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 위에 우리가 있었다 - 대일항쟁기, 강제 동원된 조선인의 기억과 흔적을 찾아 일본을 걷다 19100829-19450815
이재갑 지음 / 책숲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좋아하는 사진작가가 있다. 2005년 루게릭병으로 세상을 떠난 김영갑 작가가 그분이다. 작가 스스로 '외로움과 평화를 찍었다.'고 했던 그의 사진들을 보면 그가 20년 동안 머물렀던 제주도의 바람, 정서, 그리고 작가의 영혼이 그가 촬영한 한 장의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틀에 박힌 한 장의 스틸컷이 아니라 작가 스스로가 느낄 수 있는 황홀한 순간을 만나기 위해 같은 장소를 수없이 방문하고 기다려야 했던 작가의 열정은 이제 그가 남긴 작품으로만 만날 수 있다. 사진은 작가의 의지와 신(또는 자연)의 의지가 결합된 순간의 미학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신의 의지를 깨닫게 되는 그 순간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최근에 나는 김영갑 사진작가와는 결이 다른, 이재갑 사진가의 사진 에세이 <그 길 위에 우리가 있었다>를 읽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작가에 대해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다. 나는 적어도 작가의 에세이집을 한두 권쯤은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의 아픈 과거와 역사의 현장에 대해 천착했던 작가는 한국전쟁과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일제 강점기 때 끌려갔던 조선인 노동자와 원폭 피해자 등 전쟁이 남긴 역사의 흔적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사진은 어쩌면 시간 속에서 스러져가는 시간의 파편을 한 장의 사진을 통해 들춰내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그가 생각하는 사진은 유구한 시간 속을 흐르던 '시간의 운석'인 셈이다.


"글로 표현하기는 민망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이렇게 표현한다. 풀과 돌, 나무들이 말을 걸어왔다. 인간의 언어로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현장의 소리를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하고자 했다. 마치 무엇에 홀린 것처럼 현장에 가면 여러 소리가 들린다. 사진으로 말(언어)을 한다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어렵고 힘들다. 그러나 운명처럼 들려오는 현장의 소리를 지나칠 수 없어 한참을 듣고 또 듣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자신만의 언어로 다가오고 이를 시각화 작업을 하고 1차, 2차 과정을 거쳐 마무리하게 된다."  (p.6 '저자 서문' 중에서)


<그 길 위에 우리가 있었다>에서 작가는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으로 끌려가 강제 노역에 시달렸던 조선인 노동자의 흔적을 찾아 일본 전역을 훑고 있다. 제1장에서 다루고 잇는 후쿠오카를 비롯하여 2장 나가사키, 3장 오사카, 4장 히로시마, 5장 오키나와로 이어지는 이 책은 많은 한국인들이 찾는 관광 대국 일본의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우리 선조의 희생과 피로 얼룩진 가슴 먹먹한 역사의 현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우리는 그저 삼일절이나 광복절 등 특정 국경일에 한하여 우리의 아픈 역사와 조상들의 희생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 지나칠 뿐 그때의 기록을 생생하게 대면하려는 노력은 잘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우리 선조의 희생을 한낱 조롱거리로 삼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발생하고, 친일파 선조를 둔 어느 연예인이 방송에 나와 자랑스럽게 밝히는 해프닝도 발생한다.


"멀리서 보면 섬 전체의 모습이 군함 같다고 해서 일명 쿤칸지마(軍艦島)로 불렸고,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조선인과 중국인이 강제 동원되어 지옥과도 같은 노동에 시달렸다고 해서 광부들 사이에서는 지옥 섬이라고 불렸다. 원폭 피해자의 삶과 그 뒷이야기를 담은 한수산의 소설 <까마귀>의 실제 배경이기도 하다."  (p.123~p.124)


작가가 찍은 사진과 직접 쓴 글을 따라가다 보면 사진 작업이 단순히 좋은 사진기와 작가의 테크닉에 의한 하나의 기계적인 결과물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사진이야말로 작가의 열정과 작가의 깊은 공명이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구현되는, 일종의 영혼의 구현이나 영혼의 발현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한 장의 사진 속에 영혼을 담지 않으면 이것을 감상하는 관객은 어떤 감동도 받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책을 읽었던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사진과 글에서 느꼈던 먹먹한 감정 탓에 때로는 책을 덮고 잠시 먼산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지 않을까 싶다.


