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포크라테스는 모른다
맥스웰 그렉 블록 지음, 박재영 옮김 / 청년의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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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타운대학교 로스쿨의 맥스웰 그렉 블록교수의 <히포크라테스는 모른다>를 읽었습니다. “히포크라테스 신화(The hippocratic myth)”라는 원제목을 ‘히포크라테스는 모른다’고 소개한 것은 블록교수가 이 책을 통해서 주장하는 내용들이 히포크라테스는 예상하지 못했을 의료환경의 변화에 따른 의학의 위치 재설정과 관련된 것들이며, 우리나라 의료계도 당면하고 있는 과제일 수 있다 싶습니다.


이 책을 번역하신 박재영 선생님은 역자서문에서 “의사들은 ‘히포크라테스’라는 말만 들어도 뭔지 모를 부담을 느끼고, 많은 시민들은 인술을 베푸는 의사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개탄한다. 의사들은 의료제도가 잘못됐다며 불만을 터트리고, 시민들은 의사들의 냉정함과 탐욕을 비난한다. 그 와중에 의료비 급등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까요? 저자는 의사들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외면하고 있다고 말씀하시지만 의료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의 일부를 확대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또는 그 책임이 꼭 의사들에게만 있는 것일까요?


블록교수는 사회가 복잡해지고 의학의 능력이 커지게 됨에 따라 의사들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요구가 확장되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의학을 치료 이외의 목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옳지 못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어 현대의학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담론자체를 부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의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논의의 물꼬를 트기 위하여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충돌하고 있는 의료현장의 문제들을 골랐다고 합니다. 열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건강보험이 적용되고 있는 상황에서 의사의 진료범위에 관한 내용과 고문, 사형집행 등과 같이 비의료의 영역에 의사들이 참여하는 행위에 대한 의료윤리적 타당성 등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블록교수가 제기하고 있는 화두가 생소한 것은 아닙니다. 하버드대학의 아툴 가완디교수 역시 2007년에 발간한 “Better: A Surgeon's Note on Performance”(우리나라에는 2008년 ‘닥터, 좋은 의사를 말한다’라는 제목으로 번역 소개되었습니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0272224)에서 건강보험제도 아래서 의료가 가지는 한계, 즉 박재영선생님 말씀대로 의사들이 진료현장에서 무엇에 휘둘리는지, 그리고 사형제도에 참여하고 있는 의료인들의 입장에 대하여 나름대로 상세한 데이터를 인용하여 문제를 제기한 바 있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어머니가 말기암으로 호스피스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혈소판제제를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상황에서 보건의료정책결정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를 치료하는 의사들이 비용절감을 위한 노력에 동참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프고 두려울 때, 의사들이 우리 편이 되어 우리 곁에 있어 주기를 원한다. 우리는, 결과가 어찌되건, 우리의 의사들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잘 지켜주기를 원한다.(7쪽)”고 속내를 털어놓고 있습니다.


저자가 의사들이 보험회사의 입장을 대신하여 비용을 절감하기 위하여 유익한 치료를 자제하는 것 아닌가 의혹의 눈길을 보내면서도 환자들의 신뢰에 커다란 흠집을 내지 않으면서 의료비를 통제할 수 있는 방안을 논하고 있는 것과 모순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궁내막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례에서는 적극적인 수술로 병소를 제거하는 시술을 보험에서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도 합니다. 환자는 시술을 통하여 증상이 개선되는 효과를 얻었지만, 이 방법은 보험회사에서 규정한 진료행위로 인정되지 않아 일단 자비로 시술을 받고 보험회사가 관련 비용을 지불하도록 법원에 판단을 구하는 모험을 한 결과 승리를 쟁취했다는 것입니다.


