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코디언
천명관 지음 / 창비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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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은 시대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천명관의 신작 소설 <아코디언>을 읽으면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한국전쟁 직후의 결핍된 시기를 어느 것 하나 거르거나 미화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려냄으로써 지금과는 천양지차로 달랐던 그 시대를 우리 앞으로 소환한다. 20세기 대한민국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라면 '에이, 설마...' 하면서 그것을 단지 허구로만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전쟁으로 피폐해진 대한민국의 실제 모습이었고, 모든 게 부족했던 까닭에 생존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만 했던 시기였고, 그럼에도 이웃이나 동료를 위해 자신의 몫을 기꺼이 내주기도 했던 헌신의 시기이기도 했다.


"자신은 벽을 넘는 데 끝내 실패했지만 기어이 살아남아 벽 너머의 세상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남들처럼 깡통만 한 꿈이라도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점점 더 의식이 희미해지는 가운데 동이의 머릿속엔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깜상과 연이, 자신의 아들로 삼았던 돈이, 아코디언을 물려준 홍이, 죽은 양 목사와 아미, 그리고 이젠 윤곽조차 희미해진 엄마의 얼굴......"  (p.294)


소설은 버스정류장에서 구걸을 하는 한 소년으로부터 시작된다. 피난민을 태우는 부두에서 잡았던 엄마의 손을 놓치는 바람에 엄마를 잃고 고아가 된 소년 동이. 홀로 부산에 도착했던 동이는 엄마를 찾기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처럼 고아들을 자신의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어른(양 목사)의 꼬임에 넘어간다. 양 목사와 아미를 주축으로 하는 앵벌이 조직의 숙소는 해방촌 산자락에 위치한 무허가 판잣집이었다. 그곳에서 동이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과 함께 거주하며 백화점 앞에서 구걸을 계속한다. 앞을 못 보는 연이, 걷지를 못하는 거북이, 늘 울음을 그치지 않는 찬이, 미군의 포탄에 맞아 팔이 하나밖에 없는 깜상 등. 양 목사는 어느 날부터 아이들에게 일명 구름탄이라고 불리는 마약을 먹였다. 마약을 통해 아이들을 손쉽게 지배하려는 속셈이었다.


"언제부턴가 양 목사와 아미는 더이상 아이들을 윽박지르거나 때리지 않았다. 대신 약을 굶겼다. 그것은 밥을 굶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벌칙이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도망가지 않았다. 약을 얻어먹기 위해 더 악착같이 양 목사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목에 올가미가 채워진 가마우지처럼 약기운에 취한 채 온종일 길바닥을 뒹굴어야 했다."  p.42~p.43)


동이는 숙소에 버려졌던 낡은 아코디언을 발견한다. 죽은 연이 할아버지의 유품이라고 했다. 교회 성가대의 피아노 반주를 했던 동이 엄마의 재능을 물려받은 덕분인지 절대음감을 지녔던 동이는 독학으로 아코디언 연주를 시작한다. 아코디언 연주가 손에 익으면서 동이는 노래를 잘 부르는 연이와 한 팀이 되어 움직인다. 동이는 그렇게 앵벌이 조직의 주축으로 성장한다. 그러던 어느 날 판자촌 입구 도랑 옆에서 미국인 시신 한구가 발견되고, 양 목사와 아미가 형사들에게 구속된다. 갑자기 감시자가 사라진 앵벌이 조직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한밤중에 난 화재로 인해 아이들 셋이 죽고, 거북이를 업고 나오던 동이도 화상을 입는다. 죽은 아이들을 묻어주고 아이들은 다시 동이를 중심으로 앵벌이를 하고 조금씩 돈을 모은다. 그렇게 평온한 날들이 이어지나 싶던 어느 날 사라졌던 양 목사가 다시 나타나고...