"목숨을 담보로 진행된 무리한 공사 탓에 숙소를 탈출하는 일도 많았다. 낯선 지형 때문에 깊은 산속을 돌아다니다가 도랑이나 폭포 등으로 떨어져 실족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도망가다 붙잡히면 다리에 나무를 매달아놓고 나뭇잎을 태워 연기를 마시게 하는 등 갖가지 방법으로 고문했다고 한다. 기사에는 전혀 믿기 어려운 내용도 있었다. '히로시마 강제 연행을 생각하는 모임'의 대표는 히로시마현 북동부 쪽에 있는 고보댐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을 소개했다. 1942년 시작된 댐 공사에는 경상도 출신의 조선인 노동자 2,000여 명이 강제 동원되어 일하고 있었다. 댐 구조물 공사를 하던 중 조선인 노동자들이 구조물 밑바닥 시멘트 더미 위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밑으로 떨어진 그들은 위를 향해 살려달라고 있는 힘을 모아 소리쳤다. 동료인 조선인 노동자들이 밧줄을 내려보내 구하려는 순간 일본인 감독이 작업을 중단하지 말라고 고함을 내질렀다. 이어 감독은 직접 시멘트를 삽으로 떠서 아래로 부었다. 조선인들은 울음을 터뜨리며 머리 위로 떨어지는 시멘트를 팔로 막으려 했지만 잠시 후 조용해졌다. 생매장당한 것이다. 당시 사망한 조선인 수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 뒤 고보 댐은 '인골(人骨) 댐'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p.258~p.259)


아침에 비를 뿌리던 하늘은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며 대기의 습도를 높이고 있다. 아파트 화단에 핀 맨드라미도 더위 탓인지 시들시들 생기를 잃고 있는 듯하다. 얼마 전 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자신이 속한 사진 동아리의 정기 전시회에서 자신이 걸었던 사진 다섯 점 중 두 점이 팔렸다며 좋아하던 게 문득 떠오른다. 공대를 다니고 있는 아들이 졸업 후 어떤 방향으로 진로를 정할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사진은 손에서 놓지 않을 듯하다. 홀로코스트의 생존자 빅터 프랭클이 주창했던 로고테라피의 주장처럼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으며, 그 의미를 통해 삶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아들도 자신이 좋아하는 사진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해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게 된다. 밝아졌던 하늘은 다시 또 어두워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기억의 구름이 고난의 능선을 따라 흐르다가 의식의 대지를 향해 한차례 거센 빗줄기를 흩뿌리곤 합니다. 메말랐던 의식의 대지는 그 비로 인해 한동안 습습한 과거 기억에 젖어들게 됩니다. 우리의 의식 속에서 과거 기억에 대한 회상과 그리움이 작금의 초조한 현실과 뒤섞일 때 우리는 비로소 안정을 찾게 됩니다. 가빴던 호흡이 느려지고 그득했던 욕심도 조금쯤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사는 게 뭐 별 건가?' 하는 생각에 이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오직 앞만 보고 달린다면 우리의 수명은 어쩌면 지금의 절반쯤으로 줄어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은 밖에도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비가 내리는 원리도 우리의 기억 체계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겪는 고난의 능선이 높으면 높을수록 기억의 구름이 짙고 풍성하게 쌓일 테고, 언젠가 그 구름을 통해 소나기처럼 세찬 기억이 의식의 대지를 향해 쏟아질 테니까 말입니다. 김소연 시인의 여행 에세이 <그 좋았던 시간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등장합니다.


"겨울은 여름을 떠올리기 가장 좋은 계절이다. 여름을 떠올리며 그때 미처 하지 못했던 한 가지를 아쉬워할 수 있는 계절이다. 여름을 열렬히 그리워하는 밤. 성에가 낀 얼룩덜룩한 유리창을 보면서, 다음번 여름엔 소낙비가 내릴 때에 유리창 청소를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창 바깥에 서 있는 메타세쿼이아 숲을 선명하게 내다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귤차를 마시다 안경알에 낀 성에가 사라지길 기다리는 잠깐 동안에, 여름의 냄새가 다녀간다. 겨울의 반대편에 여름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웃는다."  (p.179 '겨울에 꺼내는 여름' 중에서)


