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조나 레러 지음, 최애리.안시열 옮김 / 지호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읽고 있는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책에 강한 끌림을 느끼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신경과학자 조나 레너박사가 쓴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가 바로 그랬습니다. 지난 주말에 읽은 박완서 선생님의 산문집 <못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798700>에서 발견한 다음 구절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신경과학이라는 학문이 생겨나기도 전에 이미 뛰어난 작가, 화가, 작곡가, 요리사, 등 일급의 예술가들이 알아낸 진실들을, 신경과학을 전공한 저자가 그게 과학적으로 옳았다고 재확인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할 뿐 아니라 빛나고 멋있어 보였다.(227쪽)”

 

특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저자가 인용한 부분이 너무도 황홀했다고 한 선생님의 소감에 이끌려서 바로 주문했고 읽어냈습니다. 박완서선생님은 선물받고 석달이 넘도록 다 읽지 못했다고 고백하셨는데 아마도 이 책의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신경과학분야의 연구성과들이 이해하기에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도 저의 전공이 신경과학의 한 분야인 까닭에 조금은 읽기에 편한 점은 있었습니다.

 

먼저 이 책의 얼개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저자는 모두 여덟 명의 예술가 - 요리사도 예술가라 한다면 -들의 삶과 그들의 작품들에서 신경과학의 영역과 관련이 있는 것들을 추출해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신경과학적 연구에 의하여 증명되고 있음을 연구논문과 과학자들의 관련 자료들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드워드 윌슨이 <통섭; http://blog.joinsmsn.com/yang412/4895225>을 통하여 제시한 학문간의 경계를 뛰어넘으면 새로운 길이 보일 것이라는 주장을 한 것처럼, 인문학과 과학이 어떻게 상호보완적 역할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단적인 사례가 될 것 같습니다.

 

레너박사가 인용하고 있는 여덟 사람은 시인 월트 휘트먼, 소설가 조지 엘리엇과 마르셀 프루스트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 시인이자 소설가 거트루드 스타인, 요리사 에스코피에, 화가 폴 세잔,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입니다. 레너박사가 이들의 예술적 성과에서 추출한 키워드를 다시 정리해보면, 휘트먼은 ‘감정’을, 엘리엇은 ‘삶의 복잡성’을, 에스코피에는 ‘미각과 후각’을, 마르셀 프루스트는 ‘기억’을, 폴 세잔은 ‘시각’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청각’을 거트루드 스타인은 ‘언어의 의미’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버지니아 울프는 ‘자아’를 설명하기 위하여 인용하고 있습니다.

 

미각과 후각 그리고 청각과 시각 등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자극을 우리의 뇌가 수용하여 인식하고 기억하는 과정에 관한 신경과학적 연구성과와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어의 경우는 인식의 결과를 종합하여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위하여 공유하고 있는 소통의 방식으로 변환시키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어 어떻게 보면 척추동물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대뇌의 기본적 활동영역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감정이나 자아라는 주제는 인간에 고유한 정신활동에 관한 내용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아직 밝혀져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덟 사람의 예술적 성과 가운데 저자가 프루스트를 제목으로 정한 것은 아마도 저자의 전공과 관련된 개인적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저자는 기억을 연구하는 신경과학분야에서 연구를 했다고 합니다. 바로 <기억을 찾아서; http://blog.joinsmsn.com/yang412/10991633>를 통해서 소개한 노벨상 수상자 에릭 캔델교수의 실험실에서 기억이 저장되는 과정에서 프리온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사이박사와 함께 연구를 했다는 인연이 작용한 것 아닐까하는 억측도 해봅니다.

 

저자는 앞서 소개드린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을 제3의 문화운동으로 규정하면서도, 제3의 문화운동이 유용한 대화를 구축하는 대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과학을 그저 또 다른 텍스트 정도로 무시해버리며, 많은 과학자들은 인문학을 가망 없는 오류로 치부하고 있는 서글픈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저자는 영국의 소설가 이언 매큐언의 <토요일>이 새로운 움직임, 즉 제4의 문화운동의 시발이 될 수 있음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제4문학은 인문학과 과학 사이의 관계를 발견하려는 문화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최근에 읽었던 책 <융합이란 무엇인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790758>를 통하여 소개드렸던 융합의 개념과도 잘 통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제4문화는 “임의적인 지적 경계선을 무시하고, 구분하는 선들을 흐려놓으려 할 것이다. 그것은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자유로이 지식을 이식하며, 환원적 사실들을 우리의 실제 경험과 연관시키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334쪽)”라고 저자는 예고하였습니다. 저자는 결론을 통하여 “이 책이 예술과 과학이 어떻게 통합되어 비판적 이성의 범위를 확장해갈 수 있는지 독자에게 보여주려 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박완서 선생님께서 ‘거듭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 책’이라 하신 이유를 알 듯합니다. 저 역시 박완서 선생님처럼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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