"다시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굴바위로 옮겨온 지 세 달이 지났다. 죽은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도만친 아이도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돈을 빼돌렸지만, 이전처럼 대놓고 삥땅을 치진 않아 탄약통엔 차곡차곡 돈이 쌓여갔다. 집을 사는 것까진 몰라도 한동안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움막은 아이들이 두려워하는 무언가가 당장이라도 들이닥칠 것처럼 늘 아슬아슬한 불안감이 감돌았다. 그래도 그들은 함께 밥을 해먹고 숨바꼭질을 하고 계곡에서 다 같이 목욕을 했다."  (p.154)


무엇보다 생존이 우선시 되는 상황에선 언제나 각자가 지닌 본능과 본능이 악다구니를 쓰듯 충돌하게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우리 내면의 선한 본능이 우리도  모르게 발현된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설에서의 극적인 반전을 이끄는 것도 바로 이러한 지점이 아닐까 싶다. 인간 내면에 잠재한 선한 본능. 물론 누군가는 그것조차 외면한 채 끝끝내 지독한 악인으로 남기도 하지만 또 누군가는 그에 저항하여 자신의 목숨마저 선뜻 내놓을 수 있는 선한 본능을 구현하기도 한다. 그로 인하여 우리의 공동체가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가의 다른 작품 <고래>가 워낙 탁월한 소설이었기에 그것을 능가할 만한 소설은 작가로부터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지금까지 일부러 그의 소설을 외면해 왔다. 그러다 우연찮게 읽게 된 소설 <아코디언>. 시대를 관통하는 극사실주의 소설을 씀으로써 그는 이제야 자신의 위치를 찾은 게 아닐까 싶다. 작가는 이제 현실에 발을 단단히 디딘 듯한 모습이다. 현실에 살을 맞닿은 채로 그는 이전보다 조금 더 여유로워진 듯했다. 나는 앞으로 천명관 작가의 달라진 모습을 그가 쓸 앞으로의 소설에서 수시로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희망 섞인 기대를 품게 되었다. 그것이 내가 오늘 그의 소설 <아코디언>을 읽은 보람이라면 보람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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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서 帛書 - 125년 만에 도착한 편지
이상훈 지음 / 책마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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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세례를 받은 지 10여 년이 흘렀다. 가족 모두가 천주교 신자라거나 모태신앙도 아닌, 천주교는 나에게 꽤나 낯선 종교였지만 어떤 특별한 계기도 없이, 그야말로 뜬금없이 천주교 신자가 되기로 결심했던 건 우연이거나 필연이었을 테다. 그것도 천주교를 믿는 다른 이의 권유나 전도도 없이 오직 나의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이끌림이었다는 건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그 인과관계의 건너뜀이 큰 의문부호로 남는다. 그리고 나는 당연한 귀결처럼 냉담자가 되었다.


이상훈의 역사소설 백서(帛書)를 읽는 내내 나는 소설의 주인공인 황사영의 삶과 나의 삶을 번갈아가며 생각했다. 250여 년 전에 태어난 사람과 나를 비교한다는 게 가능하지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같은 종교를 믿으면서 온갖 박해 속에서도 종교를 버리지 않았던 황사영과 자유로운 종교 활동이 보장되는 상황에서 냉담자로 남은 나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 극단적인 대비가 아닐 수 없었다.


"백서를 쓰는 황사영의 심정을 가슴으로 느끼며 또 읽었다. 내가 황사영이 되고 황사영이 내가 되었다. 239년 전에 살았던 황사영이 내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황사영은 천주교 순교자로 하느님을 위해 기꺼이 사지가 찢겨 죽는 순교의 길을 택했지만, 그는 천주교에서도 대접받지 못하고 우리 역사에서도 버림받은 존재가 되었다. 그가 외국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조선에서 벌어지는 살육의 미친 춤판을 끝내 달라고 교황님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 일이 과연 역적으로 비난받을 행위일까? 당시 조선 백성의 삶과 정치 상황 그리고 천주교 박해의 실상을 안다면, 누가 황사영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p.6 '작가의 말' 중에서)


