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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냉정과 열정 사이>의 여주인공 아오이의 이야기를 담은 로쏘편을 쓴 작가 에쿠니 가오리의 단편집이라는 이유와 제목에 들어있는 ‘기억’이란 단어에 끌려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이야기부터 종잡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 ‘손가락’에 나오는 ‘여자고등학교는 참 이상하다.‘라는 구절대로 여고생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이 책에 담은 여섯 편의 단편소설은 모두 열일곱 살 여고생들의 생각과 감정을 다루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불감증이라고 생각하는 기쿠코는 전철 안에서 몸을 더듬는 사십대 여자에게 끌리는데...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는지 생각이 정리되지 않습니다. ‘초록 고양이’에서는 주변의 묘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정신질환을 앓아 병원에 입원까지 한 오랜 친구 에미와 관계를 이어가는 모에코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천국의 맛’에서는 엄마와 쇼핑을 하는 것이 취미이던 유즈에게 엄마보다 더 좋은 남자친구가 생기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사탕일기’는 뚱뚱한 카나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부터 쓴 일기인데,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다양한 색깔의 사탕을 준다는 것입니다. 상처의 수준에 따라 달라지는 사탕도 독의 수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160cm의 키에 76kg나가는 카나의 비만 수준을 적은 구절을 보면, 코는 볼에 파묻혀 있는데, 눈까지 없어지면 이목구비의 구별이 없어져 햄버거빵처럼 될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비, 오이, 녹차’는 독신으로 사는 서른여섯 살 이모와 친한 유코는 이모의 자유로운 생활을 동경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만 가출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라는데, 만약 이모가 가출을 하면 실종신고를 내고 찾아나설 것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단편 ‘머리빗과 사인펜’은 스물일곱 살인 남자와 거리낌 없이 동침을 하는 미요의 이야기입니다. 그녀에 따르면 서른명 정도의 남자와 동침을 해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별로 오래지 않아 관계를 정리한다는 것을 보면 독특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주인공과 함께 등장하는 친구들의 이름이 눈에 익다는 느낌이었는데, 단편 여기저기에서 중복 출연(?)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출판사의 소개처럼 이 단편집에 등장하는 열 명의 여고생들은 모두 한 반이 아닐까 싶습니다. 옮긴이는 ‘간혹 어린 시절의 친구들 모임에 나갔다가 내 기억 속의 나와는 다른 나를 만나곤 한다(180쪽)’고 후기를 시작하는데, 친구들이 기억하는 내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내 모습과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물론 누구의 기억이 틀린 것인지는 모를지라도 말입니다.
저자의 의도는 알 수 없습니다만, 옮긴이는 여섯 편의 단편소설의 주인공들의 감정들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온갖 감정들이 교차했던 여고 시절의 교실은 이미 내게서 멀어졌는데, 거슬러 올라가 더듬어보면 분명 거기에 있다. (…) 많은 친구들이 그 의미조차 규정할 수 없는 감정과 경험 속에서 허우적거렸고, 나 역시 그랬다. 나만 동떨어져 있는 듯해서 모든 것에 더욱 매달리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그 모든 것을 탓하고 세상을 미워하면서 자학과 파괴의 탈출을 꿈꿨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들은 모든 이의 성장기에 뿜어져 나오는 감정의 가지분열이고 열정과 치기의 폭발이 있었을 텐데, 그 때는 마치 삶의 전부인 것처럼 크고 무겁게 덜 자란 육체와 정신을 짓눌렀다.(181-182쪽)”
45년 정도의 세월이 흘렀기 때문인지 저 역시 학교 때의 기억들은 대부분 단편적으로 남아있습니다. 특별한 장면은 몇 가지 떠오르기는 하지만 전후 사정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물론 결코 잊지 못할 기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기회가 된다면 사죄를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언젠가는 제가 살아온 날들을 생각나는 대로 정리를 해보겠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오고 있습니다. 아마도 현업을 마쳐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