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죽는다는 것 - 개정판
야마자키 후미오 지음, 김대환 옮김 / 잇북(Itbook)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15년 전 쯤의 일입니다. 치매에 대한 기획취재를 지원하기 위해서 KBS TV취재팀과 함께 미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인터뷰 대상을 섭외하고 인터뷰를 지원할 뿐 아니라 인터뷰 내용을 번역하는 일까지 일인 몇역을 했는지 헤아리기도 어려운 여행이었습니다. 당시 인터뷰를 한 분이 자신이 쓴 책을 건네주어 받았습니다. 눈물에 관한 책인데 읽어가다 보니 일반인이 읽어도 재미있겠다 싶어 번역을 해서 몇몇 출판사와 접촉을 했지만 별반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출간된 지 10년이 넘은 탓이 최신지견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개정판이 나온다면 고려해보겠다는 것이었지만, 원저자는 개정판을 낼 뜻이 없었습니다. 번역한다고 공연히 헛힘만 썼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번역한 내용의 일부가 방송소재로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작가가 번역원고를 인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했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느닷없이 옛날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이유는 야마자키 후지오 선생이 쓴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을 읽으면서 당시 번역원고출판을 거절당했던 생각이 나서입니다. 이 책을 번역하신 김대환님의 번역후기를 보면 1990년에 처음 출간된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을 번역하여 우리나라에 소개한 것이 2005년이었는데, 이번에 개정판을 내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번역 원본은 여전히 1990년에 발표된 것으로 되어 있어 후지오 선생이 원본을 가필보완한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도 20년 전인 1990년의 69.8세에서 2010년에는 79.4세로 10년이나 늘어났습니다. 또한 노령화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국가로 꼽히고 있습니다. 평균수명이 급속하게 늘어나면서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암환자발생 역시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나라 의료계의 암환자를 치료하는 의료수준이 세계정상급에 진입하여 이제는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해내는 위치에 이른 효과가 평균수명연장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당연히 암환자를 치료하는 기본틀에도 많은 변화가 있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면서 후지오 선생의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에 담긴 이야기들이 우리나라 의료계의 현 상황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먼저 책의 전편을 통하여 보면, 이 책이 저술될 당시 일본 의료계에서는 암환자가 죽을 때까지 병명을 감추는 것이 일반적인 흐름이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제 가물거리는 기억으로도 우리나라에서는 당시 환자에게 병명을 알려주고 치료에 적극 동참하도록 요청하는 의사들이 적지 않았다고 생각되며, 지금은 대부분의 의사들이나 환자들도 자신이 암이라는 사실을 직접 확인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암에서 수술, 항암치료, 방사선치료, 면역요법, 유전자치료 등 다양한 치료법을 적용하고 있어 이제는 암이 불치의 병이라기보다는 만성질환으로 다루는 경향도 있기 때문입니다. 즉 시대의 흐름과 동떨어진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건강보험공단을 비롯하여 다양한 기관에서 실시하는 정기검진을 통하여 암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게 되면서 손을 쓸 수 없는 말기암의 빈도가 줄어드는 것도 중요한 요소가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이 소개될 당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고 싶다면 절대 병원에서 죽지 말라(292쪽)”고 소개했다고 하는데, 사실 우리는 죽음을 집에서 맞고 장례를 집에서 치루는 전통을 지켜왔습니다. 제가 인턴으로 병원근무를 시작할 무렵 만해도 병원에서 치료받던 환자들이 죽음에 이르게 되면 집으로 모셔가겠다는 보호자의 요구 때문에 인턴선생이 손으로 인공호흡을 시키는 백을 일분에 20회씩 쥐어짜면서 앰뷸런스로 환자집까지 다녀와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파트가 늘어나면서 아무래도 번잡한 장례를 집에서 치러내는 것이 어렵게 되면서 장례식장을 이용하는 것이 대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병원장례식장의 경우는 그 병원에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공간도 내기 어려워 오히려 임종 무렵에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는 역설적인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후미오 선생은 호스피스에 관심이 많다고 하는데, 아마도 호스피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이기 위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집필을 하셨다고 보여집니다. 존엄사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의미없는 연명이 오히려 환자의 안녕과 존엄을 무너뜨린다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면서 호스피스에 대한 사회적 관심 역시 커지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재택간호라는 개념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는 얼마 전에 읽은 <애도하는 사람; http://blog.joinsmsn.com/yang412/12263003>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여전히 장례를 집에서 치루는 경향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건강보험 체계의 요양병원과 요양보험이 지원하는 요양시설이 호스피스에 준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말기 재발암, 전이암 환자들이 남은 삶을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새로운 개념의 병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276586).