1775년 조선 후기의 정조가 집권하던 시기, 황석범의 유복자로 태어난 황사영은 16세의 나이로 진사과에 장원급제한 천재였다. 정조의 주선으로 정약용의 집안과 관계를 맺게 된 황사영은 결국 정약용의 큰형인 정약현의 딸 정명련과 혼인하여 정약용의 조카사위가 된다. 조선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였던 이승훈이 정약용의 누이와 혼인함으로써 정약용의 집안 역시 천주교를 믿게 되었던 바, 정약용의 조카사위가 된 황사영 역시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지 싶다. 캄캄한 토굴 속에서 숨어 살면서 당시 스물여덟 살이었던 황사영이 가로 62cm, 세로 38cm의 작고 흰 비단 위에 일만 삼천 자가 넘는 한자를 붓으로 적어 내려갈 때의 절절한 심정을 작가 또한 백서 원문을 읽으면서 가슴으로 느꼈었다고 한다. 2027년 8월 WYD World Youth Day(세계청년대회)가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세계의 가톨릭 청년들에게 우리 순교의 역사를 알리고자 소설을 완성했다며 집필 목적을 적었다.


"황사영은 토굴에서 백서를 마쳤다. 마지막 문장을 쓰고 난 후 사영은 정신을 잃었다. 다음날 아침 김귀동이 불러도 기척이 없자 항아리로 막았던 입구를 헤치고 토굴로 들어왔다. 황사영은 탈진해서 쓰러져 있었다. 그만큼 마지막 남은 기력을 백서에 쏟아 부은 것이다. 사영의 몸은 불덩이 같았다. 김귀동은 의원을 부를 수도 없고 해서 급하게 열을 내리는 민간요법으로 응급조치를 하고 차가운 물로 적신 수건으로 사영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p.157)


순교자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신앙을 지키고자 자신의 목숨까지 바쳤던 수많은 희생자 중 한 사람이었던 김범우의 7대손인 진복이 자신의 친구인 박현철 신부와 함께 순교지를 찾아나서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내놓아야 했던 당시 조선의 민중들이 겪어야 했던 아픈 역사와 그 역사의 한 귀퉁이를 가까스로 붙잡기 위해 애쓰는 진복의 모습이 교차하면서 소설은 진행된다. 황사영이 결국 능지처사의 죽음을 당하고 그의 아내인 명련이 관노가 되어 두 살 난 아들과 함께 제주도로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정약용의 모습을 그린 장면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 먹먹하게 읽었다.


"자신은 양반 신분의 유배 생활에서도 이렇게 냉대와 멸시를 받고 있는데 그렇게 곱고 우아하던 조카 명련이 노비가 되어 외딴 섬 제주도에서 노비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약용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약용은 조카 명련에 대해 글을 남길 수가 없었다. 황사영과 명련은 천주교 괴수로 지목되었기에 약용이 그들을 안타까워하는 글을 남기면 이것이 꼬투리가 되어 노론 벽파의 공격이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생각에 명련에 대한 안타까움은 글로 표현하지 못하고 가슴에 담아둘 수밖에 없었다."  (p.194)


