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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빛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8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평점 :
‘사랑과 상실, 기억의 속임수에 대한 섬세한 탐구’라는 설명에 눈길이 가서 읽게 된 책입니다. <오래된 빛>은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맨부커상, 프란츠 카프카 상, 유럽문학상 수상자인 존 밴빌의 장편소설입니다. 화자인 주인공 앨릭스는 70세 가까이 된 은퇴한 연극배우입니다.(물론 뒤에 가서 밝혀지는 사실입니다)
이야기는 앨릭스가 열다섯 살 무렵 친하던 학교 친구 빌리의 어머니와 사랑에 빠졌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빌리의 어머니 미시즈 그레이의 당시 나이는 서른다섯, 무려 스무 살이나 차이가 나는 아이와 사랑을 나누었다면 요즈음의 법으로는 아동에 대한 성범죄로 중한 처벌을 받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도 한 번으로 끝났던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꽤나 긴 시간을 두고 성관계를 이어가다가 우여곡절 끝에 헤어졌다고 하니 가중처벌을 받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녀와의 사랑의 행각을 계속 곱씹는 것을 보면, 미시즈 그레이와 사랑(그것도 사랑이라고 한다면)했던 일은 앨릭스의 삶 전체를 관통하여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앨리스는 연극배우 일을 그만두고는 아내 리디아와의 관계가 데면데면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이렇듯 변하게 된 것은 딸 캐스가 십년 전에 이탈리아의 해변에서 투신자살을 한 뒤부터입니다. 자살할 당시 캐스가 임신한 상태였던 것으로 밝혀지는데, 뒤에 가서 판더가 모종의 관련이 있는 듯한 분위기로 풀려갑니다.
그러던 가운데 팬터그램픽처스의 배역담당 빌리 스카우트가 앨리스를 찾아옵니다. 악셀 판더라는 사람의 삶에 관한 영화를 촬영하게 되었는데 앨리스가 판더역을 맡아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연극무대에서 은퇴한 상태였던 앨리스는 요청을 수락하고 연습에 참가하는데, 돈 데번포트가 상대역으로 등장합니다.
촬영이 진행되는 가운데 돈 데번포트가 과민상태에 빠지면서 촬영이 중단되고 앨리스는 그녀에게 이탈리아 여행을 권합니다. 앨리스의 아내 리디아는 남편이 이런 결정에 반발을 하지만 영화를 찍기 위한 일이라고 둘러대고 말았습니다. 데번포트와 향한 장소는 딸 캐스가 자살한 장소와도 연관이 있는 듯합니다. 그러다 보니 앨리스와 데번포트 사이에도 서로의 삶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특히 캐스의 죽음이 화제가 됩니다. 1부의 핵심인물은 미시즈 그레이였다면 2부의 학샘인물은 돈 데본포트입니다.
미시즈 그레이와의 사랑이야기는 50년도 넘은 과거의 이야기임에도 작가는 미주알고주알 설명을 해가는데 사실 기억이란 것이 그리 정확한 것이 아니라서인지 읽어도 쉽게 몰입이 되지 않는 느낌이었습니다. 반면 데본포트와 엮인 이야기는 비교적 수월하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작가가 이야기를 풀어놓는 솜씨는 마르셀 푸르스트를 많이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상황을 아주 세밀하게 묘사해 놓아서 돌아가는 사정이 손바닥 보듯 분명한 느낌이었습니다.
읽어가다 보면 재치가 넘치는 구절이 적지 않습니다. 그 첫 번째로는 “나는 걷기를 좋아한다. 아니, 나는 걷는다, 고 말하고 거기서 끝내는 게 좋겠다. 그것은 캐스가 죽은 뒤 애도하던 처음 몇 달 동안 몸에 붙은 오랜 습관이다. 밖에 나가 산책을 하는 것의 리듬과 목적 없음에는 위로가 되는 뭔가가 있다.(126쪽)” “이제 나와 은막, 나도 당신이 이 이야기를 꼭 듣고 싶어하리란 걸 안다. 물론 이제는 은막이 아니라 야하게 색을 입히는데 이건 개악에 불과하다.(134쪽)” “악수를 하면 늘 그 전율, 그 근거 없는 끈끈한 친밀감, 뭔가가 뿜어져 나왔다는 그 끔찍한 느낌, 거기에 더해 정확히 언제 가엾게 움츠러던 손을 풀고 거두어들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느낌이 찾아온다.(141쪽)” “내가 평생 사랑했던 아우라 넘치는 모든 여자는, 지금 나는 사랑했다는 말을 가장 넓은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는데, 나에게 자신의 자국을 남겼다.(147쪽)” “전면의 타원형 유리 패널 너머로 열심히 일하는 내부 장치가 보이는 커다란 괘종시켸가 구석에 보초처럼 꼿꼿하게 서서 깊은 숙고에 들어간 듯 똑딱거렸다. 똑 하고 딱 할 때마다 순간적으로 머뭇거리는 것 같았다.(3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