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동네 도서관에서 <남아있는 나날>을 빌리는데 몇 년이 걸렸습니다. 2015년에 소개된 <파묻힌 거인>으로 만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노벨문학상 수상에 기여했다는 작품을 꼭 읽어보고 싶었던 것인데, 늘상 대출 중이었습니다.


<남아있는 나날>을 읽고서 영국인의 진면목을 참 잘 그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업이나 사회적 신분의 차이를 떠나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최고를 지향하기 위하여 사사로운 감정을 접어야 했던 주인공 스티븐슨의 생각을 요즈음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 제임스 스티븐슨은 영국의 귀족이자 유럽 외교계의 핵심인물이던 달링턴 경의 저택의 집사장입니다. 이야기의 시점은 19567월 달링턴 경의 저택이 미국의 부호인 페러데이에게 팔린 직후부터입니다. 집사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하인들이 떠나고 새로운 하인들이 들어오지만, 한때 28명을 하인을 거느렸던 스티븐슨의 입장에서는 4명으로 저택을 관리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달링턴 경이 정력적으로 활동하던 1930년대에 함께 일했던 총무 샐리 캔턴의 편지를 받게 된 스티븐슨은 그녀를 만나러 콘월까지 여행을 하게 됩니다.


패러데이씨가 미국에 일을 보러간 사이 내준 자동차를 운전하여 콘월까지 여행하는 5일 동안 달링턴 경을 모시던 때 저택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회상하는 내용이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달링턴 경의 주선으로 유럽과 미국의 주요 인사가 저택에 모여 의견을 조율하는 회의가 자주 열렸던 것인데, 중도적이며 선의적 성향의 달링턴 경이 나치의 히틀러에게 속임수에 넘어가 독일의 속셈을 간과하여 전쟁의 위험을 과소평가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전쟁이 끝난 뒤에 달링턴 경은 사회적 지탄 속에 폐인이 되어 죽음을 맞고, 200년 전통의 저택마저도 미국인에게 팔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집사장 스티븐슨은 역시 집사장을 지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대저택의 집사로 출발하여 달링턴 경 저택의 집사장에 이르게 됩니다. 주인의 명예를 지키고, 주인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하여 언행을 단도리하는 스티븐슨 부자의 행적을 보면서 영국 명망가의 집사장이라는 직업도 극한직업이었구나 싶었습니다. 집안일을 돕는 많은 하인들을 제대로 통솔하기 위하여 아버지의 입장을 고려하기 보다는 직업적 임무를 우선한다거나, 총무 일을 맡고 있는 캔턴 양이 내비치는 호의를 무시하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이 흐른 뒤에 그녀를 만나러 콘월까지 여행해가는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궁금했습니다.


패러데이씨는 스티븐슨의 콘월 여행이 캔턴 양과의 재회를 통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심상치 않게 발전해가기를 바라는 심정이었을까요? 미국식의 거침없는 농담이 영국식 사고로 굳어진 스티븐슨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진정한 의미의 집사가 존재하는 곳은 영국밖에 없으며 그 외의 나라들에는, 실제로 사용되는 칭호가 무엇이든, 오직 하인들만이 있을 뿐이라는 말을 이따금 듣게 된다. 나는 이 이야기가 진실이라고 믿는 편이다. 대륙 사람들은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혈통들이기 때문에 집사가 될 수 없다.(58)”라는 대목을 보면 스티븐슨의 직업관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콘월로 가는 여행의 여섯째 날에 스티븐슨은 세월이 흘러 벤 부인이 된 캔튼양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재회를 통하여 옛날의 감정을 되살리지나 않을까 하는 통속적인 기대가 무참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스티븐슨이 캔턴양의 편지에 적은 남은 내 인생이 텅 빈 허공처럼 내 앞에 펼쳐집니다(290)”라는 대목을 끄집어내 그녀가 지금 행복하지 않은 느낌을 전하지만, 그녀는 이를 부정하고, 스티븐슨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캔턴양이 스티븐슨과 함께 했을 수도 있는 삶을 상상한 적도 많았다는 고백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스티븐슨이 5일 동안 차를 몰고 콘월까지 간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요?


이 책의 원래 제목은 <The remains of the day>입니다. 이를 <남아 있는 나날>로 옮긴 것에 대하여 이야기가 있는 듯합니다. 사반세기 전의 일을 회상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고하고, 콘월로 여행하는 것까지도 사반세기 전에 떠나갔던 여인을 찾아가는 과정이라서 <그 날의 흔적>이 적절할 것 같다는 이야기도 있는 듯합니다만, 그날의 흔적을 남긴 캔턴양이 언급한 남은 내 인생’, 즉 두 사람의 남은 나날들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에 여지를 남겨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