그밖에도 충수돌기염의 진단에 필요한 초음파검사를 인정하지 않는 규정 때문에 천공이 발생하여 위급상황을 맞은 사례, 임신으로 오인된 융모암의 사례, 비용-효과성을 고려하여 적절한 검사를 시행하지 않았던 뇌종양 사례 등을 인용하면서 의학이 한정된 자원을 지키기 위하여 환자의 생명을 구할 기회를 은밀하게 침해하는 것은 아니냐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특히 말기암환자에서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건강보험의 재정이 효율적으로 사용되도록 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곳에서 일하고 있는 저로서도 답변이 쉽지 않은 사례들이라 생각됩니다. 최근 많이 인용되고 있는 근거중심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사례들에 적용된 시술이 근거를 입증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성공사례를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급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저자가 이런 개별 사례를 인용하여 현대의학이 당면하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입장, 즉 ‘환자에게 위해를 가하지 말라’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정신을 위배하여 충분한 진료를 제공하지 않는 점을 지적하는 한편, 제한된 의료자원을 공정하게 배분하는 원칙을 천명하고 있는 점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특히 저자는 지난해 12월 3일 서울에서 열린 2011 KHC (Korea Healthcare Congress)에서 ‘히포크라테스의 고민: 의료서비스가 배급의 대상인가’를 주제로 한 기조연설을 통해 “의료비용 증가의 주요인으로 고가장비를 통한 신의료기술 사용을 꼽으면서 이에 대한 접근성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피력했다.”고 합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442275). 정말 의료비가 빠르게 상승하는 책임이 의료계에만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앞서 소개한 아툴 가완디교수가 “보험은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도덕적 해이’의 온상이기도 하다. 돈은 딴 사람이 내고 우리는 아이를 살리는 데 얼마가 들었는지 얼마가 청구되었는지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라고 한 말을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의료서비스를 제공받는 환자입장에서는 최소의 비용으로 최선의 진료를 받아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다는 볼멘소리도 있습니다. 공공부조와 민영의료가 공존하는 미국의 보건정책담당자들은 캐나다, 우리나라에서 운용하고 있는 단일보험자체계가 관리운영비를 절감하는 등 효율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원의 한계성을 고려한다면 환자가 원하는 다양한 수준의 의료서비스 제공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점도 고려되어야 하겠습니다. 저자는 의사들이 보험재정의 덫 때문에 필요한 서비스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하는 분배자로서 악역을 담당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환자를 돕되 해를 주지 마라’는 구절이 현대의 생명의료윤리의 네 원칙 가운데 ‘선행의 원칙’으로 정리되어 금과옥조처럼 존중되고 있으나, 사실은 ‘악행금지의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 현실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히포크라테스 시대에도 ‘질병이 위중하여 의학이 도움을 주지 못하는 환자에 대하여 치료를 거부하는 것’이 윤리적이라는 주장이 논의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 주제입니다. 이라크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이락크군 포로를 학대한 사건이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포로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의사들이 동원되었던 것이 뒤에 밝혀져 논란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은 한국전쟁 때 포로로 잡힌 미군들이 적국의 심리전에 말려 미군의 전쟁참여가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선언을 했던 사건이 교훈이 되었다고 합니다.


포로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수준을 넘나드는 심문과정에서 의료자문을 하거나 심리적 기법을 자문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과연 ‘환자에게 위해를 가하지 말라’는 전문가로서의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임에 틀림이 없어 윤리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 과정은 의료행위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의사로서의 의무를 지킬 이유는 없다는 해석을 내리기도 하지만 선서에서는 “나는 어떤 요청을 받아도 치명적인 약을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것이며 그에 대해 조언도 해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어, ‘약’을 의사로서 배워 익힌 ‘의학적 지식’으로 해석하는데 크게 무리가 없다 하겠습니다.


또한 의학의 의료이외의 영역에 적용하기는 의학자의 전문적 자문이 필요한 사법적 판단영역이 있습니다. 의학적 판단의 대상이 자문결과에 따라서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형집행에 의료인의 참여범위가 점차 확대되고 있는 점도 논의하고 있습니다. 사형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미국에서는 총살로부터 교수형, 가스실, 전기의자 등을 거쳐 지금의 독극물을 주사하는 사형방법이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사형방법이 이처럼 변하게 된 배경은 형을 받는 사람의 고통을 최소화하려는 윤리적 고려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독극물주사의 경우 사망을 확인하기 위하여 배석했던 의료인이 집행과정에 개입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의사윤리의 저촉여부가 쟁점이 된 것입니다.


건강보험체제 안에서의 진료의 범위를 비롯하여, 군사, 사법 등, 전통적 의료영역 이외의 분야에서 요구되는 의학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자리매김이 필요하다는 것을 공감하게 되었고, 앞으로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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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1-09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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