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레혼
새뮤얼 버틀러 지음, 한은경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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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하고 있는 일을 얼마나 더 할지 모르겠으나,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사례들을 기반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분야를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이 감당하게 될 것으로 예견되고 있습니다. 물론 인공지능이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은 인간의 몫이 될 것이기 때문에 관련 분야의 전문가가 언제쯤 완전히 사라지게 될지는 모를 일입니다. 그렇다고 인공지능을 완벽하게 외면하게 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19세기 초에 영국에서 있었던 러다이트 운동이 새삼 소환되는 것 같습니다. 기계의 발전으로 생계를 위협받게 된 노동자들이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기계를 파괴하는 폭동으로 발전한 사회운동입니다. 정부는 자본가 편을 들어 노동자들을 탄압했지만, 당시의 영국의 식자층은 노동자 편을 들었다고 합니다.


물론 노동자들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면서도 기계 산업의 발전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작품을 읽었습니다. 새무얼 버틀러의 <에레혼>입니다. 화자인 젊은이는 영국에서보다 빠르게 돈을 모아보겠다는 생각으로 1868년 새로운 식민지로 이주하여 목장일을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원주민을 꼬드겨서는 신천지를 찾아나섰고, 우여곡절 끝에 세상 어디에도 없는(NOWHERE) 나라 에레혼(EREHWON)을 발견합니다. EREHWONNOWHERE를 거꾸로 쓴 것입니다.


당시의 사회와는 전혀 다른 이상향이어야 할 에레혼은 화자는 물론 저 역시도 이상한 나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구석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질병은 죄악으로 간주되어 병자는 처벌받는 반면, 범죄자는 병원에 입원시키고 공공의 비용으로 치료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병을 숨기려 별짓을 다하게 됩니다.


당시의 에레혼은 12-13세기 무렵의 유럽문명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보였지만 400년 전만해도 높은 기계문명을 보유했다는 것을 화자는 확인합니다. 문제는 당시 가장 학식이 있는 가설학 교수가 기계는 궁극적으로 인류를 대체하게 되며, 식물에 비해 동물이 우세하듯이 기계는 동물보다 우원하고 동물과는 다른 생명력을 지닌 약동하는 존재가 될 것(104)’을 예견하면서 사용되지 않는 기계는 모두 말소되었고, 기계 계량이나 발명은 최악의 범죄로 규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오래된 기계들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고, 실생활에서는 기계를 이용하지 않게 되면서 기계문명이 퇴보를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70세가 되기 전에 건강이 나빠지거나 병에 걸리거나 어떤 면에서든 신체에 이상이 생길 경우, 동족으로 구성된 배심원 앞에서 재판을 받는다. 그리고 유죄 판결이 나면 사람들의 멸시를 받으면서 사건의 경중에 따라 선고(138)’를 받게 됩니다. ‘폐병에 걸린 사람은 동료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감옥에 가둔다고 했습니다. 요즘 화두가 되는 동료시민이라는 개념을 여기에서 보게 되어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에레혼 사람들은 정의, , 희망, 두려움, 사랑 등 인간의 특성을 의인화한 신들을 공개적으로 숭배하며, 삶이란 미래와 과거란 두 개의 축에 펼쳐진 파노라마와 같아서 흐름을 더 빠르게 하지도, 머물게 하지도 못하고, 내용이 좋건 나쁘건 간에 모조리 봐야 하고, 한 번 본 내용은 볼 수 없다고 믿습니다.


화자는 결국 에레혼에서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열기구를 만들어서 탈출한 다음 영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우리가 이상향이라고 믿은 곳은 스스로 혹은 집단의 편견에 의하여 왜곡된 반이상향인 경우가 많습니다.


산업화와 비인간화가 확대일로에 있던 당시 영국사회를 풍자하기 위하여 쓴 작품이라고는 하지만 대안이라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에레혼 사람들을 포획하여 퀸즐랜드로 이주시켜 노동을 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에레혼 사람들의 삶은 그저 물 흐르듯 흘러가도록 두는 것이 제일이지 싶습니다. 당시 서구 제국주의의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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