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설의 팡세
에밀 시오랑 지음, 김정숙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평점 :
품절


<태어났음의 불편함><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로 만났던 에밀 시오랑의 <독설의 팡세>를 읽었습니다. 오래 동안 찾던 것을 직장에서 가까운 도서관에서 대차신청할 수 있었습니다.


삶에 대한 사유를 짧게는 한 줄, 길게는 두어 쪽 길이로 서술하였습니다. 그런데 짧을수록 문장에 담긴 깊은 뜻을 깨우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심오한 사상의 주변을 아주 조심스럽게 배회한다. 그리고 현기증만 탈취하여 달아난다. 나는 심연의 도둑이다.’라는 문장은 심연의 도둑이라는 제목을 뽑아낸 글로 보입니다. 수많은 단상들은 언어의 위축 등 11개의 제목 아래 나뉘어있습니다.


하지만 제목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 이해되지 않는 글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시간과 빈혈이라는 제목에 들어있는 미래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은 불안뿐이다.(57)”의 경우입니다. 하긴 혈액을 잃어가는 백혈병은 신()이 만발하는 정원이다.”의 경우도 백혈병이 빈혈증상을 나타낼 수도 있지만, 이를 신와 연결할 수 있는 고리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해설서가 나와야 하지 않을ᄁᆞ 싶습니다.


언어의 위축이라는 제목에 들어있는 다음의 글을 새겨봅니다. “니체, 마르셀 푸르스트, 보들레르 혹은 랭보가 유행의 변화에도 살아남은 것은 그들의 무관심한 잔인성, 신들린 듯한 해부기술, 풍부한 독설에 기인한 것이다. 어떤 작품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그 속에 존재하는 폭력성이다. 근거 없는 단어일까? 복음서, 그 그지없이 공격적이고 독살스러운 책이 누리고 있는 권위를 생각해보라.(19)”


보들레르나 랭보의 작품은 많이 읽어보기 못했지만, 니체나 마르셀 푸르스트는 적지 않게 읽어보았습니다만,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잔인하다거나 폭력적이라거나 독설로 채워져 있다는 느낌은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독설의 팡세>에서는 많은 작가들에 대한 저자의 독설에 가까운 평가라는 느낌을 곳곳에서 받았습니다. 아마도 거의 모든 작품들은 모방의 재치, 학습된 공감대와 어딘가에서 훔쳐온 엑스터시로 만들어진다.(27)”라는 생각에는 자신도 빠질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요?


84세에 죽음을 맞은 저자이지만 젊어서부터 죽음에 대하여 깊이 사유를 했던 것 같습니다. <독설의 팡세>에서도 죽음에 관한 대목을 여러 곳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죽음의 문제는 모든 다른 문제들을 압도한다. 철학과 황당함에서 서열이 있다고 믿는 그 소박한 믿음에, 죽음 이상으로 황당한 일이 있겠는가?(38)”모든 물은 익사의 색깔을 띠고 있다.(66)”, “우리는 죽음에 대한 강박증을 즐긴다. 우리가 즐기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강박증이다.(67-68)” 등입니다. 역시 이 글들에 함축된 뜻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랑의 생명력이란 낭만주의와 성기로부터 살아남아 있는 감정을 비방한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 될 것이다.(129)”이라고 했는데, “성욕에 자신을 소모하는 것은 1초 동안, 또 나머지 인생 동안 이성을 잃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130)”라고 한 대목 역시 그 뜻을 알려면 많은 사유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글들은 발표한 사람이 무슨 뜻을 담았다고 설명을 해주지 않으면 타인의 그 뜻을 유추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반적으로 짧은 글이 대종을 이루고 있어 단순히 읽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글 하나하나에 담긴 뜻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그저 읽었다고는 하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에 실린 수많은 글 가운데 관심이 가는 주제에 해당하는 글들을 뽑아서 심도 있게 생각해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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