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서 帛書 - 125년 만에 도착한 편지
이상훈 지음 / 책마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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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세례를 받은 지 10여 년이 흘렀다. 가족 모두가 천주교 신자라거나 모태신앙도 아닌, 천주교는 나에게 꽤나 낯선 종교였지만 어떤 특별한 계기도 없이, 그야말로 뜬금없이 천주교 신자가 되기로 결심했던 건 우연이거나 필연이었을 테다. 그것도 천주교를 믿는 다른 이의 권유나 전도도 없이 오직 나의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이끌림이었다는 건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그 인과관계의 건너뜀이 큰 의문부호로 남는다. 그리고 나는 당연한 귀결처럼 냉담자가 되었다.


이상훈의 역사소설 백서(帛書)를 읽는 내내 나는 소설의 주인공인 황사영의 삶과 나의 삶을 번갈아가며 생각했다. 250여 년 전에 태어난 사람과 나를 비교한다는 게 가능하지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같은 종교를 믿으면서 온갖 박해 속에서도 종교를 버리지 않았던 황사영과 자유로운 종교 활동이 보장되는 상황에서 냉담자로 남은 나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 극단적인 대비가 아닐 수 없었다.


"백서를 쓰는 황사영의 심정을 가슴으로 느끼며 또 읽었다. 내가 황사영이 되고 황사영이 내가 되었다. 239년 전에 살았던 황사영이 내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황사영은 천주교 순교자로 하느님을 위해 기꺼이 사지가 찢겨 죽는 순교의 길을 택했지만, 그는 천주교에서도 대접받지 못하고 우리 역사에서도 버림받은 존재가 되었다. 그가 외국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조선에서 벌어지는 살육의 미친 춤판을 끝내 달라고 교황님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 일이 과연 역적으로 비난받을 행위일까? 당시 조선 백성의 삶과 정치 상황 그리고 천주교 박해의 실상을 안다면, 누가 황사영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p.6 '작가의 말' 중에서)


1775년 조선 후기의 정조가 집권하던 시기, 황석범의 유복자로 태어난 황사영은 16세의 나이로 진사과에 장원급제한 천재였다. 정조의 주선으로 정약용의 집안과 관계를 맺게 된 황사영은 결국 정약용의 큰형인 정약현의 딸 정명련과 혼인하여 정약용의 조카사위가 된다. 조선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였던 이승훈이 정약용의 누이와 혼인함으로써 정약용의 집안 역시 천주교를 믿게 되었던 바, 정약용의 조카사위가 된 황사영 역시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지 싶다. 캄캄한 토굴 속에서 숨어 살면서 당시 스물여덟 살이었던 황사영이 가로 62cm, 세로 38cm의 작고 흰 비단 위에 일만 삼천 자가 넘는 한자를 붓으로 적어 내려갈 때의 절절한 심정을 작가 또한 백서 원문을 읽으면서 가슴으로 느꼈었다고 한다. 2027년 8월 WYD World Youth Day(세계청년대회)가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고 세계의 가톨릭 청년들에게 우리 순교의 역사를 알리고자 소설을 완성했다며 집필 목적을 적었다.


"황사영은 토굴에서 백서를 마쳤다. 마지막 문장을 쓰고 난 후 사영은 정신을 잃었다. 다음날 아침 김귀동이 불러도 기척이 없자 항아리로 막았던 입구를 헤치고 토굴로 들어왔다. 황사영은 탈진해서 쓰러져 있었다. 그만큼 마지막 남은 기력을 백서에 쏟아 부은 것이다. 사영의 몸은 불덩이 같았다. 김귀동은 의원을 부를 수도 없고 해서 급하게 열을 내리는 민간요법으로 응급조치를 하고 차가운 물로 적신 수건으로 사영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p.157)


순교자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신앙을 지키고자 자신의 목숨까지 바쳤던 수많은 희생자 중 한 사람이었던 김범우의 7대손인 진복이 자신의 친구인 박현철 신부와 함께 순교지를 찾아나서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내놓아야 했던 당시 조선의 민중들이 겪어야 했던 아픈 역사와 그 역사의 한 귀퉁이를 가까스로 붙잡기 위해 애쓰는 진복의 모습이 교차하면서 소설은 진행된다. 황사영이 결국 능지처사의 죽음을 당하고 그의 아내인 명련이 관노가 되어 두 살 난 아들과 함께 제주도로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정약용의 모습을 그린 장면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 먹먹하게 읽었다.


"자신은 양반 신분의 유배 생활에서도 이렇게 냉대와 멸시를 받고 있는데 그렇게 곱고 우아하던 조카 명련이 노비가 되어 외딴 섬 제주도에서 노비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약용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약용은 조카 명련에 대해 글을 남길 수가 없었다. 황사영과 명련은 천주교 괴수로 지목되었기에 약용이 그들을 안타까워하는 글을 남기면 이것이 꼬투리가 되어 노론 벽파의 공격이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생각에 명련에 대한 안타까움은 글로 표현하지 못하고 가슴에 담아둘 수밖에 없었다."  (p.194)


오락가락하던 장맛비는 제헌절 연휴에도 요란하게 이어졌다. 나는 이상훈작가의 역사소설 <백서(帛書)>를 곰곰 되새겨보며 인간에게 과연 종교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내가 지금도 여전히 천주교 신자로 남아 있었다면 결코 들지 않았을 질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각자의 삶에서 아로새겨진 개인의 성향과 인성은 그의 삶이 그것에 반하여 펼쳐질 때마다 도돌이표처럼 원래의 삶으로 되돌려 놓는다. 삶의 원칙이란 바로 그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내놓았던 황사영 역시 그러했을 터, 우리는 각자의 삶이 지정하는 외진 길을 따라 조용히 나아갈 뿐이다. 냉담자로 살고 있는 나도 역시 언젠가 고해성사를 하고 주말 미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언젠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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