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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지 이야기 1
무라사키 시키부 지음, 세투우치 자쿠초.김난주 옮김, 김유천 감수 / 한길사 / 2007년 1월
평점 :
<겐지 이야기>는 에치고 유자와로 가는 길에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소개하면서 조사한 자료를 보았더니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노벨문학상 수상연설에서 <겐지 이야기>에 담긴 아름다움을 이야기했다는 내용이 있어 짧게 설명한 바 있습니다. 한편 50세가 되던 해에 전집을 발간하면서 학생 때 쓴 일기와 글들을 정리하면서 발표한 <소년>에서도 <겐지 이야기>와 <겐지 모노가타리 고게쓰쇼>를 읽었다는 이야기를 통하여 <겐지 이야기>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읽은 치매 전문가 사이토 마사히코가 쓴 <알츠하이머 기록자>에서 치매에 걸린 어머니에게 <겐지 이야기>를 읽어드렸다는 대목을 읽었고, 동네 도서관에 겐지 이야기(1-10)이 있는 것을 보고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겐지 이야기>는 서기 1000년 무렵 이치조 천황시절에 쓰여져 천황과 중궁을 비롯하여 황실 사람들에게 널리 읽혀졌다고 합니다. 모두 54첩에 이르는 대하소설인데 “이야기 초반에는 겐지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인 천황과 생모의 사랑이 그려지고, 후반에는 겐지가 죽은 후, 그의 자손들의 사랑이야기가 펼쳐진다. 따라서 겐지를 중심으로 하여 4대에 이르는 장편 연애소설인 셈이다.”라고 옮긴이는 적었습니다. 등장인물이 430명에 달하고 200자 원고지 8,000매에 이르는 대작입니다.
<겐지 이야기1>에서는 출생 전부터 겐지가 열여덟 살이 되던 해까지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겐지의 첫 여성관계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두중장, 좌마두, 식부승 등 가까운 이들과 궁궐의 숙직소에서 ‘비오는 날 밤의 여인 품평회’를 여는 장면에서 이미 무수한 여인들과 관계를 맺었음을 암시합니다. 이 무렵 죽은 어머니의 뒤를 이어 천황의 사랑을 받게 된 후지쓰보에 대한 연심을 품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결국 후지쓰보가 사가에 나가 있을 때 밀회에 성공하여 회임까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열일곱살 때에는 지방의 영주의 후처 우쓰세미의 숙소에 잠입하여 억지로 관계를 맺게 됩니다. 하지만 우쓰세미는 겐지의 접근을 거부하게 됩니다. 이 무렵 좌대신의 딸 아오이와 혼인을 하게 되지만, 겐지의 여성편력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겐지 이야기2>는 열여덟살부터 스물다섯살까지의 여성편력을 담았는데, 스물두살 때는 정실부인인 아오이 부인이 분만 후에 갑자기 죽음을 맞습니다. 겐지는 자신과 관계를 맺던 육조 미야스도코로의 산 귀신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겐지의 여성편력은 나이의 고하를 가리지 않으며 여성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다는 측면에서 18세기 이탈리아 사람으로 바람둥이 혹은 난봉꾼으로 손꼽히는 자코모 카사노바를 연상하게 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카사노바는 마음에 둔 여성의 마음을 얻어 관계를 맺는데 반하여 겐지의 경우 마음에 들면 어둠을 틈타서 강제로 관계를 맺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이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겐지 이야기3>에서는 겐지가 스물여섯이 되던 해에 배다른 형제 스자쿠 황제가 사랑하는 오보로즈키요 상시와 밀회하는 장면이 아버지 우대신에게 발각되면서 벌어지는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고키텐 황태후가 나서서 겐지와 후지쓰보 중궁과의 밀회에서 태어난 아들을 천황으로 옹립하려는 모반을 획책하고 있다고 꾸민 것입니다. 겐지는 유배형이 내려지기 전에 스스로 스마로 내려가 은거하게 됩니다. 사람들과의 왕래도 끊고서 말입니다. 2년 5개월이 지난 뒤에 복권되어 다시 도읍으로 돌아오게 됩니다만, 아카시의 뉴도라는 유력자의 딸과 연분을 맺고서 딸을 낳게 됩니다. 