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
비프케 로렌츠 지음, 서유리 옮김 / 레드박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실패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에 괴로워하는 분들 혹시 계신가요? 그렇다면 나의 과거 가운데 한토막을 잘라낸다면 나의 운명이 바뀔 것이라는 꿈을 꾸어보신 적은 계신가요? 만약에 누군가 당신의 꿈을 이루어준다고 제안하면 선뜻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이런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묵직한 울림을 남길 책이 있습니다. 바로 비프케 로렌츠의 장편소설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입니다. 청림출판사의 이벤트를 통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정말 다짜고짜 “지우고 싶은 과거가 있으십니까?”라는 질문을 과거보다는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는 “제가 저질렀던 모든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하며 살고 싶은데 세월이 무상한지 하나 둘씩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지웠으면 하는 기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죠. 그런데 막상 고르려니 콕 집히는게 없네요.”라고 적어서 당첨되었고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과거지우기라면 시간여행에서 흔히 저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이슈일 것 같습니다. 시간여행자는 기본적으로 방문한 시간대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규칙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백 투더 퓨처 3>에서 브라운박사는 “미래는 백지야. 자네가 직접 만드는 것이라네, 멋진 인생을.”이라고 마티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보니 인간의 기억을 끄집어 다른 사람의 기억에 심는 기술을 선보였던 알렉스 프로야스감독의 <다크시티; http://blog.joinsmsn.com/yang412/4495836>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자정이 되면 외계에서 온 생명체는 인간들의 기억을 주사기로 끄집어내 다른 사람에게 심는 실험을 하면서 인간의 기억의 본질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에서도 비슷한 장치를 끌어들였습니다. 잘 나가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생들과는 다른 삶의 궤적을 쫓고 있는 주인공 샤를로타는 다니던 대학도 중퇴하고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호프집 서빙이 본업이 되고 언젠가 부터는 스치듯 만난 남자를 집으로 끌어들이고는 다음날 아침 후회하는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잘못된 과거를 들어내면 인생행로가 달라질 것이라는 엘리제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 지워버리고 싶은 자신의 과거의 기억을 삭제하게 되는데, 저자는 기억삭제를 의뢰하는 사람의 기억뿐만 아니라 관련된 사람들의 모든 기억까지도 자동적으로 수정되는 아주 업그레이드된 기억, 아니 과거삭제술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처음 이 부분을 읽을 때는 역시 지우고 싶은 자신의 과거를 기억의 심연 아래 묻어버렸지만, 자신이 지우고 싶은 과거의 행적으로 인하여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잊고 살았던 모든 기억이 수면 위로 올라와 상황을 복잡하게 뒤섞어 버리는 이야기를 다룬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623266>가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등장인물들을 뒤섞어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만들고 적지 않은 사람들을 불행에 빠트리고 마는데... (스토리를 더 요약하다가는 스포일링이 될 것 같아 이 정도에서 멈추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젊기 때문에 생각이 여물지 못해 저지른 일이 나쁜 상황을 만들어간다는 점이 공통점인 것 같습니다.

 

어떻든 샤를로타는 과거를 지워버린 덕분에 젊어서 좋아했던 첫사랑과 결혼에 골인하게 되지만, 지워버린 과거를 대신해서 살아온 다른 과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저자의 의도적인 불성실함 때문에 일상이 실수연발이 됩니다. 결국은 자신이 지우고 싶었던 과거로 인하여 자신이 미처 모르는 주변사람들에 관한 진실이 튀어나오고, 과거를 지워준 엘리제의 지워낸 과거의 재활용으로 인하여 예상치 못한 꼬임이 발생하게 된다는 설정은 독특하면서도 새로 엮인 매듭을 풀어내는 고리로 작용하게 됩니다.

 

이야기의 전개는 군더더기 없이 장면이 잘 연결되어 흥미가 에스컬레이션됩니다. 그래서 단숨에 읽어낼 수 있습니다. 특히 옮기신 분의 말씀을 인용해보면, “잘못된 결정이나 실수들을 내 이력에서 깨끗하게 싹 지워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인생을 새로 시작할 수 있다면 행복할까?”라고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만, 이미 “내 인생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의미가 있다.”고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저자가 샤를로타의 어머니의 말씀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는 점을 콕 짚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네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있는 충분한 나이야. 네 인생이라고. 너 말고 네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367쪽)” 그렇죠. 제가 살아낸 삶을 지워버린다고 지워지겠습니까? 그러니까 순간순간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정말 사족입니다. 샤를로타가 일하고 있는 ‘드링크스&모어’라는 이름의 술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모어는 안주에 관한 자유분방함을 강조하는 설명이 있습니다만, 제가 아는 안국동에 있는 민속주점에는 ‘주모마음대로’라는 안주메뉴가 있습니다. 가격은 정해져 있지만 무슨 안주가 나올지는 모르는 그야말로 주모마음대로 제공하는 안주라는 것입니다. 바로 드링크스&모어의 ‘모어’에 해당하는 개념일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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