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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질서론과 실재의 텍스트적 재현 ㅣ 내일을 여는 지식 어문 24
김경순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09년 8월
평점 :
아무래도 제가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하여 이 분야의 책을 논하기에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문학에 조예가 깊으신 분들이 보시기에 부족조차 논할 가치가 없다 하시겠습니다만, 형편이 저와 비슷하신 분들께서는 앞으로 저와 같이 인문학공부를 같이 하는 기회라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근년에 구조주의철학을 개괄한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http://blog.joinsmsn.com/yang412/11967086>를 읽고 구조주의가 무엇인지 눈을 조금 뜰 수 있었습니다. 마침 그들 가운데 라캉의 철학을 정리한 책을 읽을 기회가 있어 소개하려 합니다. 김경순박사의 <라캉의 질서론과 실재의 텍스트적 재현>입니다.
먼저 자크 라캉(1901~1981)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로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언어를 통하여 인간의 욕망을 분석하는 이론을 세웠는데, 인간의 욕망, 무의식이 말을 통해 나타난다고 내용이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라캉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재해석하여 명성을 얻었지만 결국은 프로이트주의를 그대로 따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가 새롭게 정립한 방법론을 많은 정신분석가들이 이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프로이트가 일반대중에 남긴 영향력은 엄청난 것이지만 현대심리학에 기여한 바는 크지 않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프로이트는 현대심리학에서 상용되고 있는 통제된 실험방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특정이론과 관련된 새로운 증거를 평가하는 방법은 언제나 데이터가 그 이론을 반증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는 ‘반증가능성 기준’은 과학발전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은 20세기 초반 과학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에 의하여 강조되어 왔습니다.
키이쓰 스타노비치는 <심리학의 오해;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01385>에서 프로이트가 현대심리학에 악영향를 미쳤다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가 인용한 하워드 가드너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참고하면 프로이트를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연구자들이 프로이트의 직관에 매혹되기는 하였지만, 어느 과학 분야도 임상적 면담과 회고적으로 구성된 개인사에 근거하여 구축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더구나 이 연구자들은 반증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 허위적 주장에 상당히 분개하였다.”
<라캉의 질서론과 실재의 텍스트적 재현>에서 우리는 라캉이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라는 세 범주에서 실재계를 중점적으로 성찰했다는 것을 읽게 됩니다. 김경순박사는 실재(real; 實在)란 존재하는 것과는 달리 재현할 수 없는 것, 죽음, 성의 문제를 나타낸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저자는 상징질서와 주체가 탄생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비재현적 재현을 의미하는 실재계에서 ‘오브제 a’의 역할 그리고 정신분석의 윤리학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브제 a’는 실재계적 응시․목소리인데 주체가 경험하는 기괴한 주체의 타자성으로, 그러한 응시는 상징계적 구조의 한계를 꿰뚫어보는 동시에 독자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주인담론, 히스테리담론, 대학담론 그리고 분석가 담론이라는 라캉의 네 가지 담론을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착각을 제공하는 대표적 지배기표와, 지식을 포함하는 기표고리 혹은 의미화 고리를 지칭하는 나머지 기표, 그리고 분열된 주체와 오브제 a 등의 네 가지 요소들의 관계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네 개의 요소들은 관계항을 형성하여 자리를 바꾸어 가면서 네 가지의 담론을 형성하게 됩니다.