주말 동안 이어지는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올해의 늦더위도 조금씩 수그러들 것 같습니다. 길고 길었던 여름의 터널을 비로소 벗어나는 느낌입니다. 며칠 전에 있었던 홍수로 인한 네팔 재난의 현장을 뉴스로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우리가 이번 여름에 겪었던 더위와 가뭄이 가난한 나라의 참혹한 재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 재난의 주범은 화석연료를 많이 사용하는 선진국의 국민들인데 피해는 고스란히 가난한 나라의 몫으로 전가되고 있는 이 현실이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넘어 죄책감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간이 흘러 피해를 입은 네팔 주민과 사고를 당한 많은 외국 관광객의 유가족들의 기억도 차츰 희미해지고 언젠가 잊히겠지만 그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을 듯합니다.


아침에 잠깐 내리던 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개었습니다. 높아진 습도 탓인지 끈적끈적한 더위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립니다. 어느새 에어컨의 리모컨을 손에 쥔 나는 께느른한 오수의 유혹에 흔들립니다. 잠에서 깨고 나면 다시 비가 시작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나는 여름의 한가운데서 허우적대며 누군가의 구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지나고 나니 여름이었습니다. 이 한마디 말을 남기기 위해 지난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Jeanne_Hebuterne 2026-09-09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쥐님 너무 오랜만에(몇 년만에) 서재를 찾아왔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이니 얼마나 반가웠는지 몰라요. 이런 잔잔하게 스미는 글도 부럽고요. 잘 지내셨지요?

꼼쥐 2026-09-10 16:54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정말 오랜만이죠? 이렇게 다시 뵐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요. 비록 블로그에서만 뵙는 것이지만 자주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댓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고독은 연결된다 - 이타적 에고이스트의 책 읽기 ㅣ 나와 잘 지내는 시간 3
김성민 지음 / 구름의시간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선택하는 기준은 그 사람의 성향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어떤 동인으로 그 책에 흥미를 느꼈는가 하는 문제가 때로는 한 사람을 평가하는 데 더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예컨대 중년의 한 남성이 서점에 들러 한 권의 동화를 선택했다면 '그 나이에 왜?'라는 질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성인이 된 남성들 중에도 여전히 동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비록 그것이 그 사람의 오래된 취향이라고 할지라도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그 나이에 동화를 고른 동인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고, 그것이 곧 그 사람을 평가하는 하나의 관점이 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자신을 일컬어 '이타적 에고이스트'라고 하는 김성민 작가의 리뷰 에세이 <고독은 연결된다>를 읽게 된 것은 단순한 우연이었다. 며칠 전 자주 들르는 도서관에서 이 책 저 책을 기웃거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괜찮은 책인 듯 보여 대출로 이어졌으니 말이다. 물론 나는 다 읽지도 못할 거면서 대책도 없이 책만 빌려 오는 상습적 '책 산책자'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빌려온 책을 무작정 쌓아놓고 묵히다가 들춰보지도 않은 채 책을 반납하는 비양심적인 사람은 아닌 것이다. 이번 책처럼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후루룩 다 읽어버리는 경우도 더러 있으니 말이다.


"도서관을 단순히 책 빌리는 곳이라고만 말한다면 허전하고 부족하다. 도서관은 책 자체를 체험하는 곳. 책을 구경하고 읽으며 도서관에서 마련한 수업을 듣고 책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다채로운 방법이 있는 곳이다. 베스트셀러나 신간 위주로 배열된 대형 서점에서는 책들이 저마다 존재감을 뽐내지만, 도서관에서는 책들이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수백 년 전에 쓰인 책들이 지금 현재와 만나고 있다는 사실, 무덤에 있는 저자들이 곁에 살아 있는 것 같은 상상을 한다. 그래서 도서관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무한한 세계라고 말한 보르헤스가 떠오른다."  (p.62)