후미오 선생은 의과대학을 갓 졸업한 인턴선생이 죽어가는 환자를 대상으로 기관 내 삽관을 실습했다는 믿을 수 없는 내용을 고발(?)하고 있습니다.(38쪽) 의사로서 환자를 실험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제 경우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응급실에서 근무를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 기관 내 삽관을 해야 되는 환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선배님의 조언을 들어가면서 별 어려움 없이 성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기관 내 삽관을 연습할 수 있는 장비가 개발되어 의과대학 학습과정에서 익힐 수 있다고 합니다. 공연히 의료계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키울 수 있는 사족에 불과합니다.

장례를 치르려면 의료인이 사인을 기입한 사망진단서를 관할 관청에 제출해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사망진단서를 확실하게 밝혀내지 않으면 사망진단서를 끊어드릴 수 없습니다.(49쪽)”면서 병리해부(부검이라는 명칭으로 일반화되어 있습니다)를 강압적으로 요구하는 의사가 있다는 고발도 있습니다. 동양권에서는 돌아가신 분의 몸에 칼을 대는 행위가 돌아가신 분을 두 번 죽이는 것이라 해서 거부하는 전통이 오래동안 자리잡아 왔습니다. 물론 최근 들어 보험과 관련하여 혹은 죽음의 원인을 밝혀야 수사에 도움이 되는 변사사건 등처럼 부검이 이루어지는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사실 현대의학이 여기에 이르게 되는데는 르네상스 이후에 활발하게 이루어진 부검이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는 것이 일반화된 시각입니다. 하지만 영상의학을 비롯하여 다양한 검사법들이 개발되면서 사망원인을 규명할 수 있게 되면서 이들나라에서도 사망후 부검율이 현저하게 낮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부검에 드는 비용은 보험에서 지원되지 않는 나라일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물론 최근 들어 정확한 진단이 요구되는 치매와 같은 신경계질환의 경우는 부검하는 사례가 늘고 있기도 합니다.

후미오 선생이 읽고 감동을 받았다는 엘리자베트 퀴블러 로스박사의 <죽음과 죽어감>은 저도 읽은 바 있습니다만, 후미오 박사처럼 ‘의사나부랭이’로 스스로를 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 자신이 평생해야 할 의무를 가진 직업에 대하여 나부랭이로 생각하는 후미오 선생이 오히려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환자의 “호흡이 멈추고 심장이 정지하려고 하자 내내 그때를 기다리고 있던 의사들이 ‘드디어 나설 때군,’하고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재빨리 인공호흡을 개시127쪽)”하는 보여주는 진료를 하는 모양입니다. 사망이 임박한 환자에게는 인공호흡도 고통일 뿐입니다. 가족들을 비롯하여 환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분들이 참석한 가운데 평안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훌륭한 의료행위라 생각합니다. 후미오 선생의 말처럼 “주역은 죽어가는 환자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은 가족이나 친지들이어야 하기 때문(130쪽)“입니다.

하지만 꼭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연장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역시 제가 인턴 때의 일입니다만, 응급실에 실려온 젊은이의 심장이 멎었는데 가족들은 아직도 병원에 도착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심폐소생술을 실시하고 강심제를 투여하면서 가족들이 도착할 때까지 심장박동과 호흡을 연장하여 가족들이 작별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지금도 잘 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끝으로 환자를 진료하는 의료인이 환자와 감정적으로 연결되는 것에 대하여 상반된 견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환자의 치료와 관련하여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는 환자의 용태만을 염두에 두고 판단해야 하는데 감정이 개입되면 판단이 흐려질 수 있다는 논리도 있습니다. 환자와 직접 대면한 경험이 인턴 때 밖에 없습니다만, 응급실에서 그리고 병실에서 담당하던 환자가 하룻사이에 4명이나 유명을 달리한 날이 있었습니다. 그날은 정말 허탈감 때문에 일할 의욕조차 나지 않았는데, 과장님께서 아무래도 고사라도 지내야 할 모양이라고 하시면서 의료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별별 상황을 다 만나게 되니 지나치게 감정에 빠져들지 말라는 말씀을 해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자신이 돌보던 환자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옳겠습니다만, 그 죽음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고 자책을 한다면 자신의 정신건강에도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될 것 같습니다.

리뷰가 너무 길어졌습니다.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에 대하여 지나치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질 이유는 없습니다. 자신의 생각에 따라서 형편에 맞게 죽음을 맞으면 되는 것입니다. 병원은 어떤 경우도 환자의 생각을 존중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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