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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시간을 수리합니다 - 천재 시계사와 다섯 개의 사건
다니 미즈에 지음, 김해용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0월
평점 :
‘추억의 시(時)를 수리합니다.’라는 문구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들까요? ‘추억의 시간’을 수리한다면 망각 속으로 사라진 추억을 되살리거나, 아니면 왜곡된 추억의 시간을 바로 잡는다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환상소설 연작으로 인기작가의 대열에 오른 다미 미즈에(谷 瑞惠) 작가의 소설인 만큼 환상적인 요소가 있을 듯합니다. <추억의 시간을 수리합니다>의 화자인 아카리는 사내연애에 실패하고는 자기만의 세계로 숨어들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무렵 여름방학 때 잠시 머물던 할머니가 살던 집인데 1층은 미용실이고 살림집은 2층입니다. 이발사이던 할아버지와 미용사이던 할머니가 운영하던 가게였습니다. 할머니의 영향을 받았던지 아키리 역시 미용업계에서 일하던 참입니다. 동료 미용사였던 사랑이 떠난 뒤로 다시 미용을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은 아카리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마음을 정리하려 합니다.
할머니의 미용실이 있던 거리는 왕년의 활기가 모두 사라지고 문닫은 가게들만 이어지고 있습니다. 비어있던 할머니의 집에 세를 얻은 아카리가 도착하던 날 맞은 편 시계가게의 진열대에 있는 ‘추억의 시(時)를 수리합니다.’라는 광고문구가 시선을 끌었습니다. 그 시계포의 주인은 이다 슈지입니다. 고장난 시계를 수리해주고는 있지만 그래도 스위스로 유학을 떠나 시계제작을 공부한 실력파라고 했습니다.
활기가 사라진 상가골목이지만 그래도 남아있는 사람들, 그리고 한 때 이곳에 살던 사람들 사이에 얽혀있는 기묘한 사연들이 무려 다섯 꼭지나 펼쳐집니다. 아카리와 슈지 사이에도 얽혀있는 사연이 있지만, 등장인물 들 가운데는 생사가 분명치 않은 존재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사연이 여기 상가골목과 연관이 있습니다. 등장인물들 사이에 얽혀있는 사연들을 풀어내는 역할은 아카리와 슈지, 그리고 골목에 있는 쓰쿠모 신사에서 살고 있는 다이치입니다. 기묘한 사건과 사연들을 풀어내다보니 아키리와 슈지 사이에 숨겨진 과거사가 드러나고 두 사람은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추억의 시간을 수리합니다(思ぃ 出の とき 修理します)>입니다. 시계방 진열대에 있던 장식에는 원래 ‘시계(時計)’라고 적혀있던 것인데, 누군가 ‘계(計)’자를 집어가는 바람에 시(時)만 남은 상태였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시(時)를 시간(時間)으로 해석하게 된 모양입니다. 가게를 열었던 슈지의 할아버지조차도 ‘시계는 오래 사용할수록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시간 그 자체가 된다(191쪽)’라면서 그대로 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니 오래된 시계들은 대부분 특별한 사연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니 고장 난 시계를 고친다는 것은 잊힌 혹은 왜곡된 추억을 바로 잡는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습니다. 아카리와 슈지 사이에 얽혀있는 사연도 그런 경우가 될 것 같습니다.
다만 옮긴이는 무슨 사연이 있었던지 달아난 ‘계’자를 ‘界’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옮긴이의 설명 가운데 기억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오랜 세월 곁에 두고 손때 묻혀온 것들은 나름의 생명을 가진다. 물론 그것 자체의 생명력이라기보다 우리가, 인간이 불어넣은 생명력이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마치 그것은 그것 스스로 살아 숨 쉬듯 우리에게 많은 의미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애당초 살아있던, 살아 숨 쉬고 있던 우리의 정신, 우리의 추억은 우리가 잠시 한눈을 팔기라도 하면 망각이라는 저 너머 세상에서 영영 우리와 인연을 끊고 만다. 슬픔은 기쁨이 되고, 기쁨이 슬픔이 되는 감정의 굴곡 속에서 일희일비하며 삶에 새살을 덧대어가는 우리에게 꼭 기억해야 할, 잊어서는 안될 추억이란 매우 소중한 통과의례일 터. 망각 속의 추억을 복원하는 일은 그래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큰 힘이 된다.(328쪽)’라고 하였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무렵 이곳에 왔던 아카리의 기억에 골목길을 북적였고, 온갖 색깔의 간판과 조화장식이 넘쳤던 것인데,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찾은 골목길은 쓸쓸하게 변해있었습니다. 하지만 상처만 남은 아카리의 입장에서는 옛날 모습이 사라진 골목길이 오히려 안심이 된다 하였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카리의 이런 기대는 슈지 때문에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미용실을 하던 헤어살롱 유이의 손녀딸이라고 말입니다.
상가의 번영회장을 맡고 있는 슈지는 골목길의 상권이 죽어있는 것조차 즐기는 모양이라고 했습니다. “문을 닫은 가게는 사실 잠자고 있을 뿐이야. 가끔은 졸다가 깨어나는, 그런 상가도 나쁘지 않잖아?(31쪽)”라면서 말입니다. 아주 낙천적인 성격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슈지 역시 아픈 연애사를 안고 있습니다. 슈지는 아카리의 잊힌 추억을 되살려내는 추억을 복원하는 시계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