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문학에 대한 우리사회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학 분야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고 있는 의학지식의 양에 눌리는 탓인지 인문학에 대한 작은 관심의 촛불조차도 켜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한국 의학의 이러한 모습을 콕 짚어 요약한 내용을 조루주 깡귀엠의 <생명과학의 역사에 나타난 이데올로기와 합리성>을 소개하는 글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 의학은 묘한 역설에 빠져 있다. 그것은 현대 의학의 자기규정이나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분명히 특정한 철학적 입장 위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학은 철학과는 무관한 학문처럼 생각하는 역설이며, 또한 현대 의학의 발전은 오늘 진리로 여겨지던 사실이 내일은 다른 것으로 대치되는 지극히 역사적인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나 오늘의 진리를 불변의 진리로 절대화하는 오류에 쉽게 빠져드는 역설이다.”
생명을 다루는 학문으로서의 의학이라면 그 안에서 생명에 대한 깊은 고뇌가 기술발전에 선행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술발전이 눈부신 속도로 선도하고 있는 까닭에 미처 생명에 대하여 고뇌할 시간을 내지 못하고 허덕이는 우리의 자화상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근세에 이르기 전까지만 해도 동서양의 의학 수준이라는 것이 그만그만하였던 것이고, 오히려 동양의학이 보다 합리적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 것 같습니다. 심오한 동양철학에 기반을 둔 한의학이 질병을 치료하는데 있어 통합적 접근을 하고 있어 우수한 측면이 크다고 보는 한의학계의 주장도 있습니다만(http://blog.joinsmsn.com/yang412/12460282) 과연 동양의학의 발전을 위한 철학적 고뇌의 산물이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서양의학이 현대의학으로 발전해오면서 관련이 있는 과학분야에서 이룩한 성과들을 의학에 녹여넣는 작업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과 의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그 본질을 대한 깊은 철학적 사유가 있었다는 점은 흔히 간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조루주 깡귀엠은 철학을 전공한 다음에 의학을 전공하고 철학분야에서 활동한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과학과 철학, 의학과 철학의 관계를 깊이 천착하였는데, 당시 프랑스가 임상의학을 중심으로 하여 유럽의학을 선도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도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프랑스의 의학철학은 의학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의학의 생성과 변천과정에 대한 역사적 성찰이 결합하여 깊이 있는 반성을 하였고, 생기론을 중요한 요소로 하여 실증주의적 전통을 이어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생명과학의 역사에 나타난 이데올로기와 합리성>은 깡귀엠이 발표한 글들을 책으로 묶은 것으로 제1부에서는 19세기 과학과 의학의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제2부에서는 19, 20세기 생물학적 합리성을 성취해온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라는 단어에 다소 민감해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브리태니커사전에 따르면 “이데올로기(Ideologie)란 이론과 실천의 양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회·정치 철학의 한 형태로, 세계를 설명하고 변화시키는 것을 뒷받침하는 관념체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기에 철학자 A. L. C. 데스튀트 드 트라시가 주장한 '관념의 과학'의 약칭으로 처음 소개하였다고 합니다. 관념의 과학은 인간정신에서 편견을 몰아내고 이성을 복권함으로써 인간에 봉사하고 구원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조루주 깡귀엠이 중요하게 생각한 ‘과학적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제1부의 글을 여는 첫문장으로 던진 질문에 대하여 깡귀엠은 데스튀트 드 트라시를 인용하여 “이데올로기란 관념의 생성에 대한 과학으로 그 목표는 관념들을 자연현상과 같이 다루는 것이며, 살아있는 유기체이자 감각을 가진 인간이 자연환경과 맺는 관계를 표현하는 것(42쪽)”이라 정리하였다. 이데올로기란 원래 인간이 현실에 대한 관념을 획득하는 자연과학을 의미했으나, 마르크스에 의하여 현실에 대한 진정한 관계를 알지 못하게 된 어떤 상황에서 유래된 모든 관념의 체계를 의미한다는 개념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입니다. 깡귀엠은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계급에 대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같이 허위의식은 아니며 허위과학도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깡귀엠은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존 브라운의 <의학원론>에 담긴 한계를 설명하면서 의학적 이데올로기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 주목을 받던 병리학, 생리학, 약리학 그리고 미생물학 분야의 성과들도 정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클로드 베르나르가 생리학을 과학적 의학의 토대를 이루는 기초과학으로 옹호하고 입증하려는 노력을 의학적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적고 있습니다. 또한 마장디가 소개한 실험의학의 의의를 소개하고 있는데, 생리학 분야를 비롯하여 약리학분야에서의 실험의학이 결과적으로는 서양의학이 현대의학으로 발돋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제2부의 주제가 되고 있는 ‘합리성’은 이데올로기의 상대개념으로 깡귀엠이 제시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깡귀엠에 따르면, 생명과학에서의 과학적 이데올로기가 생명체의 외부에서 부과되는 외적 규범이고, 그 합리성은 생명체 자체가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내적인 규범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깡귀엠이 제2부를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쌓여진 생물학적 조절개념을 인용하고 있는 것은 ‘합리성’이라는 화두를 논의하기 위함이라 생각됩니다.