<고독은 연결된다>에는 작가가 책을 읽고 느낀 감정이나 사유 또는 연결된 에피소드나 깨달음 등으로 인하여 책을 읽는 독자 역시 작가가 언급한 책을 읽고 작가와 비슷한 경험을 해보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게 된다. 이런 부류의 책 대부분이 그렇지만 말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도서관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나도 모르게 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와 같은 상습적 '책 산책자'에겐 이 책이 무척이나 위험한 책이라고 하겠다. 빼곡하게 적은 도서 목록을 들고 하시라도 도서관 나들이를 마다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여기에 모인 스물아홉 편의 글은 함께 읽기와 다시 읽기의 결과물이다. 대개 읽고 나서 쓰지만 때로는 쓰기 위해 읽는다. 쓰기 위해 다시 읽는 과정은 나의 이해를 허물고 재구성하는 시간이었다. 삶을 다시 살 수 없지만 책은 얼마든지 다시 읽을 수 있다는 말처럼 다시 읽기는 독자로서 갖는 즐거움이다."  (p.8 '들어서며' 중에서)


오늘 아침 새벽 운동에 나섰던 나는 깜짝 놀랐었다. 산의 입구에서부터 매일 들었던 매미 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귀뚜라미 소리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이렇게 갑자기 모두 사라졌다고?' 나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웬걸, 산의 능선에 올라서자 매미 소리가 어제와 다름없이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날씨가 다시 더워지는 바람에 매미들도 조금 더 시원하고 조용한 곳으로 피서를 왔나?' 생각하면서 피식 웃음이 터졌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습한 등산로를 매미 소리 덕분에 가볍게 걸을 수 있었다. 소리에 민감한 우리 인간들처럼 어쩌면 여리디 여린 귀뚜라미들도 시끄러운 매미 소리에 한껏 항의를 할지도 모르겠다. 아파트 층간 소음 문제로 다투는 우리들처럼 말이다.


"층간 소음문제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인 이유는 개인 간에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개인 간 해결하려다가 감정이 격해져 폭력을 행사하여 정말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 뉴스를 흔하게 접하곤 한다. 여기서 누스바움이  주목하는 것은 감정이다. 감정이 사회 정치적 문제를 유발할 수 있는 요인이 되는 동시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도 감정에 있다고 본다."  (p.184)


무더위가 정말이지 오래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주택가 가까운 곳에서 시끄럽게 울던 매미도 차츰 먼 곳으로 떠나고 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미세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는 것이다. 8월의 마지막주를 우리는 힘겹게 보내고 있지만 그것이 비단 인간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듯 서둘러 온 귀뚜라미도 더위 속에서 힘겹게 제 짝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시간은 흐르고, 새로운 기억들이 각자의 삶 속에 새록새록 쌓이고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처서도 지났지만 더위는 여전합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귀뚜라미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매미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지 않고 온 산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을 뿐입니다. 계절의 변화는 이렇듯 더디게 다가오는 듯하지만 이것이 임계점이야, 하는 경고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불고, 아침 바람에 소슬한 한기를 느끼게 될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걸 알기에 작금의 더위를 아주 세세히 느껴보곤 합니다. 잊지 않으려는 듯 말입니다.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지요. 계절도, 우리의 젊음도, 사랑하고 미워하는 시간들도.


단단하던 몸도 나이가 들면서 차츰 흐물흐물 풀어지는 것처럼 우리의 정신 또한 신체의 변화와 함께 변할 수밖에 없다는 걸 나 역시 나이를 먹어가면서 확실히 깨닫게 되는 요즘입니다. '당연한 거 아니야?'라고 반문하실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노인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주변에는 치매를 앓고 있는 사람이 덩달아 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노인의 기억력 감퇴나 인지 기능 저하가 아닙니다. 한평생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개인의 가치관이나 신념, 정의나 도덕성, 심지어 종교적 신념까지도 나이가 듦에 따라 너무나 쉽게 변질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평생을 민주화 운동과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일관했던 김지하 시인이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제목의 기고글을 씀으로써 자신의 신념마저 부정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던 것처럼 개개인이 수립한 정의나 가치관은 미약하기 짝이 없어서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변하거나 자신의 정신을 올곧게 지탱하던 체력이 소진되면 너무도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최근에 보였던 진보진영의 백 모 교수가 그렇고,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올랐던 황 모 작가가 그렇습니다. 하물며 장삼이사와 다름없는 노 모 변호사나 신 모 변호사, 이 모 기자나 이 모 작가 등이야 달리 말할 필요도 없을 테지요.