오락가락하던 장맛비는 제헌절 연휴에도 요란하게 이어졌다. 나는 이상훈작가의 역사소설 <백서(帛書)>를 곰곰 되새겨보며 인간에게 과연 종교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내가 지금도 여전히 천주교 신자로 남아 있었다면 결코 들지 않았을 질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각자의 삶에서 아로새겨진 개인의 성향과 인성은 그의 삶이 그것에 반하여 펼쳐질 때마다 도돌이표처럼 원래의 삶으로 되돌려 놓는다. 삶의 원칙이란 바로 그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내놓았던 황사영 역시 그러했을 터, 우리는 각자의 삶이 지정하는 외진 길을 따라 조용히 나아갈 뿐이다. 냉담자로 살고 있는 나도 역시 언젠가 고해성사를 하고 주말 미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언젠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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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을 많이 보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의 정리가 필요할 때면 이런저런 채널의 영상을 띄워 놓은 채 나만의 생각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보지도 않을 양이면 귀한 전기를 써가면서 뭐 하러 동영상을 재생하느냐 따질 사람도 있겠으나 평일에는 주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까닭에 아마도 백색 소음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소음도 없는 적막한 공간은 그것을 인지하는 인간에게 약간의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나는 언제나 유튜브 동영상에서 흘러나오는 소음을 귀담아듣지도 않으면서 무작정 흘려보내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생각과 일치하거나 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것들이 더러 있는 까닭에 어쩌다 그런 동영상을 만날 때면 컴퓨터 모니터 앞으로 의자를 당겨 앉게 됩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말입니다. 이응준 작가의 산문집 <고독한 밤에 호루라기를 불어라>를 읽고 있습니다. 그의 산문집은 때로 난해하기 짝이 없어서 나의 상식이나 지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나는 그저 '아무려면 어때'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만 이해하자 마음을 가볍게 먹은 채 담담히 책을 읽어나가곤 합니다.


"슬픔을 잘 이해하는 사람은 기쁨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고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다. 그래야 자신이 어떤 시를 가지고 있는 시인인지를 안다. '사람들은 모두 시인이다.' 다만 자신이 시인임을 스스로 무시하고 살아가다가 죽거나 시인이면서도 시인인 줄 모르고 살다가 죽을 뿐이며 심지어 나는 자신 안의 시인을 일부러 살해하는 사람들조차 자주 본다. 물론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애써 괴물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만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자신의 날개를 하늘에서 사용하지 않고 발의 부스러기나 계단쯤으로 여기다가 차에 치여 길에 찌그러져 말라붙어 있는 저 비둘기들의 사체처럼."  (p.97~p.98)


오늘 최욱이 진행하는 '매불쇼'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을 테지만 오랜만에 보는 유시민 작가의 모습이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유시민 작가의 말에 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몇 달 전부터 시작된 진보 유튜버들의 일베식 조롱과 멸칭이 이상하다고 생각은 해왔지만, 그것이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의 견해와 일치한다고는 판단한 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던 검찰개혁이 조금씩 물거품으로 변해가는 듯한 인상을 받기 시작하는 요즘, 김민석 전 총리를 민주당의 차기 당대표로 지지하는 듯한 대통령의 노골적인 태도와 의중을 비추어 볼 때, 대통령은 어쩌면 지리멸렬한 국민의힘과 당대 당 통합은 아닐지라도 그들 주변의 인사들을 최대한 끌어 모아 민주당으로 편입함과 동시에 그 과정에서 이를 반대하는 민주당의 전통적인 지지자(일명 강경파라고 할 수도 있는)들의 이탈을 과감히 용인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보완수사권의 유지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보수권 인사들을 포섭하려면 검찰개혁은 시늉만 하고 눈 감고 아웅 하는 게 당연한 수순일 테지요. 현 상황을 그렇게 이해하면 대통령과 김민석 전 총리의 행보도 이해 못 할 게 없습니다. 박정희를 '스마트한 독재자'라고 칭한 김민석 전 총리의 발언을 조금 더 확장하면 이토 히로부미도 '스마트한 독재자'라고 할 날이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와 같은 역사 인식을 지닌 사람을 대통령은 민주당의 차기 당대표로 밀고 있습니다.