도읍으로 돌아온 뒤에 스자쿠 황제는 겐지와 후지쓰보 중궁 사이에서 태어난 동궁에게 양위를 합니다. 겐지의 지위는 더 높아지고 조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전과는 달이 새로운 인연을 맺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겐지 이야기4>는 겐지의 나이 서른살의 겨울부터 서른여섯살의 초여름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이 시기에는 겐지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아오이 부인의 아버지 태정대신이 죽고, 후지쓰보도 죽음을 맞아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냅니다. 겐지는 아카시 부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을 집으로 데려와 자식이 없는 무라사키 부인이 기르도록 합니다. 겐지는 식부경의 딸 아사가오 재원에게 연심을 품지만 아사가오 재원이 받아주지 않습니다. 젊었을 적보다는 적지만 여전히 염문을 뿌리는 중입니다. 그리고는 육조원이라는 거대한 주택을 지어 자신의 연인이었던 여인들이 모여 살도록 합니다. 전개되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서포 김만중이 1687년에 썼다는 <구운몽>이나 19세기 중반에 남영로가 썼을 것으로 짐작되는 <옥루몽>의 분위기와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겐지 이야기5>는 겐지의 나이 서른여섯 오월에서 서른아홉살 시월까지 3년반에 걸친 이야기입니다. 육조원에서 생활하는 다마카즈라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합니다. 여기에는 작가 무라사키 시키부의 문학론이 겐지를 통하여 소개됩니다. “이야기란 지어낸 것을 근거 없는 허황된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훌륭한 작가가 지은 이야기는 정말로 느껴져 감동한다. 『일본기』 같은 역사서는 그 일부에 지나지 않고, 이야기야말로 신대로부터 이 세상에 생긴 온갖 일들이 적혀 있다. 좋든 나쁘든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가운데 그냥 보아 넘길 수 없고 그냥 들어 넘길 수 없어 마음에 남은 것들을 쓴 것이다. 착한 사람만 그리거나 지나치게 과장된 표현을 쓰면 오히려 흥이 덜하다.”
<겐지 이야기6>은 「봄나물 상」과 「봄나물 하」가 합본되어 있습니다. 「봄나물 상」은 겐지의 나이 서른아홉에서 마흔한 살 봄까지의 이야기이다. 스자쿠 상황은 셋째 황녀 온나산노미야의 장래를 생각해서 겐지와 혼인을 시킵니다. 「봄나물 하」에서는 준태상천황에 오르는 등 영화의 극치에 이른 가운데 가시와기가 온나산노미야를 범하여 임신을 시킵니다. 겐지도 뒷통수를 맞을 수 있단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기사와기는 겐지와는 달리 심약했던 듯 죽음을 맞게 되었고, 겐지는 가시와기의 핏줄인 가오루를 자시의 아들인 듯 위장합니다.
<겐지 이야기7>에서는 겐지가 마흔 일곱 살 되던 해에 사랑하는 무라사키 부인이 죽음을 맞는 과정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구름 저 너머로」라는 첩에서는 제목만 있고 내용이 없어 겐지의 죽음을 암시하합니다. 그러니까 <겐지이야기>가 실질적으로 끝나는 시점인 셈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겐지가 죽은 후에도 13첩의 이야기를 더 썼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겐지 이야기7>의「구름 저 너머로」 뒤로도 「향내나는 분」과 「홍매」의 두 편이 더해지는데, 이야기의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지는 지점이라고 합니다.
<겐지 이야기8-10>의 주인공은 겐지의 부인 온나산노미야와 기시와기의 불륜으로 태어났지만 겐지의 아들로 위장된 가오루와 겐지와 아카시 중궁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겐지의 핏줄 니오노미야가 이야기의 중심이 되어 겐지의 배다른 형제인 하치노미야의 세 딸과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이야기는 두 사람의 성품이 선친들의 성품을 닮아 있다는 점일 듯합니다. 영화든 소설이든 속편의 재미가 본편만 못한 경우가 많은 것처럼 겐지 이야기의 속편에 해당하는 <겐지 이야기8-10>에서는 이야기를 너무 꼬아놓은 듯한 느낌이 들어 무라사키 시키부의 작품이 맞을까 싶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