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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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도 아라타의 <애도하는 사람>은 예스24 블로그 이웃이신 슬로우 리더/라이터님의 이벤트를 통해서 받게 된 책입니다. 몇 가지 책들을 선택할 기회가 있었지만 제목이 주는 강렬한 이미지에 끌리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죽음을 철학적으로 완성한 그는 진정한 구원자>라는 리뷰 제목을 달 정도로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와 공감하고 싶어 하셨을 것 같던 슬로우 리더/라이터님의 뜻이 담겼기 때문이 아닐까요?

누군가 생면부지의 사람이 와서 고인에 대하여 “그 분은 누구에게 사랑받았습니까? 누구를 사랑했습니까? 누가 그 분에게 감사를 표한 적이 있습니까? 그분이 누구에게 감사를 표한 적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떤 생각이 들 것 같습니까? 그 사람이 당신의 설명을 듣고 독특한 자세를 취하면서 고인에 대한 애도의 말을 전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 것 같습니까? 혹시 맛이 살짝 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다음 국어사전에 따르면 애도(哀悼)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함’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자신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다시 볼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기 마련입니다. 한편 자신과 직접 인연은 없었지만 주위 사람이 누군가의 죽음으로 슬퍼하고 있다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위로의 이야기를 건네기 마련입니다. 명복(冥福)이란 말 그대로 ‘죽은 이가 사후에 받게 될 복덕’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혀 모르는 사람이 와서 명복을 비는 것이 아니라 애도한다고 한다면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애도하는 사람” 사카쓰키 시즈토는 텐도 아라타가 세상에 내놓은 특별한 사람입니다. 시시껄렁한 삼류잡지 기자인 마키노 고타로와 시즈토의 어머니 사카쓰키 준코, 그리고 남편을 살해한 여인 나키 유키요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세 사람을 통해서 평범한 회사원이던 시즈토가 죽은 이를 찾아 애도하는 구도의 여행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면 시점에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직접 혹은 가까이 있던 사람이 어느날 곁에서 떠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마련입니다. 아무래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렸을 적부터 시작되는 일일지 모릅니다. 제 경우는 중학교 2학년 때 할머니께서 간암으로 고등학교 때는 동급생이 사고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는 증조할머님께서 치매로, 대학에 들어가서는 외할머니께서 중풍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교통사고의 현장을 목격한 적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어렸을 적에 만난 죽음이 특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즈토 역시 어렸을 적에 근친의 죽음을 만나게 되고 창밖에 서있는 나뭇가지에 둥지를 틀었던 직박구리 새끼의 죽음을 만나면서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을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특히 직박구리 새끼의 죽음을 마음에 담겠다는 뜻을 어머니에게 보여주면서 그의 애도의식의 전형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른손을 둥지가 있는 하늘을 향하고 왼손은 새끼가 떨어졌던 땅을 향한 다음, 두 손을 가슴 앞에 가져와 심장으로 밀어 넣듯 포개는... “여기에 넣어둘 거야 … 잊지 않도록, 이 아이, 여기에, 넣어둘 거야. 이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살았다는 걸 … 내 안에 넣어둘 거야.(124쪽)”

영화 ‘금지된 장난’이나 ‘여행자’를 통해서 섬뜻한 느낌을 받았습니다만, 아이들이 죽음에 대하여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근친의 죽음은 아이들에게도 커다란 충격이기 때문에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고 다만 시간적인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절절하게 설명하여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고인을 잊지 않는 것이 옳겠습니다만, 고인의 생각에 집착하도록 하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시즈토에게도 어렸을 적에 만났던 죽음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성년이 되어 병원 소아과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만났던 어린환자들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친한 친구의 기일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자책감들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에 담아두려는 개인적인 노력이 확대되어 구도의 길로 이어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앞서 누군가가 와서 고인에 대하여 질문할 적에 어떤 기분이 드실 것 같으냐는 질문을 드렸습니다만, 시즈토 역시 종교단체의 포교활동, 혹은 정신에 문제가 있는 사람 등으로 오해를 받게 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순수함을 깨닫게 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역시 애도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고인에 대한 그의 애도를 특별하게 부탁하는 가족도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앞서 시즈토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텐토 아라타는 세상사람들이 애도하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일까요? 아마도 마키노 고타로가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에 얻은 깨달음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요? “당신이 태어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당신이 ‘애도하는 사람’이 된데는 가족과 환경, 인생의 상처 등 여러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 뿐만은 아니다. 당신도 분명 모른다. 그렇게 보였다. 당신을 ‘애도하는 사람’으로 만든 것은 이 세상에 넘쳐나는 죽은 이를 잊어가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차별당하거나 잊혀가는 것에 대한 분노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도 별 볼일 없는 사망자로 취급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세상에 만연한 이런 부담감이 쌓여서, 그리고 그것이 차고 넘쳐서 어떤 이를, 즉 당신을 ‘애도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432쪽)”

텐토 아라타는 자신의 이러한 생각을 나기 유키요에게 살해당한 남편 사쿠야의 설명으로 완결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을 애도하고 있어요 … 죽는 순간, 그저 숫자가, 유령이 되어버리고 … 가까운 사람을 제외하면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았는지 잊어버리는데 … 이 남자는 죽은 자가 지나온 삶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습니다. 그 인물이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소박하게나마 기리고 있습니다.(566쪽)” 그리고 보면 우리네 장삼이사도 세상에서 기억되는 존재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그저 소박하게 가까운 사람들만이 기억해주어도 참 좋을 것 같습니다.

텐토 아라타의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배려도 피해자를 세 번 애도하면 가해자 역시 애도할 수 있다는 시즈토의 애도철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장 극적인 장면일 것 같기도 합니다만, 사랑한다는 이유로 남편 사쿠야를 살해하게 되는 나기 유키요에게도 자신이 진정 사쿠야를 사랑했다면 아무리 그가 강압적으로 요구했다고 하더라도 그를 죽여서는 안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사랑했다면 아무리 싫어하고 아무리 미워해도 죽여서는 안됐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주길 바라야 했어요.(587쪽)”

마지막으로 제 개인적인 관심입니다. 시즈토의 애도철학을 설명하는 세 사람의 화자 가운데 어머니 사카쓰키 준코는 말기 위암을 앓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혼전임신한 딸이 아이를 출산할 때까지 그리고 아들 시즈토가 돌아와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으면 하는 희망으로 생명의 끈을 놓치 않고 버텨나가는 그녀의 죽음을 만나는 방식은 분명 참조할만합니다. 대체적으로 죽음을 맞기 몇 개월 동안 생애동안 쓰는 의료비의 상당부분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병원에서 집중치료를 받으면서 죽음을 맞지 않고 가정에서 재택치료를 받으면서 가족들과 같이 하는 시간을 자연스럽게 늘려가는 그녀의 방식은 독특합니다. 특히 죽음을 맞는 순간 불필요한 생명유지를 위한 처치를 할 필요가 없다는 내용을 담은 사전유언(Living will)을 만들어 가족들에게 자신의 뜻을 확실하게 하는 등의 죽음맞이는 분명 우리가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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