수십 년 민주당을 지지해 왔던 나 역시 앞으로 다시는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바 있지만,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주변 사람들 역시 검찰개혁은 이제 물 건너간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녔던 검찰이 꺼져가던 불씨를 다시 살리고 있는 듯 보입니다. 유시민 작가도 잠깐 언급하였지만 1990년 3당 합당으로 탄생하였던 민주자유당이 떠올랐던 건 아마도 현 시국이 그와 비슷한 까닭일 테지요. 무척이나 덥고 지루한 날들이 길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침함과 싸우고 있'는 게 아니라 '모두가 자신을 무가치하게 만든 현 정치권과 싸우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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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단편선 ㅣ 소담 클래식 8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이은연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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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비가 뜸해진 자리엔 무더위가 자리를 잡았다. 잦아진 기상이변 탓인지 과거에는 가난한 사람이 가장 나기 쉬운 계절이 여름이었는데 이제는 정반대가 되고 말았다. 여름이야말로 가난한 사람들이 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계절이 되고 말았다. 살인적인 더위와 게릴라성 폭우는 매년 그 강도를 더하고 있지만 딱히 이렇다 할 대책은 없는 게 현실이다. 그저 침수 피해를 입은 이재민에게 지급되는 일시적인 성금과 보여주기식 복구 활동이 그들을 위한 과분한(?) 성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느린 듯하지만 화살보다도 빠른 한 해 한 해를 살아내고 있다. 무성의한 이웃과 가혹한 하늘을 원망하면서.


소담출판사에서 출간한 <도스토옙스키 단편선>을 읽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열렬한 팬이기도 한 나는 그의 작품 대부분을 읽어보았다, 청소년기의 어느 시기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의 작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 나는 꽤나 깊은 우울과 인생에 대한 회의감 속에서 한동안 빠져나오지 못했었다. 우리의 삶이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그 시기에 도스토옙스키의 여러 작품을 통해서 배웠다. 그리고 그가 겪었던 지독한 가난과 간질이 마치 나의 경험인 양 아팠다. 그 후에도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문고판으로 나온 그의 작품들을 수시로 꺼내 읽곤 했었다.


<도스토옙스키 단편선>에 실린 작품은 '백야'를 비롯하여 '남의 아내와 침대 밑 사나이', '첫사랑' 등이다. 그의 작품이 늘 그렇듯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이를 통한 철학적 사색을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한편 일관적이지 않은 인간의 변덕스러운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묘사함으로써 책을 읽는 이들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한 번쯤 되돌아보도록 한다. 자신의 모습을 곰곰 되돌아보지 않는 우리는 자신이 마치 신에 버금가는 대단한 사람인 양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까닭에 도스토옙스키와 같이 탁월한 작가에 의해 간접적으로나마 지적을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스텐카, 내가 모욕당한 것을 언제나 기억하리라 생각하는가! 내가 너의 밝고 아늑한 행복에 검은 구름을 드리우리라 생각하는가! 심한 비난의 말을 퍼부어 너의 가슴에 슬픔을 주고, 비밀스러운 가책으로 너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며, 행복한 순간에도 우울한 생각으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네가 그와 함께 계단을 향해 걸어갈 때 너의 검은 곱슬머리에 꽂은 그 부드러운 꽃 가운데 단 하나라도 짓뭉개 놓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오, 결코,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너의 하늘이 맑게 개기를, 너의 사ㅓ랑스러운 미소가 밝고 평화롭기를, 그리고 감사함으로 가득한 어떤 외로운 가슴에 네가 심어 준 행복과 기쁨의 순간에 대해 축복받기를!"  (p.114 '백야' 중에서)


'백야'에서 작가는 페테르부르크에 사는 소심한 한 남자를 등장시킨다. 어찌나 소심한지 연애 경험도 없고 단지 상상 속에서만 살아가는 그는 어느 날 운하 난간에 기대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젊은 여인을 보게 되고, 그녀를 괴한으로부터 구해 준 것을 계기로 가까워진다. 결혼을 약속한 남자로부터 버림받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여인(나스텐카)을 위로하며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게 된 남자는 자신의 소심함을 떨치고 그녀에게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고백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에 대한 미련을 남겨두었던 여인은 결국... '남의 아내와 침대 밑 사나이'는 질투심에 사로잡힌 한 남자가 이성이 아닌 감정과 본능에 따라 움직임으로써 자신의 사회적인 지위에 상관없이 얼마나 추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는 남자는 아내를 미행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의 오해와 충돌을 풍자적으로 그려낸다.


