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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3 - 최후의 노력 ㅣ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3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5년 3월
평점 :
‘그리스도의 승리’라는 부제가 달린 <로마인 이야기14>은 서기 337년부터 397년까지의 기간을 다루었습니다. 제1부에서는 콘스탄티우스 황제(서기337-361년)의 치세를, 제2부에서는 율리아누스 황제(서기 361-363년)의 치세를 다루었고, 제3부에서는 암브로시우스 주교(서기374-397년)의 행적을 다루었습니다. <로마인 이야기13>의 3부에서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라는 제목으로 로마제국에서 기독교의 부침을 다룬데 이어 기독교가 로마제국을 장악하여 중세유럽사회를 통제하게 되는 바탕을 세워가는 과정을 다루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통하여 기독교를 공인한 덕에 후세에서는 그를 대제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죽기 2년 전에 자신의 아들 셋과 이복형제의 두 아들까지 카이사르에 임명하여 제국의 방위와 통치를 분담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콘스탄티우스 황제 사후에 이들을 둘러싼 권력투쟁이 벌어져 둘째 아들 콘스탄티우스가 주도하여 어린 갈루스와 율리아누스를 제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이복형제의 아들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우스 등 육친들과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살해했습니다.
이 사건은 갈리아의 로마군 총사령관 마그넨티우스를 자극하여 황제를 칭하는 등 사태를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3년에 걸쳐 내전을 수습할 수 있었지만, 막상 제국을 나누어 통치할만한 인물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행적을 보면 그릇이 황제의 그릇이 아니었음을 알겠습니다. 부제로 발탁한 갈루스 조차도 숙청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혈육이라 할 율리아누스가 갈리아에서 병사들로부터 황제로 추대받자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이동하던 중에 병을 얻어 죽고 말았습니다.
콘스탄티우스는 선제의 유지를 이어 기독교에 호의적이었습니다. 특히 아리우스파를 옹호했던 콘스탄티우스는 이교도 박해법을 제정하여 전통을 이어오던 그리스-로마신전을 파괴하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리우스 반대파 역시 박해하고 추방했습니다. 콘스탄티우스는 로마의 황궁을 장악하고 있던 환관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환관들은 콘스탄티우스의 경쟁상대가 될 만한 사람에게는 측근들을 붙여 감시하다가 이상행동이 감지되면 황제의 이름을 빌어 살해하는 식이었습니다.
이렇듯 흘러가는 제국의 동향을 지켜본 율리아누스는 그리스 철학에 심취하며 콘스탄티우스의 시야에 들지 않도록 살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불러 쓸 육친이 없던 콘스탄티우스가 율리아누스를 부제에 임명하여 갈리아에서 야만족을 평정하도록 했습니다. 전투경험이 전혀 없었던 율리아누스였지만 부제가 되어 치른 게르만족과의 네 차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샤푸르2세와의 일전을 준비하던 콘스탄티우스가 율리아누스의 병력을 차출하여 동쪽으로 보내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율리아누스 예하의 로마군단이 이에 반발하여 율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게 되었고, 이를 징벌하고자 병력을 이동하던 중에 병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죽음에 임박한 콘스탄티우스는 율리아누스의 제위를 인정했다고 합니다.
율리아누스는 집권하면서 콘스탄티우스 치세에 벌어진 악정을 모두 버렸다. 황궁의 지출을 대폭 삭감하고 환관들을 모두 몰라냈습니다. 황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모범삼아 철학을 통치의 근간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모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포고령을 발표하여 기독교 이외의 이교도를 박해하던 정책을 버리고 로마의 종교적 관용정신을 되찾게 하였습니다. 율리아누스 황제의 강박적인 기독교 견제정책은 결국 반작용을 가져와 샤푸르2세와의 전투에 나선 길에 죽음을 맞고 말았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율리아누스를 배교자로 폄훼하게 되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고대에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포교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 종교는 기독교가 유일했다고 합니다.
율리아누스 황제 사후에 짧은 기간 황제 위에 있었던 요비아누스에 이어 황제가 된 발렌티니아누스는 기독교에 의하여 대제라고 불릴만큼 기독교에 우호적이었다고 합니다. 그 뒤에는 암브로시우스 주교가 중요한 여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로마의 몰락 이후에 유럽의 중세를 기독교가 장악하는데 결정적인 기반을 마련한 사람으로 꼽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