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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샹즈 ㅣ 황소자리 중국 현대소설선
라오서 지음, 심규호 옮김 / 황소자리 / 2008년 2월
평점 :
10월로 예정된 여행사 펀트래블의 중국근대문학기행을 준비하면서 읽게 된 라오서(老舍)의 <낙타 샹즈>입니다. 북경에 사는 인력거꾼 샹즈의 비참한 일생을 그린 이 소설은 ‘당대 하층민의 삶과 그를 둘러싼 사회 부조리를 날카롭게 묘파해 비판적 사실주의라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걸작’으로 평가받습니다.
<낙타 샹즈>는 1930년대의 북경을 배경으로 합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고 화북지방으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한인(漢人)들이 생존과 독립운동을 위해 북경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북경은 명(1368년-1644년)과 청(1616년~1912년)의 수도였으며 중화민국 초기, 그리고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입니다. 따라서 1930년 무렵에는 전통적인 고도(古都)의 모습과 함께 근대 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상업, 교육, 문화 시설이 확충되었고, 서구 문물이 유입되면서 사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북경의 한인 사회도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며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작가는 왜 주인공을 인력거꾼으로 삼았을까요? 아마도 인력거꾼의 속한 하층민들의 사회로 보여줄 수 있으며 인력거를 이용하는 상층민이나 북경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모습도 보여줄 요량이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북경의 인력거꾼들은 처한 상황에 따라 24시간 활동을 했던 것도 주요한 장치가 아니었을까요?
샹즈(祥子)는 농촌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부모를 여의고는 물려받은 몇 마지기의 척박한 땅마저 잃게 되자 열여덟이 되던 해에 북경으로 이주해왔습니다. 처음에는 튼튼한 몸과 성실함을 밑천으로 힘을 팔아서 먹고사는 일이라면 안 해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인력거를 끌면 쉽게 돈을 모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북경의 인력거꾼들도 여러 패거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야기의 주요 무대가 되는 류쓰예의 인화차창과 같은 인력거 차고에서 임대하거나 자신의 인력거를 가지고 거리에서 손님을 태우는 경우입니다. 인력거를 임대하는 경우에는 계약에 따라 사납금을 내야 합니다. 입주하여 주인의 인력거를 끄는 경우도 있습니다. 샹즈는 이런 상황을 모두 겪어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인화차창에서 먹고자면서 인력거를 임대하여 길거리 영업을 시작하였습니다. 하루 번 돈으로 도박을 하거나 술을 마셔 탕진하는 다른 인력거꾼들과는 달리 허리를 졸라매고 돈을 모아 자신의 인력거를 장만하여 여유 있게 영업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전쟁의 기운이 감돌면서 위험한 행선지로 가는 손님을 기피할 때, 몇 곱의 돈을 내겠다는 손님을 받았다가 군인들에게 사로잡혀 인력거도 빼앗기고 잡부로 차출된 것입니다. 군인들에게 맞아가면서 끌려다니다가 어느 날 적의 공세를 피해 달아나는 군인들의 눈을 속여 낙타 몇 마리를 끌고 탈출에 성공합니다. 그렇게 얻은 낙타를 전쟁통에 제값을 받지 않고 팔아치우면서 샹즈는 낙타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인화차창으로 돌아갑니다.
인력거 끌기에 운명을 걸었던 샹즈이지만 인화차창으로의 회귀는 그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형편 없는 주인집에 전속 인력거꾼으로 들어가 하인처럼 살기도 하고, 젊잖은 교수의 전속 인력거꾼이 되기도 하는데 혁명의 와중에서 곤경에 빠지기도 합니다. 결정적인 것은 못생긴 탓에 결혼하지 못하고 노처녀로 늙어가는 류쓰예의 딸 후니우의 눈에 들어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류쓰예의 인화차창을 물려받게 될 거라는 기대는 물 건너가고 후니우와 빈민가에서 신접살림을 차리게 됩니다. 후니우는 샹즈를 독접하려 욕심을 부리고 낭비벽이 심했는데, 샹즈의 아이를 가졌다가 출산을 하면서 난산으로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성실하게 살아온 샹즈의 인생관이 바뀌게 됩니다. 다른 인력거꾼보다 낫지도, 더 나쁘지도 않은, 그냥 인력거꾼다운 인력거꾼이 된 것입니다.
결국 “체면을 소중히 여기고 강인하게 꿈을 좇던 사람, 자신을 사랑했고 독립적이었던 사람, 건장하고 위대했던 샹즈는 얼마나 많은 장례식의 일꾼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 이기적이며 불행한 인간, 사회적 병폐의 산물이며 개인주의의 말로에 선 그 영혼이 언제 어떻게 땅에 묻힐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376쪽)”라는 결말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샹즈를 비참한 죽음에 까지 몰고 가지 않은 것은 아마도 작가가 창조한 인간 샹즈에게 베푼 일말의 은전이라고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