"그는 긴 외투를 입고 G거리로 달리기 시작했다. 거기서 현장을 덮쳐 그들의 정체를 폭로하고, 대체적으로 어제보다는 좀 더 강력하게 행동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는 금방 집을 찾아 입구로 들어섰다. 그때 외투를 입은 말쑥한 멋쟁이 차림의 한 형태가 그의 팔을 스치듯 가까이 그를 앞질러 3층으로 급히 올라갔다. 이반 안드레예비치는 비록 극장에서 민간인 복장을 한 멋쟁이 차림의 사나이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바로 조금 전에 본 그 말쑥한 차림의 멋쟁이 사나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그는 이미 한 층을 앞서 올라갔다. 마침내 3층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왓다. 문은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벨 소리도 없이 열렸다."  (p.157 '남의 아내와 침대 밑 사나이' 중에서)


마지막 작품인 '첫사랑'은 열한 살 소년의 눈을 통해 바라보게 되는 어른들의 세상이다. 소년이 사랑하는 M 부인은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철저히 숨기지만, 어린 소년 앞에서는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그러나 M 부인의 입장에서 마냥 어리게만 보이는 소년이었지만, 소년의 입장에서 M 부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었고, 그런 까닭에 소년의 시선에서 M 부인의 일거수일투족은 결코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M 부인과 이를 지켜보는 소년. 첫사랑에 빠진 소년은 M 부인을 통해 어른들의 허영과 위선, 사랑과 고독을 감지한다.


"M 부인이 남편에게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마자 나는 바로 부인 옆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마치 그녀가 한 시간 전부터 같이 산보하자고 청해 놓은 것처럼, 마치 이미 한 달 내내 아침마다 그녀와 함께 산책이라도 해 온 것처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부인은 왜 그렇게 당혹스러워했을까? 또 사소한 거짓말을 할 때 도대체 그녀의 머리엔 무엇이 있었을까? 왜 그녀는 혼자 산보하러 간다고 말하지 못했을까? 이제 나는 어떻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할지 몰랐다."  (p.225 '첫사랑' 중에서)


