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들의 포도주
로맹 가리 지음, 장소미 옮김 / 마음산책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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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에도 묘한 흐름이 있다는 말씀을 자주 드립니다만, <죽은 자들의 포도주>를 읽으면서도 같은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읽은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에서 죽은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는데, 로맹 가리의 소설 <죽은 자들의 포도주>는 포도주에 취해 가사 상태에 빠진 주인공이 지하 묘지를 주유한다는 내용입니다.


<아침 그리고 저녁>에는 죽은 사람이 두 명 등장하는데 반하여, <죽은 자들의 포도주>에서는 무수한 등장인물들이 모두 죽은 사람들이고, 가사 상태의 주인공을 제외하고는 산 사람이 없다는 것도 중요한 차이입니다. 그리고 <아침 그리고 저녁>은 주인공이 사망 직후에 일어나 산책에 나섰다가 먼저 죽은 친구를 만난 것인데, 친구의 죽음을 알리기 위하여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반면 <죽은 자들의 포도주>의 경우는 지하 공동묘지에 묻힌 죽은 사람들의 군상이 생각지도 못한 저마다의 사연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로맹 가리는 유일하게 공쿠르 상을 두 번 받은 프랑스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1956년에는 <하늘의 뿌리>, 1975년에는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자기 앞의 생>으로 각각 공쿠르 상을 받았습니다. 로맹 가리 역시 필명으로, 그의 본명은 로만 카제프입니다. 1914521일 당시는 폴란드령이었던 빌노(지금은 리투아니아의 빌뉴스인데, 저도 가본 적이 있습니다.)에서 태어났습니다.


<죽은 자들의 포도주>는 지하 묘지로 굴러 떨어진 튤립이라는 남성이 지하묘지의 입구를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다양한 군상들을 만나 벌이는 상황들의 모음입니다. 원본은 분절이나 장 구분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을 편집인이 22장으로 구분하고, 모두 37가지의 짧은 이야기로 구분해놓았습니다. 읽다보면 이해가 쉽지 않은데, 그 이유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분위기를 모르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말미에 붙인 해설에서 편집자는 로맹 가리의 행적을 정리하고 <죽은 자들의 포도주>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더했습니다.


아홉 살 때부터 러시아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로맹 가리는 프랑스의 엑상 프로방스에 정착하였는데, 엑상프로방스대학 법학과에 입학한 열아홉 살에 <죽은 자들의 포도주>를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가 스웨덴 출신의 기자 크리스텔 쇠데룬드를 만나 사랑에 빠진 23살 때까지 소설을 다듬었고, 이듬해인 1938년 크리스텔이 스톡홀름에 있는 남편에게 돌아갔을 때까지도 손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가리는 자신의 절대적 사랑의 증거로 이 소설의 원고를 크리스텔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크리스텔이 간직하던 이 소설의 원고는 1992년 파리에서 경매에 부쳐져 세상에 알려졌다고 합니다.


<죽은 자들의 포도주>에는 무수하게 등장하난 경찰과 창녀, 그리고 수도사와 수녀들, 병사들, 전쟁 영웅, 독일군, 황태자와 정부요인들이 등장하는데, 심지어는 하느님도 등장합니다. 책을 읽어가면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포도주가 언제 등장하는지 궁금했습니다. 심지어는 요한과 야곱 수도사가 그리스도의 성배에 담긴 무언가를 마셨는데 그것이 포도주인 걸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목에 나오는 포도주의 정체는 이야기의 말미에 등장합니다.


튤립은 사지를 벌벌 떨며 비명을 지르다가 눈을 번쩍 떴다. 주위를 둘러보니 더는 밤이 아니었다. 그는 또한 자신이 무덤에 걸터앉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양 손에 각각 빈포도주병과 십자가가 들려있었다. 흐릿한 아침 태양의 음울하고 창백한 빛이 얼굴에 붙어 따라다녔다.(236)” 튤립이 마신 포도주가 죽은 자들에게 인도하여 그들의 사연을 듣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결국 취생몽사 상태였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일견해서는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사연을 듣다보면 지독한 부조리극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튤립이 만나는 죽은 자들의 사연은 죽음, 자살, 유년 시절, , 전쟁, 섹스, 알코올 등이 섞여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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