토론을 허용하고 장려하는 전통이 그리스 철학을 발전하게 한 원동력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통을 통하여 이론의 창시자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이루어지고 변화와 수정을 통하여 새로운 사상이 세워지게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대목은 스승의 역할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만들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예전에 학교에 몸담고 있었던 것도 이유가 되었겠지만, 최근에 <은교>라는 영화를 보고서 마음 한켠에 찌꺼기처럼 남아 있는 그 무엇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은교>를 본 많은 분들은 노시인이 어린 은교를 통하여 새로운 작품세계를 열었다는 점에서 노시인과 은교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든 젊은 제자의 삼각관계에 시선이 더 주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 작품에서 고민해야 할 부분은 은교가 노시인에게 미친 영향보다는 스승과 제자사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문하에 두고 오랫동안 수발을 들게 한 제자에게 문재(文才)가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면 일찍 내보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우선 편하다는 이유로 거두었다가 세경이랍시고 통속 소설 한편 써 던져준 스승을 보면서 제자가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지 치명적 결말로 달려가면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결국 스승이 스승답지 못해서 잉태된 비극이 결말에 이르는 과정과 그 가운데 고민하고 무너지는 스승의 모습을 조금 더 세밀하게 그렸더라면 통속적인 분위기가 조금은 가시지 않았을까요?
글이 곁가지로 흘렀습니다. <추측과 논박>은 과학적 이슈가 대두될 때마다 몸살을 앓는 우리사회가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익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