사회학 연구자인 이승연은 자신의 최근 저서인 <손절사회>에서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체제일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삶, 인간 사회의 모든 측면을 경제적 관점에서 이해하게 함으로써 사회적 연대와 공공의 책임을 해체하는 하나의 정치적 세계관이자 '문화'라고 규정했다. 내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까닭은 도스토옙스키에 나오는 주인공의 모습이나 태도는 우리가 평소에 관계를 맺고 지내는 여러 관계의 간극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소심하여 연애 경험이 없는 남자, 질투심에 불타는 남편, 소년이 연애 대상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성인 여성 등 도스토옙스키가 설정한 소설 속 인물들과의 관계를 맺거나 유지하는 것은 별 이득이 없다고 판단할지도 모른다.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말이다.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한마디로 우리는 그들과 손절을 하고 말 것이라는 얘기다. 우리가 다양한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 사상에 물든 우리는 나에게 이득이 없는 관계는 곧바로 손절을 하는 바람에 나와 다른 타인을 연구하고 탐색할 기회마저 잃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삶을 통하여 배워야 할 것은 관계를 통한 의미와 깨달음이지 단순한 손익 관계가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의 손익 계산에 익숙한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 대신에 배척과 혐오로 일관한다. 나와 다르다는 것은 경계를 넘어 배척의 이유가 된 지 오래이다. 그래서인지 현대인에게 고전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어떤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나와 다른 타인을 배척하는 것뿐만 아니라 나와 다른 세대를 배척하기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단지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장마가 지나간 아파트 화단에는 말매미 울음소리가 시작되었다. 어찌나 시끄러운지 낮잠을 자기도 어렵다. 나의 뜻에 반한다는 이유로,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배척하고 없애야 하는가. 저 작고 보잘것없는 미물이 악다구니를 쓰며 묻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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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다 왔네.'라고 생각하는 순간, 처음에 목표했던 지점에 닿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사고에 직면했을 수도 있고, 예기치 않았던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근접했던 목적지에 이르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만 했던 기억들을 한두 개쯤 가슴에 품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진한 여운과 아쉬움을 삭이면서 말입니다. 평소 뛰어난 재능을 보이던 운동선수를 통해서도 그와 같은 사례는 종종 목격되곤 합니다. 프로 데뷔를 앞둔 시점에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도박이나 성범죄 또는 음주운전과 같은, 사회로부터 지탄받을 범죄에 연루되는 바람에 결국 목표로 하던 꿈이 좌절되는 사례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하나의 꿈이나 목표를 향해 달려왔건만 그것이 물거품이 되었을 때 또는 피곤을 무릅쓰고 장거리 운전을 하여 곧 집에 도착하려던 순간, 불의의 사고나 뜻밖의 소식으로 눈앞에서 그것을 놓치거나 이루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다는 건 어쩌면 당사자의 긴장감이 풀어졌거나 이미 목적지에 도달한 듯한 착각 속에서 도덕적 해이가 발생한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운명이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어떤 사건이 발목을 잡는 경우일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우리는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 예정에도 없던 인생의 새로운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장마가 시작된 탓인지 후덥지근한 날씨가 사람의 기분마저 바꿔놓은 듯합니다. 비가 오락가락하면서 대기 중의 습기는 차츰 높아지나 봅니다. 그에 따라 스트레스 지수도 비례하여 증가하고 말이죠. 하늘이 멀끔하게 갠 시간에 서둘러 산책에 나섰습니다. 비가 내리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인도의 보도블록 위에는 은행잎이 흩뿌려져 있고, 반려견과 함께 산책에 나선 어느 할머니는 당신의 반려견이 새로 생긴 물웅덩이를 피하게 하느라 동동걸음을 칩니다. 예측 가능한 범위 내의 무탈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꽤 괜찮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양솽쯔 작가의 소설 <1938 타이완 여행기>를 읽고 있습니다. 음식에 그닥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소설에 등장하는 음식 대부분이 생경한 것이지만, 작가의 섬세한 표현만큼은 나무랄 데가 없다, 생각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움직여 창밖을 보았다. 열차가 마침 광활한 논을 지나고 있었다. 먼 곳도, 가까운 곳도 모두 황금빛 바다를 이루며 벼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논 너머에는 산이 있었다. 가까운 산은 푸르고 먼 산은 쇠붙이처럼 회색빛이 도는 파란색이었다. 산맥이 겹겹이 이어지고, 부드럽고 고요한 뜬구름이 곡선 가장자리에 걸려 있었다. 나는 살며시 숨을 내쉬었다. 달아오른 뺨이 천천히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때 샤오첸이 낮은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음악 선율과도 같은 웃음소리였다.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웃음소리. 나도 모르게 손을 올려 가슴을 눌렀다."  (p.265~p.266)


돌이킬 수 없는 여름입니다. 이 장마가 끝나고 나면 무덥고 습한 날씨가, 숨이 턱턱 막힐 듯한 더위가 한동안 이어지겠지만, 우리는 그 사이 길거나 짧은 여름 휴가를 다녀오고, 휴가지에서 보낸 고생담을 자랑스레 내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행의 진정한 묘미는 여행에서 돌아와 그 여행을 되새기는 데 있다'고 썼던 정여울 작가의 말처럼 여행의 되새김을 위해 우리는 그 힘든 여행을 매년 계획하고, 그 열기 속으로 과감히 뛰어드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늘이 다시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예기치 못한 어느 순간에 우리의 인생처럼 갑작스러운 비가 한바탕 쏟아질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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