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의 피아니시모
리사 제노바 지음, 민승남 옮김 / 세계사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치매는 어느 날 갑자기 증상이 나타나 빠르게 나빠지는 질병이 아니기 때문에 같이 생활하는 사람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들이 평소와 달라진 점을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제가 처음 치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1990년 즈음에만 해도 국내에서 참고할만한 책도 별로 없었지만 이제는 치매에 관한 전문서적 뿐 아니라 일반대중이 읽을 수 있도록 쉽게 풀어쓴 책도 많이 나와 있고 치매환자를 돌본 분들이 환자를 지켜보면 쓴 책들도 적지 않게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하버드대학에서 신경학을 전공한 리사 제노바박사의 소설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는 지금까지 나온 치매관련 서적과는 전혀 다른 치매환자의 시각에서 알츠하이머병이 시작해서 진행되는 과정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이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인식한 2003년 9월부터 2005년 6월까지 매월 한달 동안 진행된 치매증상을 정리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는 2005년 여름 다음에는 2005년 9월까지 건너 뛰어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화자는 하버드대학에서 인지심리학교수으로 재직하는 언어학의 권위자 엘리스박사입니다. 그녀의 남편 존은 역시 하버드대학에 근무하는 생물학교수로 왕성하게 연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앨리스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방향감각 상실, 정신 혼란, 기억력 쇠퇴 등입니다. 쉰살에 불과한 주인공은 자신의 문제가 갱년기증상일 것으로 짐작하지만 막상 정밀검사에서는 초기단계의 알츠하이머병으로 진단받게 됩니다. 최근에 나온 연구결과에서는 앨리스처럼 60세 이전에 증상이 나타나는 조발성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경우 기억력이 멀쩡한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213825).

이 책의 독자들은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심리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치매는 초기부터 모든 증상이 나타나서 꾸준하게 나빠지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증상이 파도를 타는 식으로 나빠졌다가 좋아지는 식으로 조금씩 나빠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자 스스로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점을 인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초기 치매환자가 자신의 치명적인 병을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뉴스에 소개되기도 합니다. 또한 치매 환자는 초기에 자신에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에 자신의 증상을 감추고 진단을 위하여 병원에 가는 것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의 선친께서도 돌아가실 무렵에 초기 단계의 치매증상을 알게 되었는데 사실은 2~3년 전에 산책가셨다가 길을 잃은 사고가 있으셨다는데 부모님 모두 이를 감추셨다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적극적으로 치료약을 드셨더라면 증상이 천천히 진행되었을 것인데 많이 아쉽습니다.

책에서 잘 정리하고 있는 것처럼 현재로는 사망 전에 알츠하이머병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방법은 개발되어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다만 MRI 등과 같은 영상검사를 비롯하여 혈액검사, 심리검사 등을 증상과 같이 종합판단하여 진단을 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은 앨리스박사의 진단이 결정되는 과정에 잘 언급되어 있습니다. 조발성 알츠하이머병은 증상이 비교적 빠르게 진행되지만 젊은 나이에서 증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생존하는 기간은 길다고 합니다. 조발성 알츠하이머병은 약 10% 정도 차지하고 65세 이전에 발병하는데 유전적 요인이 작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앨리스박사 역시 큰 딸이 유전적 성향을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져 가족들의 걱정거리가 됩니다.

앨리스박사의 경우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연극을 공부하는 작은 딸과 갈등을 빚어왔지만 투병과정에서 작은 딸의 연극에 대한 열정을 이해하고 작은 딸과의 만남을 통해서 투병에 도움을 받게 됩니다. 치매환자는 아무래도 간병하는 사람이 거의 24시간 지켜봐야 안전할 수 있기 때문에 가족들의 부담이 매우 큰 병입니다. 따라서 간병의 부담을 나누고 배회증상이나 변실금과 같이 가정에서 간호하는데 한계가 있는 증상이 나타나게 되는 경우에는 요양전문기관에 맡기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해는 것이 환자와 가족 모두에게 도움이 됩니다.

제가 맡고 있는 요양기관의 평가사업에서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 구절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조기진단을 권장합니다. 의사들이 40대와 50대 환자들의 기억력 및 인지장애를 단순히 우울증이나 스트레스, 폐경기 증세로 진단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확한 진단을 빨리 받을수록 빨리 약물치료를 시작하여 병의 진행을 늦출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병이 진행되지 않는 정체기를 길게 유지시켜 더 나은 치료법의 혜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가까운 미래에 완치가 가능해질 수도 있습니다.(325쪽)”

두 가지 안타까웠던 부분은 자신의 병을 알고나서 자신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순간에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려던 앨리스박사의 결정(349쪽)은 잘못된 것이었다는 점과 앨리스가 주도하여 조발성 알츠하이머병 환자들만의 모임을 만드는 부분입니다. 통상은 알츠하이머병은 간병하는 분들이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여 도움을 받기 위하여 결성하는 자조모임입니다만, 환자들이 만나 서로의 어려움을 나눈다는 발상은 상황에 따라서는 위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 책의 저자인 리사 제노바 박사의 경우 할머니가 치매를 앓았고, 번역을 맡은 민승남님 역시 어머니가 치매를 앓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저 역시 선친께서 치매증상이 있으셨고, 치매의 진단영역을 공부한 바가 있으니 공감이 많이 가는 책입니다.

뇌신경분야이기 때문에 전문용어가 많아 이해가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만, 번역이 깔끔하게 잘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제목이 아주 매력적입니다. <Still Alice>라는 원제는 치매증상으로 무너지고 있지만 그래도 앨리스박사는 여전히 존경과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라고 정한 번역서의 제목은 치매환자의 주된 증상인 기억력이 서서히 사라진다는 점을 잘 반영한 제목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블랙베리>라는 이름의 스마트폰을 전자사전으로 소개하고 있는 점이 거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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