근세에 이르기까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의료계의 노력은 통상적으로 ‘써보니까 듣더라’하는 임상경험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통의학이 아직도 전승되어오는 의학서에 기록되어 있는 치료법을 중심으로 운용되고 있고, 일부에서 새로운 처방을 개발하여 임상시험을 거쳐 실용화하려는 노력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반면 현대의학에서는 질병이 일어나는 기전을 추구하고 밝혀진 기전을 바탕으로 하여 치료법을 개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천연물질에서 추출한 약제가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곧 이를 바탕으로 합성하기도 하며, 이제는 질병을 유발하는 유전자를 건강한 유전자로 바꾸어 넣는 치료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치료법을 개발해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치료제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작용하는가 하는 확인하는 유효성시험이나, 개발된 치료제가 치료효과는 물론 독성을 가지고 있어 부작용을 나타낼 가능성까지 검증하는 안전성시험 등 동물실험과 임상시험 등을 통하여 철저하게 검증하게 됩니다. 깡귀엠은 의학의 영역에서의 과학적 접근 방식을 ‘의학적 합리성’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학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정신이야말로 서양의학을 오늘날의 현대의학으로 변모시키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는 것을 깡귀엠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학적 합리성은 근대 서양의학의 가장 큰 특징을 이룬다. 르네상스 이후 새롭게 발달한 해부학적 지신을 임상적 지식과 결합한 파리임상의학파, 병리학을 생리학에서 연역하려 한 클로드 베르나르의 기획, 그리고 병원성 세균의 발견과 이를 죽이는 항생제의 개발로 완결되는 병인설과 치료의 패러다임은 근대 이후 서양에서 확립된 의학적 합리성의 대표적인 사례이다.(194쪽)”
깡귀엠이 과학적 이데올로기론을 내세운 배경에 대하여, “과학적 이데올로기론은 어찌 보면 과학의 담론을 손쉽게 이데올로기로 환원시키려는 ‘부유한 사회의 약화되거나 빈곤한 마르크스주의’인 사회구성주의로수터 과학적 담론을 지키기 위한 시도(192)”로 설명하신 여인석교수님의 후기에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제2부의 말미에서 언급된 생명체가 환경과 맺는 관계에 대하여 보다 발전된 논지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생명은 물질의 행동이다 (…) 그것은 기존 질서의 유지를 토대로 한다.(157쪽)”는 슈뢰딩거를 인용한 부분과, “생명이 생명체를 구성하는 요소 전체를 붙잡아두는 단순한 관계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은 생명에 대한 거짓된 개념을 만드는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생명은 요소들을 움직이고 운반하는 동력이다.(158쪽)”라는 퀴비에의 말을 보다 상세하게 풀어 설명을 해주었더라면 하는 점에서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현대의학이 발전의 토대를 갖추게 된 프랑스 의학계에서 의학철학이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조금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