어제는 유시민 작가가 출연한 유튜브 방송을 보았습니다. 나이에 비해 비교적 튼튼한 체력을 유지하고 있는 덕분인지 유시민 작가는 아직 자신의 가치관을 잘 유지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의 기억력이나 논리는 빈틈이 없었고, 분석 능력 또한 탁월했습니다. 정치평론가를 자처하는 우리나라의 잔잔바리 유튜버들은 유시민 작가의 논리를 부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오직 인신공격과 조롱을 내뱉음으로써 자신의 몸값을 높이려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구린내가 진동할 뿐입니다. 나는 지금 미국작가 월리 램이 쓴 <강물이 멈춘 날(The River Is Waiting)>을 읽고 있습니다.


"오른쪽 뒷바퀴에 무언가 살짝 걸리는 느낌이 전해지자, 내가 쌓아 둔 장작더미에서 나무 한 토막이 굴러떨어졌나보다 생각한다. 장애물이라면 그거일 거라고, 그런데 저 사람들이 왜 저렇게 소리를 지르지? 나는 차를 몇 미터 앞으로 뺐다가 다시 후진하면서 장애물을 넘어갈 만큼 가볍게 가속 페달을 밟는다. 그때 백미러로 팔을 휘저으며 우리 쪽으로 달려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도대체 왜 저래? 저 여자가 왜 저렇게 비명을 지르는 거야? 그러다 나는 알아차린다."  (p.26)


우리가 알아차리는 비극은 일이 엉망으로 변한 결과일 뿐이지 진행 중에 있는 과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맞는 대부분의 비극은 처음으로 되돌릴 수 없는 불가역적인 현상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오만한 권력자로 변한 대통령의 모습을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보아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열역학 제2법칙처럼 가역적인 변화가 아닌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에서 발생하는 과정은 모두 가역과정이 아니라는 걸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예수의 아들
데니스 존슨 지음, 박아람 옮김 / 기이프레스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드러나지 않는 삶의 음영을 수시로 확인할 수는 없겠지만, 이따금 마음의 눈에 편광 필터를 장착한 채 자신의 내면을 샅샅이 훑어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나 자신의 외관이 아닌 내면을 시간을 들여 꼼꼼히 살핀다는 건 낯설고 번거로운 일일뿐더러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마음에 난 상처는 그 실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상처의 크기도, 발병의 원인이나 시기도 무엇 하나 제대로 밝혀지는 게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살피는 일에 순진할 정도로 무지하거나 관심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습관으로 하여 우리는 자신의 내면이 타인의 그것처럼 데면데면하고 푸접없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내면과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긴요한 일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에 있던 근육이 나이와 함께 소실되는 것을 염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게는 없던 마음의 근육이 나이가 들수록 더욱 절실해지는 것이다. 나와 가까웠던 사람들이 하나둘 작별을 고하기도 하고, 종국에는 나만 홀로 남겨진 듯한 세상이 머지않은 시기에 도래한다는 건 너무나 명확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마음의 근육을 조금씩 키워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영화, 음악, 명상, 독서 등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겠다. 심지어 어떤 이에게는 달리기가 그 역할을 대신할지도 모른다. 그나마 책을 싫어하지 않는 나로서는 여러 작가의 글을 통해 나의 내면을 살피는 데 익숙할 뿐이다. 그와 같은 역할을 했던 작품은 읽고 지나친 후에도 가끔 생각이 난다. 얼마 전에 읽었던 데니스 존슨의 소설 <기차의 꿈>도 그런 책 중 한 권이다. 모름지기 좋은 책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자기도 모르게 부지불식간에 떠오르거나 연상되는 어떤 사물이나 상황으로 인해 소설 속의 한 장면을 자신의 의식 속으로 소환하게 되는 책. 그렇게 소환된 소설 속 한 장면으로 인해 나의 내면이 자연스레 내 의식의 벽면에 파노라마처럼 상영되는 일.


