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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파일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평점 :
아직 알바니아를 가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알바니아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의 <돌의 연대기>나 <잘못된 만찬> 등을 통하여 많이 친숙해진 느낌이 있습니다. 금년에 새로 고쳐 나온 <H 파일>을 읽게 된 것도 기대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만,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 있었습니다.
<H 파일>은 뉴욕에 거주하는 아일랜드 출신의 민속연구가 두 사람이 알바니아의 N시를 방문하면서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일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알바니아 당국에 입국사증의 발급을 요청하였을 때, 알바니아 당국은 두 사람이 모종의 사명을 띤 첩자로 오인하게 되었습니다. 당국에서는 N시의 시장에게 두 사람의 동정을 감시하도록 지시를 내려 보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N시에서도 멀리 떨어진 마을에 있는 물소뼈 여인숙에서 지낼 예정이라 해서 시장을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시장은 N시에 도착한 두 사람을 브리지게임에 초대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사람을 보내 두 사람의 짐을 조사하도록 시킨 것입니다. 그들의 짐에서 나온 자료를 보면 두 사람이 알바니아를 방문한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발칸반도, 정확하게 말하면 알바니아 북부 지역을 포함해서 몬테네그로의 일부 그리고 보스니아의 몇몇 고장을 아우르는 지역에서 호메로스가 남긴 서사시와 유사한 시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윌리 노튼과 맥스 로스는 알바니아 북부의 음유시인들이 전하는 무훈시들이 생성되는 기전을 밝히려고 이곳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특히 한 음유시인이 시차를 두고 같은 노래를 부르도록 하여 차이를 비교해보려고 했습니다.
물소뼈 여인숙은 고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음유시인들이 여행 중에 들러 쉬는 곳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여인숙에 투숙하고서 바로 한 음유시인의 노래를 반복해서 녹음을 기회를 얻었습니다. 놀랍게도 음유시인이 시차를 두고 노래한 천여행의 가사 가운데 두 행만이 빠져 있었고, 한 행의 일부에 변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과연 이러한 변화는 음유시인의 망각 때문이었을까요? 음유시인은 수천 행에 달하는 노래의 가사를 깡그리 외워서 노래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일정한 이야기의 틀 안에서 즉흥적으로 가사를 만들어 부르는 것일까요? 한 사람의 음유시인이 시간 차이를 두고 같은 노래를 부르도록 하여 비고해보면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며, 그 이유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정을 세웠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일은 알바니아에 전해오는 무이의 서사시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닮은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무이와 아내 아이쿠나에 관한 서사시에서도 다양한 판본이 있다는 것입니다. 윌리와 맥스는 호메로스 이전에 전해오던 일리아스 역시 다양한 판본이 있었을 것이고, 호메로스는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후세에 전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생각해보니 금년에 고전독서회에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읽을 때 헬레네의 처신에 관하여 따로 토론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결혼잔치에 초대받지 못해 화가 난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주라면서 던지고 간 황금사과를 헤라, 아테네 그리고 아프로디테 가운데 주인을 정하게 되었습니다.
헤라는 아시아의 군주를, 아테네는 전투에서의 승리를 약속했지만,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주겠다는 아프로디테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아프로디테가 고른 가장 아름다운 여자는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였습니다. 파리스는 스파르타로 가 헬레네와 함께 트로이로 달아났습니다. 그 바람에 트로이 전쟁이 일어나고 트로이가 멸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헬레네는 스스로 파리스를 따라나섰던 것일까요? 아니면 강제로 납치되었던 것일까요? 그런데 트로이가 멸망하고서는 다시 메넬레오스에게 돌아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이런 의문에 대하여 호메로스는 전혀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헬레네의 행적과 비슷한 무이의 아내 아이쿠나의 행적에 관하여도 다양한 판본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호메로스 이전에도 헬레네의 행적에 관한 다양한 판본이 있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H 파일>은 발칸반도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서 의외의 상황이 벌어지고 두 사람이 연구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으로 마무리되고 말았습니다.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나 안타까운 점이 없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