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사월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5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유정희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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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여행 작가 패트릭 리 퍼머가 펠로폰네소스의 남쪽에 있는 마니반도를 여행한 기록 <그리스의 끝, 마니>에서 피의 복수가 반복되고 있었다고 적었습니다. 험준한 타이게토스 산맥과 황량한 해안 환경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기 때문에 변란을 피해 숨어든 사람들이 고립된 생활을 하다 보니 씨족의 명예를 중시하게 된 결과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알바니아의 북부 고원지대에서도 피의 복수가 반복되고 있으며, 그 과정이 카눈이라고 하는 관습법에 정교하게 규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스마엘 카다레는 <부서진 사월>에서 카눈이라는 관습법에 따라 이루어지는 피의 복수를 세밀하게 정리해냈습니다. 씨족 간에 혹은 가문 사이에 벌어지는 피의 복수는 가문이 폐족되는 결과로 귀결되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의 복수를 이어가는 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굳어진 가문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낳은 불행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알바니아 고원지대의 복수는 반드시 총으로 행해야 하고, 발사하기 전에 상대에게 귀띔을 해야 하기도 합니다. 복수를 하면 상대 가문의 누군가가 복수에 나설 것이기 때문에 24시간의 휴전기간 베사를 요청해야 하고, 피의 복수를 한 사람은 죽은 자의 장례에 참석하여 조문을 하고 밥도 먹어야 한답니다. 그리고 오로시 성에 가서 피의 세금을 납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30일간의 대 베사를 요청하여 인정을 받으면 그 기간에 삶을 정리하고, 그 기간이 끝나면 숨어 살거나 가문의 유폐탑에 들어가 몸을 숨겨야 합니다.


<부서진 사월>에서는 베리샤가문의 그조르그가 제프 크리예키크를 쏘아 오래 미루었던 형님의 핏값을 회수한 뒤에 일어나는 일을 뒤쫓고 있습니다. 여기에 작가 베시안 보릅시는 아내 디안과의 신혼여행을 오로시성으로 오면서 카눈이라는 관습법을 자연스럽게 설명할 뿐 아니라 그조르그의 운명을 결정하게 됩니다.


알바니아 북부의 산악지대 풍경을 묘사한 대목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광야 저편으로 안개에 싸인 산맥이 아스라이 보였다. 장막처럼 드리워진 안개 너머 산맥은 들쭉날쭉 산들이 연달아 늘어서 있다기 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산과 같은 모습이었으며, 신기루처럼 어딘지 모르게 더딘, 창백한 그림자같이 보였다.(29)”


피의 복수는 오래된 관습법이라고는 하지만 오로시 성의 대공의 수입 가운데 피의 세금이 차지하는 규모가 큰 것으로 보아 이 땅을 지배하는 자들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권장되어 온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알바니아는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엔베르 호자가 이끄는 알바니아 노동당이 독재정권을 수립하였습니다. 1936년 알바니아의 남부 쥐로카스트라에서 태어난 이스마일 카다레는 티라나 대학교에서 언어학과 문학을 공부하였고 모스크바의 고리키 문학연구소에 유학했습니다. 카다레는 알바니아의 신화와 전설, 구전 민담 등을 자유롭게 변주하여 암울한 조국이 현실을 우화적으로 그려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에릭 페는 작품론에서 이 소설의 배경은 미르디트라는 알바니아의 고원지대를 암시하는 듯하나, 코소보나 몬테네그로의 남부, 알바니아령 알프스 혹은 두카그진고원으로 볼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피의 회수는 아가멤논의 피를 회수했던 오레스테스의 행동과 연관을 짓기도 합니다.


카눈의 관습법에 따른 피의 회수에는 자유의지란 존재할 틈이 없습니다. 그조르그 역시 형이 죽음을 갚으라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결정된 것입니다. 피의 복수의 악순환은 누군가의 결단에 의하여 끊어져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누가 그 일을 시작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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