"사고 차량에 늘어져 있던 남자는 내가 지나갈 때 아직 살아 있었다. 이 무렵 나는 그가 심하게 다쳤다는 사실에 조금 익숙해져서 걸음을 멈추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는 요란하고 무례하게 코를 골았다. 숨을 쉴 때마다 입에서 피가 부글부글 나왔다. 그런 숨조차 많이 남지는 않은 듯했다. 나는 알았지만 그는 몰랐고, 그렇기에 나는 그를 내려다보면서 이 지상에서 인간의 삶이 얼마나 측은한지 절감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가 결국 죽는다는 것,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는 자기가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내게 말할 수 없고 나는 현실이 어떤지 그에게 말할 수 없다는 것, 그 점이 내게는 지독히 측은하게 느껴졌다."  (p.30 '히치하이킹 도중에 일어난 자동차 사고' 중에서)


데니스 존슨의 단편집 <예수의 아들>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거나 평범한 이의 삶과 비교하면 무척이나 예외적인 삶을 다루고 있다. 20대 내내 마약과 술에 중독된 채 살았던 작가의 경험을 반영한 듯 책 속의 인물들은 모두 삶이 부러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부서지고 흩어져서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의 삶'으로의 복귀가 불가능해 보이는 삶일지라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반짝이는 순간이 기적처럼 찾아온다는 것이다. 작가는 그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고 노력한 것 같다. 그러나 반짝이는 그 순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의 삶, 이를테면 허물어지고 한없이 흐트러진 삶을 보여주기 위해 작가가 제공하는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의 모습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너무나 삐뚜름하게 보인다. 구멍이 숭숭 난 스웨터처럼 온전한 모습으로는 결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바인에서는 그런 순간이 많았다. 오늘이 어제인 줄, 어제가 내일인 줄 착각하는 순간. 왜냐면 우리는 모두 우리가 비참하다고 여기며 술을 마셨으니까. 우리는 그런 무력감, 우리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우리는 수갑을 찬 채로 죽을 터였다. 결국 우리의 삶은 강제로 종지부를 찍을 터였고 심지어 우리 잘못도 아닌 일로 그렇게 될 터였다. 우리는 그렇게 상상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늘 터무니없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곤 했다."  (p.63 '보석(保釋)' 중에서)


데니스 존슨의 단편집 <예수의 아들>은 편집 또한 기괴하다. 소설의 목차는 책의 가장 뒤편에 배치되어 있고, 책에 실린 단편소설의 제목 역시 소설이 끝나는 마지막 페이지에 등장한다. 말하자면 독자는 단편소설의 제목도 모른 채 본문부터 읽기 시작하여 소설을 다 읽은 후에야 비로소 제목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편집 방식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독자라면 제목이나 목차를 먼저 확인하고 읽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책에 실린 단편소설의 제목을 보면, ''히치하이킹 도중에 일어난 사고', '두 남자', '보석', '던던', '일', '응급실', ';더럽혀진 결혼', '다른 한 남자', '해피아워', '시애틀 종합 병원에서 본 굳건한 손', '베벌리 요양 병원' 등 11편이다. 소설은 지극히 짧은 소설에서부터 적당히 긴 소설에 이르기까지 꽤나 다양하다. 소설은 사실과 환각이 뒤엉키고 시제 역시 불분명한 까닭에 처음에는 잘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가 서술하지 않아 잘려나간 듯한 부분 역시 독자의 상상력으로 자연스레 메워지게 된다.


"내가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기껏해야 일주일에 10시간, 12시간, 그 정도였다. 나는 정규직 일자리를 찾고 있었고 헤로인 중독 치료 모임에도 나갔으며, 지역 알코올 중독 수용 센터에도 정기적으로 보고해야 했고, 사막의 봄을 산책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베벌리 요양 병원의 원형 복도는 마치 이승의 삶들 사이에 머무는 곳처럼 느껴졌다. 한 생을 살고 난 뒤 돌아와서 다른 영혼들과 뒤섞인 채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곳."  (p.181 '베벌리 요양 병원' 중에서)


우리는 이따금 자신의 삶은 되돌아보지 않은 채 타인의 삶을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마치 '남의 눈에는 티, 내 눈에는 들보'라는 격언처럼 제 눈에 있는 들보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데니스 존슨의 단편집 <예수의 아들>을 읽다 보면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들에 대해 '왜 그렇게 살아?'라고 비난할 사람이 혹여라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존경해 마지않는 교황이나 달라이라마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삶은 다 거기서 거기라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나는 너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천만의 말씀이다. 그런 사람을 주위에서 볼라치면 어느 영화의 시니컬한 대사처럼 "너나 잘하세요."라고 충고하는 게 맞을 듯하다. 데니스 존슨이 이 소설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당신의 인생도 이들과 다를 게 없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