주인담론은 상징계를 건설하는 제1담론으로 네 개의 관계항과 네 개의 위치가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에게 나는 나 자신의 주인이라는 사고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히스테리담론은 프로이트가 히스테리의 만족되지 못한 욕망과 동일시로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이는 최초의 상실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대타자에 대한 요구방식을 통해서 표현해야 합니다. 대학담론은 지식이 대리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로서 사회적 유대가 지식을 통해 오브제 a에 이르고자 하는 욕망이 생겨나기 때문에 형성됩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사람이 지식에 대한 보증인, 즉 지배 기표를 가지고 있다면 효과가 있다는 것이 숨은 진실입니다. 분석가담론은 주인담론의 역에 해당하는데, 정신분석학은 본질적으로 주인이 되려고 하는 지배에 대한 모든 시도를 전복시키려는 전복적 실제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라캉은 아버지의 역할과 어머니의 여성성과의 관계를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왕의 서사와 토템과 타부의 아버지 역할을 인용하여 분석하고 있습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프로이트적 해석은 거세(去勢)에 대한 불안이 리비도의 변형으로 위험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였는데 반하여, 라캉은 대상을 금지하는 법 의하여 존재하기 시작하는 오브제 a에 따라서 포기가 이루어지면서 불안으로 남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오이디푸스신화로부터 파생된 안티고네의 사례에 대한 저의 짧은 생각을 몇 차례 내보인 적이 있습니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부친을 살해하고 모친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자신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되고 나라를 떠나게 되자,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가 왕위를 두고 겨루다가 결국은 폴리네이케스가 패하고 아르고스로 도망가게 됩니다. 폴리네이케스는 아르고스의 왕 아드라스토스의 도움을 받아 테베를 공격하지만 결국은 두 사람이 전사하게 됩니다. 왕위에 오른 삼촌 클레온은 에테오클레스는 성대한 장사를 치러주지만 폴리네이케스는 반역자라는 이유로 매장을 허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시체에 손을 대는 자 역시 사형에 처할 것이라 선언합니다. 안티고네는 오빠 폴리네이케스를 매장하고 클레온과 대립하게 됩니다. 결국 안티고네는 죽고, 안티고네와 약혼한 클레온의 아들 하이몬과 왕비도 뒤따라 목숨을 끊는 비극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안티고네의 욕망의 원인이 되는 오브제 a는 주체로서의 안티고네에게 가족이라는 명분에 따라 최소한의 예우를 표하기 위하여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매장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를 금하고 있는 크레온은 대타자로서의 상징계를 대표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안티고네는 사라진 존재의 공백을 메꾸는 히스테리적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안티고네의 윤리적 행동은 크레온으로 대표되는 상징계 속에 내재하는 실재계적 공백으로서의 사물을 재현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와 그 가족들의 비극은 이미 신에 의하여 결정되어 있던 일이라고 신화는 전하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수 없는 피동적인 존재임을 전제로 한 해석이라는 점에서 필자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재해석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시각에서 본다면 가족이라는 명분이 국가라는 보다 커다란 명분에 앞설 수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즉, 폴리네이케스는 개인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하여 외국의 군대를 동원하여 조국을 침공하고 동족을 살상하는 일에 앞장선 것이니 가족이라는 명분보다는 국가라는 명분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크레온의 결정이 틀렸다고 단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서사적 텍스트에서 재현된 실재를 변증하는 사례로 토머스 하디의 소설<무명의 주드>에서 성 담론과 여성성을 논하고 있고, 히치콕감독의 영화 <사이코>에서는 상징화과정의 잉여 혹은 잔여로서의 실재계인 오브제 a의 예로서 응시 및 목소리를 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로야스감독의 영화 <암흑의 도시>에서는 정신분석의 정치성을 논하고 있는데, <암흑의 도시; http://blog.joinsmsn.com/yang412/4495836>를 보았던 기억을 바탕으로 저자의 분석을 따라가 보려 합니다.
저는 이 영화의 모티프가 되는 기억에 주로 관심을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 지구를 찾아온 외계인이 지구로부터 납치한 인간들을 거대한 우주도시에 감금하고 인간영혼의 본성을 분석하기 위한 실험을 하게 됩니다. 매일 밤 자정무렵 개인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기억들을 끄집어내고 이를 뒤섞어 다시 주입하는 실험을 반복하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일탈한 주인공 머독이 진실을 뒤쫓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김경순박사는 인간영혼의 발견이란 상징적 정체성을 초월하는 것으로, 라캉식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성의 ‘오브제 a', 즉 실재계적인 존재의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우주인들은 인간의 상징적 정체성을 끊임없이 변화시킴으로써 인간 주체 속에 상징화되지 않고 남아 있는, 기표로도 환원될 수 없는 것, 즉 인간영혼을 발견하고자 한다고 보았습니다.
프로야스감독은 영화를 통하여 진정한 정신분석적 의미의 정치적 행동을 방해하는 장벽은 상징적 권위에 의해 확립된 이데올로기적 지배임을 강조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데올로기란 하나의 사회적 현실인데 그 현실의 존재는 관계된 사람들이 그것의 본질을 모른다는 전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암흑의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어떠한 실험도 완벽하게 진행될 수 없는 것처럼, 우주인들의 실험과정 중에서 발생한 미세한 오차의 틈새로 주체가 오브제 a를 깨닫게 되는 순간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즉 이데올로기는 과거와 현재를 통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작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치적 가능성들을 가지고 있으므로, 절대적이지 못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주인들이 알고자 했던 인간의 영혼, 즉 인간 주체 안에 내재되어 있는 욕망의 대상이자 원인인 ‘오브제 a'를 풀어낼 열쇠가 바로 머독에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인데, 그것은 성공적인 이데올로기적 지배가 아니라 그것에 저항할 수 있는 실재계적인 능력이라는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예술작품은 아는 만큼 즐긴다고들 합니다. 제가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고 있는 것처럼 저자가 구조주의철학의 방식으로 한 해석을 읽으면서 새로운 시각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